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르륵- 인스턴트 커피가루가 있는 종이컵에 정수기 물을 부었다.
홀짝 홀짝 커피를 마시는 마루의 눈이 퀭했다.
박하완 사장이 프랜차이즈를 제안을 승낙할지 거절할지 이렇게도 생각해보고, 저렇게도 생각하느라 밤새 자지 못하고 뒤척였다.
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왜 연락이 안 오지? 벌써 아침 10시인데?’
탕비실에 높게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조마루!”
뒤를 돌았다. 사수가 종이컵을 들고 정수기로 왔다.
걸어오는 모양새가 건들건들한 것이 남의 속도 모르고 세상 편해 보였다.
“세상 근심 다 떠안은 표정으로 무슨 생각 해?”
“아무 생각도 안 했습니다만..”
“너 일 잘하더라?”
“네?”
“방금 박하완 사장이 회사로 전화 왔다. 아삭파이 프랜차이즈화 시키기는 거 계약하겠다고.”
“네?!”
마루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 정말요?”
“응. 정.말.로.”
“아싸!”
두 다리를 펄쩍 뛰었다.
“야! 탕비실에서 점프하는 사람은 너 밖에 없을 거다.”
진심으로 기뻤다.
‘내가 해냈다니..!’
처음 맡은 업무였는데, 맡자마자 성공했다.
반면에 사수는 씁쓸한 표정을 짓고 돌아섰다.
“부럽다.”
“네?”
“아삭파이 계약 건 원래 내가 맡기로 했어.”
의아한 마루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선배님이 계속 맡으실 거잖아요. 전 도움만 드렸는데..”
“그거 너한테 넘어갔어. 회의 당일 날도 팀장님이 따로 불러서 너한테 주라고 하시더라.”
“...”
“너, 때 되면 승진해야지. 승진하려면 실적이 있어야하고.”
“...”
쾅-문을 닫고 나가는 사수의 처량한 뒷모습이 마루의 눈에 밟혔다.
‘내가 뺏은 거구나. 어차피 될 계약이었어..’
다 마시고 빈 종이컵을 한껏 구겼다.
양심에도 구김이 가는 것만 같았다.
***
“너 보기 힘들다.”
수정이 고개를 45도 각도로 꺾고, 하완을 지그시 바라봤다.
하완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수정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넸다.
“일이 바쁘니까.”
“매장에 거의 없나보네?”
“응. 작업장도 가야하고, 요즘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 있어서.”
“뭔데?”
“나중에 구체화 되면 알려줄게.”
“쉬는 날은 언제야?”
“...”
하완이 귀찮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테이크아웃 해달라며. 바로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매장에서 플라스틱 컵 사용하다가 걸리면 벌금이 200만원이야.”
“뭐라고?”
수정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가면 되잖아.”
신경질적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컵을 잡은 수정이 발걸음을 바삐 했다.
뒤에서 지켜보던 준영이 쌤통이라는 듯이 킥킥거렸다.
여욱은 그런 준영을 불쌍하게 쳐다봤다.
여욱은 이미 알고 있었다.
“사장님 저 부르셨어요?”
여울이 들어오자, 하완이 계산대에서 나와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여울씨. 시킬 일이 있는데.. 여울씨가 잘할 것 같아서..”
하완이 움직이자, 여욱의 눈도 따라 움직였다.
여욱이 지켜본 하완은 보통 말을 하고 행동하는 편이다.
사장으로 오래 일했기 때문에 지시가 습관화 된 것이다.
그런데 여울과 있을 때는 항상 먼저 행동하고 말을 한다.
머리가 생각하기 전에, 이미 몸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울씨가 이거 맡아줘서 해줬으면 좋겠어요. 내일 관계자 내려온대요.”
하완이 웃었다.
그냥 실없이 웃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상황이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여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빠졌구만. 빠졌어.”
여욱의 시선이 준영에게 갔다.
하완이 비운 카운터에 서서 들어오는 고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굳이 말 하지 않아도 하완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준영이야 말로 아삭파이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리고 여욱은 준영이 왜 그렇게까지 눈치가 빠르고 열심히 일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불쌍한 녀석.. 정작 좋아하는 사람의 이상형을 몰라도 너무 모르지.’
여욱과 준영의 세계와는 별개인 것 같은 하완과 여울의 세계는 화기애애한 대화로 계속됐다.
“저 잘할 수 있어요. 해볼게요!”
여울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해사하게 웃는 얼굴이 꼭 가을 햇볕에 잘 익은 사과 같았다.
하완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콩닥콩닥- 심장이 두근거렸기 때문이다.
***
11월 말로 접어들면서 날씨가 급격히 추워졌다.
얇은 반코트를 입고 다니던 행인들이 긴 롱코트를 입거나, 짧은 패딩을 입는 등 추위에 완전 무장했다.
짙은 그레이 코트를 입은 하완이 터머널 옆 백화점 안으로 들어섰다.
백화점 매대 에는 새 시즌을 맞이하여, 겨울상품들이 진열됐다.
하완의 시선이 간 곳은 고급스러운 검정색 세미가죽 손 장갑 이었다.
“올해 2018년 f/w 상품인데, 올해 40%나 싸게 나왔어요. 여자 친구 선물하시게요?”
어디선가 나타난 점원이 능청스럽게 구매를 유도했다.
짙은 볼터치가 인상적인 점원은 아이라이너를 짙게 그린 눈을 반짝이며, 하완을 관심있게 봤다.
“어머. 여자친구 너무 좋아하겠다. 이런 잘생긴 남자친구가 선물해줘서.”
“여자친구 줄 거 아니고, 어머니 드릴 건데요. 너무 젊은 사람이 쓸 것 같은 디자인인가요?”
“어머! 어머니 드릴 거 였구나! 요즘 어머니들도 얼마나 세련되고 젊은 감성 가진 분들 많으신데요. 그리고 장갑은 젊은 사람 나이든 사람 디자인이 따로 있지도 않아요.”
점원이 양 손바닥을 마주치며 호응을 유도했다.
“젊은 감성 가진 나이든 분이시니까 좋아하시겠네요. 이걸로 주세요.”
“네~ 잘생긴 효자분이 선물 해주는 거니까, 어머니가 얼마나 좋아하실까.”
점원은 연신 싱긋 웃어댔다. 결제와 포장을 마친 점원이 포장된 선물을 건네며, 갑자기 몸을 45도로 비틀며, 부끄러운 척을 했다.
“여자친구 선물은 안 사세요?”
“네. 없어요.”
하완이 무심하게 말했다.
“그럼...”
“많이 파세요.”
뜸들이는 점원을 기다려 주지 않고, 하완이 서둘러 자리를 떴다.
“하.. 번호라도 물어볼걸.”
하완의 넓은 등판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
툭- 직원전용 드레스 룸에서 코트를 벗던 하완이 품에서 포장된 선물이 떨어졌다.
“사장님 이거”
옆에 있던 준영이 하완에게 포장된 선물을 건넸다.
“고마워.”
준영의 시선이 선물에 머물러 있었다.
“왜?”
“아.. 아니요. 이만 가볼게요.”
준영은 나가면서 생각했다.
‘누구 꺼지?’
여울이 들어왔다.
“오랜만이네요?”
준영이 반갑게 인사했다.
“응. 잘지냈어요?”
여울이 웃으면서 맞이했다. 같이 일할 땐 대부분 무표정했던 준영이 떨어져 지낸 이후부터 부쩍 친절해졌다. 여울이 눈에 보이지 않자, 어느 순간부터 여울에 대한 경계심도 풀어진 것 같았다.
“아삭파이 승강점 알바생 새로 뽑았던데? 이제 여기서 일하시는 거에요?”
“아.. 아니요. 사장님이 새로 맡기신 게 있어서. 이미 들었을 까요?”
“프랜차이즈! 그거 진짜 진행 되나 봐요?”
“네. 그거 진행시켜야 해서 거기서 나왔어요.”
“잘됐으면 좋겠다!”
“잘되면 준영씨가 프랜차이즈 점장 해야죠.”
“제가.. 어떻게..”
준영이 부끄러워했다.
여울은 준영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준영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었다.
준영이 제법 귀엽게 느껴졌다.
“언니 힘내요!”
준영이 양손에 주먹을 쥐고 파이팅을 했다.
“그래요!”
따라하는 여울의 입가에 웃음이 만개했다.
경계심을 푼 준영과 앞으로 잘 지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준영의 일상이 평화로워 보여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
얼마 안 있어 준영의 심기가 뒤틀리는 일이 생겼다.
또 아메리카노를 사러 터미널까지 온 수정이 무광 블랙의 세미가죽 장갑을 낀 손을 내밀며, 한마디 했다.
“선물 받은거에요.”
“안 물어봤는데요?”
“자꾸 보길래.”
“...”
“누구한테 받았는지는 말 안 할게요. 안 물어봤으니까.”
준영은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 해주며 오만가지 생각에 다 사로잡혔다.
‘누구한테 받았을까? 혹시 박하완 사장님?’‘
그럼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준영은 드레스 룸으로 가 하완의 캐비넛을 열어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하완의 캐비넛은 깨끗했다.
아까 분명 하완이 선물을 받으면서 캐비넛에 넣는 걸 확인 한 후였다.
준영은 오해가 사실처럼 굳어져 가고 있었다.
확인해야만 했다.
박하완이 오수정을 좋아하는지 아닌지.
***
하완이 작업장에 가기위해,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여욱이 사업을 진행시키기 위해 예향으로 내려오면 모두 보여줘야 할 곳들이었다.
별건 없었지만, 자꾸 신경이 쓰였다.
‘내가 어디다 주차를 했더라?’
삑- 차키로 자리를 찾는데, 뒤에서 하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박하완 사장님!”
하완이 놀래서 뒤돌아봤다.
“준영아?”
준영이 비장한 눈빛으로 하완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장님 질문 있어요.”
“갑자기?”
갑자기 그것도 주차장에서 묻는 질문에 하완은 무척 당황스러웠다.
“네. 갑자기. 혹시 아까 구매하신 선물 장갑이에요?”
“응..”
하완이 대답하고도 놀랬다.
“네가 그걸 어떻게?”
신통방통했다.
“알겠어요..”
이 한마디만 남기고, 준영이 다시 뒤를 돌아 뛰어갔다.
“오후에 단체주문 있어서 저 먼저 가볼게요!”
하완은 어안이 벙벙했다.
‘누구한테 주는지는 안 물어보고?’
실로 이 상황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이 산 선물을 맞추고 뛰어가다니..
맞춰서 놀래야 하는건지, 그냥 이상한 애로 봐야하는 건지 판단이 잘 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