철컹철컹- 한강 다리 위로 지하철이 달렸다.
오후 5시 퇴근시간에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도심으로 쏟아져 나왔다.
지하철역으로 내려온 여울과 하완은 사람들에게 휩쓸리지 않기 위해, 딱 붙어서 걸었다.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여울이 하완에게 기댈 때마다, 하완은 긴장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곳이 생활의 터전이었던 여울은 이제 서울이 낯설었다.
전 남친이 되버린 마루가 낯선 것처럼.
“지하철 와요.”
하완이 여울의 소매 자락을 잡고 당겼다.
잠깐 딴 생각에 잠겨있던 여울은 곧장 정신을 차렸다.
두 사람 말고도 수많은 사람을 태운 지하철은 북촌을 향해 달렸다.
하완이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고, 여울은 자꾸만 밀착 대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하완에게 딱 붙어 있었다.
“밀지 마세요.”
누군가 외쳤다. 역에 멈출 때마다 밀려들어오는 사람들 때문에 두 사람이 점점 가까워졌다.
아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던 여울과 하완의 사이가 자꾸만 좁혀졌다.
이러다가 여울이 하완의 심장박동 소리마저 들을 기세였다.
“괜찮겠어요?”
“아..네...”
시무룩한 얼굴로 마루유통 건물을 나온 여울에게 하완이 부탁을 하나 했다.
하완 아버지의 환갑잔치에 ‘아삭파이’직원으로 가 달라는 것.
여울은 잠시 고민했다.
아무리 중요한 사업을 같이 진행한다 하더라도 사장님 아버지 환갑잔치를 가도 될 만큼 가까운 직원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굳이 시간도 있는데, 거절하면 그것도 이상했다.
“그냥 맛있는 밥 한끼 먹고 온다고 생각해요.”
“네. 저 배고파요."
여울이 싱긋 웃었다.
하완의 입가에도 미소가 머금었다.
***
서울 도심 한복판에 낯설게 자리 잡은 북촌 한옥마을에 저녁이 왔다.
고급 진 한옥들 사이에서도 서울 도심이 한 눈에 보이는 언덕 위 한옥 앞에 큰 트럭이 멈춰 섰다.
트럭에는 ‘아삭뷔페’라는 상호명이 눈에 띄었다.
트럭에서 운반되어지는 음식들은 싱싱한 연어 샐러드, 캐비어가 올려 진 카나페, 구운 랍스터 등 하나같이 다 값비싼 것들이었다.
하완 아버지의 환갑잔치를 위해 하완의 새엄마이자, 이 집의 안주인인 사모님이 바쁘게 움직이며 출장 직원들에게 세심한 지시를 내렸다.
“들어가시면 부엌으로 가지 마시고, 응접실에 테이블셋팅 해뒀으니까 거기에 두세요.”
“네. 사모님.”
현관에서 60이 훨씬 넘어 보이는 남자가 지팡이를 짚고 나왔다.
불편한 다리에 비해, 그의 얼굴은 혈색이 돌고 머리털이 검었다.
그는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였다.
“뭘 이렇게 준비 많이 했어? 100세 시대에 환갑이 자랑도 아니고. 그냥 밥먹는 걸로 끝내지.”
남자의 불평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왜 이렇게 돈 많이 썼어.’라는 꾸중이 깔려 있었다.
“아이 참. 당신도.. 오늘 하완이 생일이기도 하잖아요. 당신 환갑보다 하완이 생일 챙겨주려고 차린 거에요. 나 여기 들어오고 나서 아들 생일 한번도 안챙기더만.”
흠.. 여자의 똑 부러진 말에 남자가 반박하지 못했다.
“당신 생일이야 내가 매번 맛있는 음식 손수 차려서 만들어줬지만, 하완이는 그러질 못했잖아요. 그렇다고 내가 차린 음식을 맛있게 먹을 애도 아니고. 내가 친엄마도 아닌데.. 당신 생일이랑 별로 차이 안 나니까. 일부러 하완이 생일에 맞춰서 환갑잔치 겸 하완이 생일축하자리에요.”
여자는 영리하게 말했다.
남자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다리를 끄집으며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자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비싼 화장품으로 볼 터치를 한 여자의 뺨에 고운 혈색이 돌았다.
쉰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샤넬 트위드 투피스를 멋스럽게 착장한 여자의 늘씬한 몸매와 기품 있는 외모가 이 집의 안주인임을 당당하게 증명하는 것 같았다.
한편, 하완의 본가 앞에 도착한 여울은 입이 떡 벌어졌다.
“대박..”
“여기가 제 본가에요.”
여울이 입을 딱 벌린 채, 하완을 바라보며 넋이 나간 듯이 말했다.
“이런 집은 TV에서 밖에 안 봤는데...”
“그래요? 난 20년 넘도록 본 곳인데...”
하완이 멋쩍은 듯이 말했다.
‘고작 서른에 파이가게 두 곳이나 주인이어서 자수성가 한 줄 알았는데, 원래부터 부자였어..’
여울은 기가 죽었다.
어쩐지 이 상황, 저번에도 겪었던 것 같다.
꼭 데자뷰가 온 것 같았다.
“우리 이제 들어가요.”
하완이 앞장섰다. 여울은 따라 들어가면서도 안절부절 못했다.
‘내가 여길 왜 따라 왔을까..’
***
자동차 한 대가 우우웅- 소리를 내며, 북촌 한옥마을 골목으로 들어섰다.
고등학생으로 추정되는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귀에 이어폰을 꽂고 차창 너머로 바깥을 구경했다.
소가 핥아 내렸는지 한껏 내린 앞머리, 반항적인 눈빛, 꽉 맞게 껴입은 교복까지 한 눈에 봐도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반항아가 분명했다.
옆에는 하완의 새엄마와 닮은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머리에 풍성하게 롤을 만 채, 띠꺼운 표정으로 운전을 하고 있었다.
“세원아 가서 잘하고.”
“잘할게 뭐가 있어요?”
“가서 말 잘 듣고 인사 잘하면 잘하는 거지.”
“.. 누구한테?”
“누구긴 누구야 이모랑 이모부한테.”
“아.. 그 돈 많은 영감님?”
“너는 이모부한테!”
세원이 무심하게 밖을 바라봤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도심가는 멀어지고, 이제는 이 곳 주민들이 정착해서 사는 주택단지 밖에 안 보였다.
대충 봐도 비싸 보이는 한옥들이 즐비했다.
‘엄마가 배 아플 만하네.’
이제 대충 밥 한 끼 먹고 어떻게 ‘튈까?’가 고민이었다.
그런 세원의 눈에 띈 것은 이모부의 집에 다다랐을 때, 보이는 들어가기는 어려워도 나가기는 쉬울 것 같은 커다란 현관이었다.
저 현관이라면 왠지 자신의 조기 귀가를 이뤄줄 것만 같았다.
세원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계획 되로 되고 있어. 계획 되로 되고 있어.’
이어폰에서는 세원의 심정을 반영하는 반복적인 음의 똑같은 가사가 흘러나왔다.
***
덜컹- 소리와 함께 여울이 하완의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이 특이하게 큼지막한 문 고리였다.
내부는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모던하고 차분한 인테리어였다.
누디한 베이지톤의 소파와 소파 옆 탁상 위를 차지하고 있는 백목련이 우아하고 기품 있는 집안의 분위기를 반영했다.
바닥의 마루와 색깔을 맞춘 낮은 베이지톤의 가구들은 한옥의 정취를 마음껏 뽐냈다.
만약 대한민국 왕실이 지금도 존재한다면 이런 느낌일 것만 같았다.
한 채의 집이 주는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여울은 감탄했다.
“너무 예쁘다..”
낯선 장소에서 감탄하고 있는 여울과 달리 하완은 한결 더 편해 보이는 얼굴로 집안 곳곳을 돌아다녔다.
“오랜만이네요. 여사님.”
출장뷔페 직원들을 돕고 있는 가정부 여사님과도 인사도 하고, 갑자기 많아진 사람들 탓에 한껏 예민해진 회색 줄무늬의 비싸 보이는 고양이를 쓰다듬기도 했다.
“오랜만이네. 테리. 우스는 어딨어?”
테리는 하완이 친근한지, 피하지도 않고 애정표현의 그대로 받아들였다.
2층 계단에서 집안의 분위기를 흡수한 것 같은 베이지색의 고양이가 나긋나긋한 걸음으로 내려왔다.
“쟤가 우스인가 보구나.”
여울은 중요한 행사에 비해 자신의 행색이 너무 초라한 것 아닌가 걱정됐다.
그나마 오늘 중요한 미팅자리라고 해서, 깔끔한 검정 슬랙스에 셔츠와 자켓을 걸쳐 자리에 위배되는 행색은 하지 않았다.
“어머. 이게 누구야?”
여울이 뒤돌아서자, 깔끔한 트위드 투피스를 입은 쉰이 넘은 여인이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여자의 웃는 얼굴에 진 주름은 전혀 나이 들어 보이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현명한 여자로 보이도록 만들어줬다.
“안녕하세요.”
이 집의 안주인이고도 남을 만큼의 포스를 풍기는 여자에게 여울은 허리를 숙여 넙죽 인사를 했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물었다.
“우리 하완이 여자친구?”
“네? 아니요!”
여울이 두 손을 양옆으로 휘저으며 부정했다.
그러면서도 너무 부정한가 싶기도 했다.
“직원이에요.”
“아, 그래? 직원 한명 데려온다더니. 의외로 여자였네?”
여자는 여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쓱- 훑었다.
시선이 느껴진 여울은 기분 나쁘기보다는 오히려 긴장됐다.
“이름이 뭐에요?”
“주여울이요.”
“전 하완이..”
자기소개를 하던 여자가 잠시 멈칫했다.
“하완이가 날 뭐라고 소개하던가요?”
뜻밖의 질문에 여울은 당황했다.
“네? 아.. 소개는 안 받았는데.. 아버지 환갑잔치 간다고 하셨어요.”
“아, 그래요? 난 하완이 엄마에요...”
“아, 네..”
분명 엄마라고 소개 받았는데, 여자가 말끝을 흐리는 게 느껴졌다.
“어머니!”
어디선가 나타난 하완이 다가왔다.
“하완아!”
두 모자의 상봉이었다.
둘은 반가워하면서도 거리를 뒀다.
어쩐지 모자지간 치고는 서로 너무 조심하는 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응접실로 향했지만, 오랜만에 만나 반가워서 포옹을 한다거나, 손을 잡는 등 스킨십은 절대 하지 않았다.
여울은 두 사람을 따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