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생머리에 사슴 같은 눈망울을 가진 가냘픈 여자가 여욱을 보며 상냥한 말투로 물었다.
“박하완 사장님 오늘 출근 안했나요?”
여자가 살랑살랑 움직일 때마다 퍼지는 장미향이 여욱을 정신 못 차리게 만들었다.
여자는 여욱을 보고 살며시 웃었다.
“아.. 출근 하셨는데.. 미팅 있으셔가지고, 잠깐 자리 비우셨어요. 혹시 아는 분이신가..요오?”
여자의 상냥한 웃음에 녹은 여욱이 말을 더듬거리며 바보처럼 대답했다.
“그럼 제 명함 좀 전해주시겠어요?”
“넵!”
두 손 공손히 모은 여욱이 여자의 명함을 받았다.
‘예향 터미널 미술관 큐레이터 오수정.’
“미술 쪽에서 일하세요?”
“네.”
“어쩐지 아름다우시더라..”
“아..”
여욱의 주책에 수정이 수줍어했다.
“아.. 제가 오바를.. 사장님께 꼬옥! 전해드릴게요.”
“네. 감사해요.”
그 모습을 본 준영이 홀에서 테이블을 박박 닦았다.
“어휴. 꼴값을 떨어요. 아주.”
준영이 행주를 테이블에 던졌다.
***
터미널 밖, 조용한 커피숍에 마루와 하완이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하완은 마루가 준비해 온 자료를 꼼꼼히 읽고 있었고, 마루는 괜스레 하완의 눈치를 봤다.
“편하게 있어요.”
“네?”
“편하게 있으라고요. 저 마루씨보다 높은 사람 아니에요.”
하완은 편하게 해주려 노력했다.
‘하지만 클라이언트시죠. 이건 제가 성사시켜야 하는 계약이고.’
마루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전혀 편하지 않았다.
하완이 서류를 찬찬히 읽었다.
딱히 서류를 보는 동안 딱히 할 일이 없는 마루는 하완의 얼굴을 유심히 보게 됐다.
연갈색 피부에 쌍꺼풀 없는 짙은 눈을 내리깔고 서류를 넘길 때마다 걷어 올린 소매 사이로 팔뚝에 힘줄이 보였다.
‘오, 운동 좀 하나본데?’
왜인지 모르지만 약간의 경쟁심이 들었다.
괜스레 자신의 소매를 깔짝거렸다.
“뭘 그렇게 봐요?”
하완이 눈도 들지 않고, 마루에게 물었다.
“네?”
“나 찬찬히 뜯어보고 있잖아요. 나 맘에 들어요?”
무미건조한 얼굴로 하완이 농담을 했다.
“아니요?!”
마루가 펄쩍 뛰었다.
“장난이에요.”
하완이 마루를 보고 씩- 웃었다.
“아.. 네..”
하완의 농담에 제대로 당했다는 생각에 언짢은 기분이었다.
‘뭐야, 이 사람?’
“이거 바로 결정 안 해도 되는 거죠? 긍정적으로 검토하기는 하는데, 요즘 매출이 오르면서 우리 매장만으로도 식자재 공수하기 빠듯하거든요. 물론 프랜차이즈화 하면 생산라인도 더 늘어나고, 수월해지겠지만 우선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한데..”
당연히 계약할 줄 알았던 하완이 의외의 대답을 하자, 마루는 긴장됐다.
“뭐 불편한 조항이라도..”
슬슬 하완의 눈치가 보였다.
“아니요. 아직 그것까지 논할 단계는 아닌 것 같고.. 잠시 고민해볼 시간을 가져도 될까요?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린 마루가 하완에게 조심스런 제안을 했다.
“일주일이시면 될까요?”
긴장한 마루의 표정을 본 하완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루면 되요. 제가 오늘 집에 가서 생각해 볼게요.”
“아, 감사합니다. 꼭 좀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네.”
마루의 거듭된 요청에 하완은 마루가 귀엽게 느껴졌다.
“그런데 저한테 명함 안주세요? 저만 드렸는데..”
“아, 네!”
마루는 황급히 명함을 꺼내 하완에게 건넸다.
‘마루유통 전략기획 부서 조마루’
하완이 지갑을 꺼내, 마루의 명함을 넣었다.
“직함이 없는 걸 보니, 신입인가 보네요?”
“네? 아, 네!”
“신입이 어려운 걸 맡았네. 자료도 꼼꼼히 잘 만들고, 설명도 잘하던데요? 많이 떨렸을 텐데.. 오늘 고생했어요.”
“네..”
하완의 따뜻한 한마디에 마루는 어쩐지 오늘 하루를 위로받는 것 같았다.
사실 사수가 떠맡긴 일을 갑자기 하느라 매우 난감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간단한 미팅이 끝난 후, 둘은 헤어졌다.
임무를 무사히 마친 마루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커피숍을 나갔다.
‘바로 앞이 터미널인데, 그냥 버스타고 갈까?’
가는 길에 마리가 부탁한 호두과자도 사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터미널 안으로 들어서니, 강력한 애플파이 냄새에 후각이 매료당했다.
마루는 눈을 들어, 애플파이를 파는 가게를 찾았다.
냄새가 나는 가게에서는 알바생 으로 보이는 여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파이 굽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우리랑 계약할 아삭 파이구나. 호두과자 말고 저걸 사가야겠다.’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한걸음, 두 걸음 아삭파이와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이 떨렸다.
‘설마..’
마루가 멈춰 섰다.
뇌리를 스치는 과거가 있었다.
‘설마 방금 만난 박하완 사장이 하완바라기님의 그 하완은 아니겠지?’
꺼림 찍 했다. 잡생각을 버리기 위해 뺨을 한 대 때렸다.
그리고 주문을 했다.
“파이, 한 박스만 주시겠어요?”
여울이 고개를 들었다. 마루였다.
“여울이?”
“여길 어떻게.”
여울이 뒤집개를 손에서 떨궜다.
둘 사이에 잠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여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잠시 자신의 현재 상황을 되돌아봤다.
입에는 투명 위생용 마스크를 쓰고, 머리에는 곱창을 하고, 허리 앞치마를 두른 자신의 모습이 오늘따라 초라하게 느껴졌다.
자신과 대비 대는 마루의 정장을 입은 모습은 누가 봐도 사회로 나온 영락없는 신입사원이었다.
정적 끝에 여울이 입을 뗐다.
“나 여기서 일해.”
“...여울아. 할 말이 있어.”
갑작스러운 마루의 고백에 여울은 침을 꼴깍 삼켰다.
여울은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알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것만 같았다.
“뭔데?”
“혹시 들었어?”
“뭘?”
“너랑 통화할 때, 샴푸..”
“아, 그거? 샴푸 달라는 말만..”
무안함에 말끝을 흐린 여울은 박스에 황급히 애플파이를 포장했다.
샴푸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한 달이 넘는 오랜 시간동안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별로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거 동생이야. 마리.. 미국에서 돌아왔어.”
“아, 정말?”
박스를 포장하던 여울이 고개를 들었다.
마루에게 자신의 감정을 들켰다고 생각한 여울은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여울의 볼이 빨개졌다.
“그래서 오해하지 말아달라고..”
마루의 해명이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렸다.
둘은 이제 와서 해명을 해봤자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마루가 여울에게 파이박스를 받아들고 돌아섰다.
돌아선 자리에는 쓸쓸함만이 가득했다.
***
띠링- 열쇠고리 소리가 한적한 터미널 안을 청아하게 울렸다.
마감을 하고, 집에 돌아가는 여울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여욱이 군대에서 휴가 나온 친구를 만나고 들어갈 테니 먼저 들어가라 했다.
마루를 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울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혼자 걸어가며 기분전환을 하고 싶었다.
‘마루가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초라해 보이진 않았을까?’
마루에게 자신의 초라한 행색을 들켜 비참한 기분이 들면서도 샴푸의 주인공이 마리라는 생각에 어쩐지 안도감이 들었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양가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멀쩡하게 걸어가다가도 결국 자신을 이기지 못한 여울은 양손에 주먹을 꽉 쥐고, 팔꿈치를 오므리며 연신 외쳤다.
“내가 왜 그랬을까!”
빵빵- 여울의 이런 오글거림을 누가 봤는지, 지나가던 차가 경적소리를 냈다.
소리가 나는 곳을 보니, 하완이 차창을 열고, 여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울씨. 뭐가 그렇게 신나요?”
“아, 아니요!”
너무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하완은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창너머로 여울을 귀엽다는 듯이 쳐다봤다.
“집에 태워다 줄까요?”
“괘! 괜찮습니다!
“태워다 줄게요. 같이가요.”
“아니요. 혼자 걸어가고 싶어요. 안녕히 가세요!”
여울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앞을 향해 뛰어가다시피 걸어갔다.
“저기..”
여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하완이 여울의 보폭에 맞춰 운전했다.
“태워줄게요!”
“괜찮아요.”
“태워준다고요!”
빵- 하완의 느린 운전에 뒤차가 경적을 울렸다.
“빨리 좀 갑시다! 거, 아가씨. 탈거에요? 말거에요?”
차창을 내린 운전자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여울에게까지 전달됐다.
“죄송합니다!”
당황한 여울이 사과 후, 자기도 모르게 하완의 차를 탔다.
“거봐요. 내가 태워준다 했잖아요.”
하완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여울의 볼이 빨개진 채로 차가 출발했다.
“요즘 일은 어때요?”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자, 하완이 한손은 운전대에 올리고, 다른 한손은 고개를 기댄 채 질문했다.
어두운 차 안에 들어온 네온사인 불빛 아래로 비치는 하완의 모습이 마치 꿈꾸는 사람처럼 몽환적이었다.
“아.. 좋아요.”
여울은 심장이 콩닥거렸다.
“뭐가 좋아요?”
“파이가 잘나가서요. 사람들이 맛있다는 말도 많이 해주고..”
“매출도 많이 올랐던데요? 기준 목표량도 매일 달성하고. 여울씨 영업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제가요? 글쎄요?”
부끄러워하는 여울의 모습이 귀여운 하완이 싱긋 미소 지었다.
“왜 웃어요?”
여울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다.
“재밌어서요.”
“뭐가요?”
“여울씨요. 처음 볼 때부터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과거가 있었다.
터미널 승강장 한 복판에서 트렁크가 터졌고, 과수원 사과나무에서 떨어졌다.
‘재미있을만 하기는 하네..’
입이 뾰로퉁하게 나온 여울의 모습에 하완이 입이 귀에 걸리게 웃었다.
“욕 아니에요. 칭찬이에요. 유쾌하고 밝은 사람 같아요.”
여울은 실망했다.
재미있는 사람이라니.. 26년 살면서 처음 들어본 소리다.
학교 다닐 때부터 재미없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는데, 좋아하는 사람에게 재미있다는 말을 듣게 돼서 슬펐다.
‘어머. 세상에. 나 좀 봐. 나 지금 박하완 좋아하나?’
문뜩 깨달은 감정이었다.
부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운전하는 박하완이 너무 잘생겨 보였기 때문이다.
진작부터 눈치 채고 있었지만 애써 부정하던 사실이기도 했다.
‘난 잘생긴 사람한테 약한데..’
마루도 잘생겼다. 서로 타이밍이 안 맞았을 뿐.
여울은 다시 씁쓸해졌다.
분명 여울이 마루를 찼는데, 마루한테 차인 기분이었다.
‘헤어지고 내가 더 아쉬워 할 줄이야..’
“도착했어요.”
여울의 끝없는 생각을 하완이 적절하게 끊어줬다.
***
출장에서 돌아온 마루는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자마자, 거실 소파에 누워 TV만 봤다. 마루가 부엌 식탁에 아무렇게나 올려둔 애플파이를 마리가 주섬주섬 꺼내 먹으며 말했다.
“오빠 애플파이 맛있다.”
파이에서 흘러나온 잼을 입에까지 묻혀가며 마리가 열심히 애플파이를 먹었다.
“오빠 애플파이 맛있다고.”
마루는 대답이 없었다.
멍한 표정이 꼭 어디 정신줄 놓고 온 사람같았다.
“오빠 정신 놨어?”
마리가 마루 앞에 가, 다섯 손가락을 폈다 오므렸다 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마루는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내일까지 연락 줄게요.’
하완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그대로 재생됐다.
휴대폰에는 아무런 메시지도 없었다.
마루가 걱정된 마리가 마루의 어깨를 흔들었다.
“오빠, 정신차리고. 이제 그만 자. 벌써 새벽 3시야!”
“알았어!”
마리의 손을 뿌리친 갑자기 자기 방으로 뛰어갔다.
마루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어이없어진 마리는 마루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쟤 왜 저래? 사회생활 하더니, 힘든 건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은 마리가 남은 애플파이의 가루까지 삭삭 긁어 먹었다.
쉽사리 자지 못하고 침대에서 베개를 껴안고 뒤척이던 마루는 여울이 아삭파이에서 일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왜 거기서 일하고 있는 거지? 알바인건가? 직장은?’
걱정스러웠다.
“샴푸..”
굳이 해명해야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펑-이불발차기를 했다.
헤어진 마당에 한 달도 더 된 일을 해명한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쥔 마루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서 빨리 이 밤이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