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완이 따뜻한 커피 두 잔이 담긴 캐리어를 들고, 터미널 안 승강장으로 들어왔다.
밤새 내린 비 때문에 습한 공기가 승강장 안을 감싸 안았다.
비에 젖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대기의자에 앉아, 차를 기다리는 여울만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그림의 한 장면처럼 멈춰 있었다.
“여울씨.”
“네.”
여울이 뒤 돌아봤다.
여울의 귀에 달랑이는 작은 진주 귀걸이가 여울을 더 고고하게 만들어 줬다.
그 모습이 꼭 유명한 명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같았다.
“커피 사오셨어요?”
“아침 일찍 준비하느라, 밥도 안 먹고 왔을 텐데. 김밥도 좀 먹어요.”
하완이 뒤로 맨 백팩에서 알록달록한 쇼핑봉투에 쌓인 김밥 두 줄을 꺼냈다.
“사장님이 아침부터 만드신 건에요?”
여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니요.. 집 앞에 새로 개업한 분식집이 김밥이 꽤 맛있더라고요.. 종류도 다양하고. 저 요리 못해요..”
당황한 하완이 말을 더듬었다.
“아.. 요리까지 잘 하시면 완벽하죠.”
“네?”
“아니요..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여울이 멋쩍게 귀 뒷머리를 넘겼다.
짧은 대화 끝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침을 꼴깍 삼킨 여울이 용기를 내어 대화를 시도했다.
“그런데 파이는 잘 만드시던데요?”
“아, 그건 일이니까요.”
하완이 어깨를 으쓱했다.
약간의 칭찬에도 수줍어하는걸 보니 칭찬을 잘 못 견뎌 하는 것 같았다.
“아삭 파이는 어떻게 하게 되신 거에요?”
“저번에 과수원 알바 왔잖아요.”
여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친척분이 하시는 과수원 맞죠?”
잠깐 뜸을 들이던 하완이 대답했다.
“음..원래는 엄마가 하시던 과수원이에요.”
“지금은 어머니께서 다른 일 하시나 봐요?”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이슬비처럼 가늘게 바뀌었다.
하늘에 숨어있던 해가 환하게 얼굴을 드러냈다.
하완이 짧은 한마디를 했다.
"지금은 일을 안하셔요. 사실.."
평소답지 않게 하완이 어버버 말을 멈췄다.
하완은 급하게 화제전환을 했다.
“화장실 다녀올래요?”
“네?? 지금요?"
하완이 손가락으로 화장실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버스 타면 휴게소 도착하기 전까지 화장실 갈 일이 없잖아요.”
“아, 맞다. 그렇죠.”
“원래 ktx타고 가려 했는데, 여욱이가 또 고속버스를 예매했네요.”
“아, 괜찮아요. 아니.. 죄송해요.. 제 동생이 실수를”
“뭐.. 그럴 수도 있죠. 화장실 안 다녀와도 괜찮아요?”
“아니요. 다녀올게요. 금방 올게요.”
아무 의미도 없는 바보 같은 대화였다.
여울은 화장실을 가면서 계속 생각했다.
‘뭔가 마음에 걸려.’
***
터미널 안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들을 수정이 감상하고 있었다.
비가 내린 후 잿빛도시를 걷는 남자, 건물들 사이에서 우산을 쓰고 있는 남자, 건너편 창문에 비친 흐릿한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 등..
비에 젖은 것 같은 그림들의 향연이었다.
그림을 감상하는 수정 옆으로 탈색된 흰 머리를 하고 해골 귀걸이를 한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남자가 걸어왔다.
남자의 펄럭이는 검정코트가 음산한 기운을 가져오는 것 같았다.
“볼만해?”
남자의 묵직한 목소리가 수정의 귀에 거슬렸다.
“아니. 다 별로야. 넌 어쩜 주제가 그렇게 매번 일관적이니?”
수정이 비웃듯이 대답했다.
“그러게. 꼭 한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지 않아?”
휴- 한숨을 쉬고 수정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날씨 이야기를 꺼냈다.
“어쩜 작품이 다 이렇게 비를 맞는데, 밖에도 비가 오니? 아주 비를 몰고 오는 남자네.”
“그러게..”
“커피 마시러 갈래?”
남자와 수정이 갤러리를 나갔다.
수정이 남자를 터미널 1층에 있는 카페 아삭파이로 데려갔다.
“아메리카노 아이스로 두 잔이요.”
“네.”
준영이 계산을 하면서 수정의 남자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수정은 그런 준영을 흥미롭게 봤다.
준영이 커피를 가져오자, 수정이 준영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분 잘생겼어요?”
“네?”
“자꾸 쳐다보길래.”
“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관심 없는데요.’라는 말은 실례인 것 같았다.
“여기 2층에서 전시하는 작가인데, 루이라고.”
“아, 제가 알아야 하나요?”
“네? 풉! 하하하하하”
준영의 대답에 수정이 빵 터졌다.
“와. 너무 완곡한 거절이다.”
수정이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연신 웃으며 대답했다.
루이가 덤덤한 표정으로 준영을 보고 말했다.
“아, 고백도 안했는데 거절인건가요?”
난처한 준영의 얼굴이 빨개졌다.
“죄송해요!”
“죄송할것까지는..”
“준영아.”
여욱이 단호한 말투로 루이의 말을 잘랐다.
“와서 일해야지. 커피만 주고 있을 거야?”
준영이 빨개진 얼굴로 계산대가 있는 곳으로 왔다.
루이와 수정이 나갈 때까지, 어떻게 일했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수정을 따라 나가며 루이가 알수 없는 미묘한 미소를 짓고 나갔다.
루이의 시선에 끝에는 수정이 아닌 준영이 있었다.
“귀엽단 말이지..”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
마루유통 회의실에는 세 사람이 앉아있었다.
주여울, 박하완, 조마루.
하완과 여울이 나란히 앉고, 마루는 두 사람을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마루와 여울이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하완만 바라봤다.
하완이 난감한 표정으로 종이컵에 담긴 티백 녹차를 홀짝였다.
“저기.. 너무 나만 보는 거 아니에요?”
‘아..!’ 하완을 제외한 두 사람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죄송해요.”
“저도요.”
마루가 사과하자마자, 여울도 덧붙였다.
“둘이 친구에요?”
하완의 질문에 마루와 여울이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면 사귀었던 사이인가?”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두 사람 모두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옴싹달싹 했다.
“대충 그냥 알았던 사이로 알아 들을 게요.”
“사실..”
마루가 해명하기 위해 입을 뗐다.
‘안돼!’ 여울이 마루에게 하지 말라고 입모양으로 경고했다.
여울의 희번덕거리는 눈에 마루는 순간적으로 주인에게 반기를 들었다 후퇴한 강아지마냥 깨갱, 시선을 돌렸다.
하완은 마루와 여울의 사이를 대충 눈치챘지만 말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일정은 나왔어요? 앞으로 제가 업무상 자리를 비울 때마다 여울씨가 대리인 자격으로 일을 진행할 텐데, 설명 좀 잘 부탁드려요.”
“네! 네네!”
상황을 넘어가기 위해 마루가 격정적으로 대답했다.
여울은 이 상황이 몹시 불편했다.
전 남친이자, 현 짝사랑남이 한 곳에 있다니 이보다 더한 최악의 상황은 앞으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불편한 건 마루와 하완도 매한가지였다.
마루는 여울 옆에 찰싹 붙어있을 잘생긴 하완이 거슬렸다.
그리고 자신이 아직 여울을 잊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
숨 막히는 회의가 끝나고 하완과 여울이 먼저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오후 2시쯤 지난 회의실 밖 복도에는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이 정적만이 가득했다.
여울에게 다가 온 하완이 속삭이듯 말했다.
“오늘 고생했어요.”
“아, 네...”
뒷정리를 하고 나온 마루가 본 여울과 하완은 키스라도 할 것처럼 서로 가까워보였다.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질투심에 마루는 발로 쿵쿵 소리를 내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오늘 고생하셨어요!”
윽박지르는 마루를 보고 여울과 하완이 재빨리 떨어졌다.
“마루씨도 고생하셨어요..”
하완이 대답했다.
여울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마루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여울씨 이만 갈까요? 저희 이만 가볼게요. 예향에서 뵈요.”
“아..”
인사를 건네고 하완이 뒤돌아서자, 여울이 따라 걸어갔다.
여울의 이따금 뒤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참기로 했다.
텅 빈 복도에 서 있던 마루도 걸음을 옮겼다.
여울이 아삭파이에서 일하는 건 출장 갔을 때, 봐서 알고 있었지만 프랜차이즈 사업 진행을 위한 직원으로 참여할지는 몰랐다.
게다가 여울을 데려온 박하완 사장은 자기 직원에게 사심이 있어 보이는 게 분명했다.
‘뭐라고 하며 꼬셨을까? 순진한 여울이 이용하다가 버리는 거 아니겠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괜히 가지고 가던 서류철만 벽에다가 퉁퉁-쳤다.
“으어억!”
멀쩡히 걸어가다가 꼬장도 부렸다.
“저 자식 뭐야 저거?”
잠깐 외근을 갔다 온 사수가 마루의 심통 난 뒷모습을 목격했다.
“야, 조마루!”
“왜!”
짜증난 얼굴로 뒤돌아 본 마루가 사수를 보고 한껏 움츠렸다.
“아, 사수님..”
“얼씨구. 네가 이 회사에 왜? 라고 부를 사람이 어디 있어? 너 사장 아들이라고 반항하는 거냐?”
“아.. 아니요.”
“왜.. 누가 건들었어?”
마루에게 다가오는 사수의 목소리가 퍽 다정했다.
“아무도 안 건들었는데.. 화가 나네요..”
대답하는 마루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원래 직장생활이 그런 거야 임마. 누가 안 건들 여도 화날 일 천지야. 나중엔 익숙해져.”
“아..네..”
상황에는 전혀 맞지 않았지만, 어쩐지 위로가 됐다.
사수가 마루에게 일을 떠맡긴 것이 아닌, 마루가 사수의 일을 빼앗은 것을 알고 부터는 미안한 마음이 한 가득이었다.
분명 자신이 미울 텐데, 사수는 짧은 언급 말고는 마루에게 싫은 소리를 일절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렵기만 했던 사수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좋아졌다.
“뭘 계속 서 있어? 사무실 들어가야지.”
“아..네!”
마루와 사수가 나란히 걸어갔다.
두 사람의 뒷모습이 퍽- 다정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