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울은 마루와 확실히 헤어진 이후로 가끔 악몽을 꿨다.
대부분의 악몽은 일어났을 때,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과수원을 배경으로 한 악몽은 일어났을 때 생생히 기억났다.
과수원으로 한 악몽은 매번 상황이 똑같았다.
아주 잘 익은 새빨간 사과를 따기 위해 사다리 위로 올라가고,
팔을 높게 뻗은 순간, 사다리 위에서 실수로 발을 헛 딛었다.
“으아악..”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데, 아무도 붙잡아 주는 사람이 없었다.
“헉..헉”
매번 완전히 떨어지기 직전에 깼다.
짹짹- 얇게 열린 방 창문 너머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으스스한 추위에 잠깐 동안 몸을 떨었다.
살짝만 창문을 열어놓고 자도 추운 가을이 왔다.
여울은 서둘러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찬장을 뒤져 원두커피를 찾았다.
머그잔에 타 마시는 커피의 쓴 맛이 목울대를 휘감고 뱃속으로 내려갔다.
따뜻한 것이 몸 안으로 들어오니, 기분이 좋았다.
반쯤 남아있는 커피를 들고 방으로 가, 노트북을 켰다.
구직을 위해 일자리 사이트를 기웃거렸다.
타닥타닥- 자판소리가 일상에 생동감을 불러 일으켰다.
한 철의 여름이 지나고, 완연한 가을이 왔으니..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사장님 늦으시네?”
우우웅- 커피머신이 굉음을 내며 세척모드에 들어갔다.
“뭐라고?”
“사장님 늦으시냐고?”
우우웅- 커피머신 때문에 여욱은 준영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어제 마감한 알바 누구야? 세척도 안 해놓고. 아침에 손님이라도 오면 어쩌려고!”
여욱이 궁시렁 대는 사이, 준영이 여욱 코앞까지 왔다.
“뭐야?”
흠칫 놀란 여욱이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둘 사이가 너무 가까웠다.
“사장님 늦으시냐고! 내 말 안 들려?”
움찔 놀란 여욱이 준영의 시선을 피하며, 변명하듯 대답했다.
“아침에 구인광고 전단지 직접 붙이고 오신대.”
“뭐?”
준영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여욱을 쳐다봤다.
여욱은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니.. 요즘 시대에 누가 전단지 보고 알바를 찾는다고. 나도 시간낭비라고 사장님께 말씀 드렸는데.. 굳이 전단지를 붙이셔야 한다고..”
“그래서 늦으신다고?”
“어어..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지. 왜 나한테 그래!”
여욱이 준영을 제치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버렸다.
준영이 어이없는 얼굴로 여욱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재 왜 저래?”
한편, 하완은 새벽녘부터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있었다.
전봇대 위주로 구인광고 전단지를 붙였다는 외삼촌의 말을 기억했다.
여울이 전단지를 보고 과수원을 찾아왔다는 말도 기억했다.
빠른 걸음으로 동네 곳곳에 전단지를 붙였다.
하완이 생각했던 것보다 동네 곳곳에 전봇대가 많았다.
초등학교 근처에도, 편의점 옆에도, 아파트 단지 주변에도 전봇대 투성이었다.
새벽녘부터 시작한 일은 아침 해가 뜨기까지 계속 됐다.
개미 한 마리도 안 보이던 거리에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출근하는 직장인과 등교하는 어린아이들이 보였다.
“이봐요. 뭐하는 거에요?”
“네?”
“이런 곳에다 전단지 좀 붙이지 말아요. 보기 흉하게.”
마트에서 파리채를 들고 나온 사장 아줌마가 도끼눈을 하고, 하완을 째려봤다.
“젊은 사람이 매너 없게 진짜! 아휴- 이봐요 청년! 사장한테 가서 우리 금성마트에는 전단지 붙이면 안 된다고 전해줘요.”
“아..”
사장 아줌마의 원성에 하완이 주춤했다.
자신이 전단지를 붙인 매장의 사장이라고 말해야 하나 1초간 고민됐다.
“아니. 멀뚱하니 서서 뭐하는 거에요? 어서 가서 말하지 않고? 삐끼 알바 준 사장이 있을 거 아니야?”
“아.. 그러니까 제가..”
“아니. 이봐요 청년. 계속 그렇게 멀뚱하게 서 있을 거에요? 얼른 썩 안가요!”
사장 아줌마가 매서운 눈으로 하완에게 파리채를 휘둘렀다.
휙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맞으면 꽤나 아플 것 같았다.
“얼른가! 얼른 가라고!”
“아, 예.. 예.. ”
당황한 하완이 한 발짝 두 발짝 뒤로 물러섰다.
쿵- 사람과 부딪힌 느낌에 하완이 뒤를 돌았다.
“박하완..?”
검은 생머리에 가냘픈 몸을 가진 청순한 외모의 여자가 깊은 눈을 가지고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당황한 하완이 여자에게서 떨어졌다.
여자는 마치 하완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낭창낭창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박하완? 나야 오수정”
여자는 반갑다는 얼굴로 하완에게 아는 척을 했다.
웃을 때, 입 꼬리가 귀까지 걸리듯 크게 웃는 얼굴이 익숙했다.
툭- 돌돌 말려있던 전단지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거 뭐야?”
수정이 전단지를 줍기 위해 손을 뻗자, 하완이 황급히 주웠다.
“별거 아냐!”
그 모습을 본 사장님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꼴값들 떨고 있네. 얼른 나가!”
휙- 사장님의 파리채 스윙에 하완과 수정이 동시에 도망쳤다.
“네! 네! 나갈게요!”
쿵쿵- 몇 발자국 뛰어가다가 하완이 멈춰 섰다. 수정도 멈췄다.
수정은 여전히 해사한 얼굴로 하완에게 물었다.
“너 요즘 알바 하니?”
“응? 아니.”
“그럼 이거 왜 하는 거야?”
“...”
“전에 만났을 때, CPA공부한다고 하지 않았어?”
하완이 잠시 뜸을 들였다.
“한국에 있었네?”
“...”
5년 만에 이루어진 재회였다.
***
탈색한 금발에 벌건 입술을 가진 이국적인 외모의 여자가 마루의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긴 다리와 팔을 소유한 여자의 가느다란 몸이 침대에 아무렇게나 펼쳐 있었다.
마루가 방에 들어오자, 여자의 긴 속눈썹이 펄럭 거렸다.
“오빠, 밥은?”
고개를 들고 마루를 쳐다보는 여자의 얼굴이 앳돼 보였다.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여자의 통통한 볼 살과 흐릿한 턱 선은 갓 10대를 벗어나 성인이 되었음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에휴..”
긴 한숨을 쉰 마루는 여자를 안쓰럽게 쳐다봤다.
“이제 어쩌려고?”
“몰라.. 미국에 있기 싫어.”
털썩- 침대에서 뛰어내린 여자가 슝- 마루를 지나쳐, 부엌으로 뛰어갔다.
“시리얼은 안 먹을래! 밥 먹고 싶어! 밥!”
“조마리?”
탁- 마루가 자신의 이마를 시원하게 한 대 쳤다.
미쳐 날뛰는 마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미국 유학중에 있어야 할 마리가 어제 아무런 말도 없이 몰래 한국으로 돌아 와버렸다.
“설마 완전히 귀국한 건 아니지”
마루가 부엌으로 가며 물었다.
차디찬 미역국에 밥을 말아먹던 마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완전히 귀국했는데?”
“뭐라고?”
“완전히 귀국해버렸어.”
“학교는?”
“고등학교까지 졸업하면 됐잖아. 꼭 대학을 미국에서 갈 필요도 없고. 그리고 나 대학 왜 가야하는지 잘 모르겠어. 미국 애들은 대학 안가는 애들도 많아.”
마리의 철없음과 당당함에 마루의 뒷목이 땡 겼다.
“엄마랑 아빠는 네가 한국에 있는 거 아시고?”
미역국을 한 숟갈 뜨던 마리가 주춤했다.
“아니.. 말하면 못 오게 할까봐. 내가 말 안하고 왔어.”
입을 뚱-하고 내민 마리의 슬픈 눈에는 사연이 있어 보였다.
마루가 지갑에서 오 만원권 지폐 여러 장을 꺼내, 마리 앞에 놓았다.
마리가 멀뚱한 눈으로 마루를 바라봤다.
“집에만 있지 말고, 나가서 친구들 좀 만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옷도 좀 사 입어. 옷이 너무 얇아. 이제 날씨도 쌀쌀해질 텐데 긴 옷도 좀 입고.”
마리가 배시시 웃었다.
“그래도 동생이라고 챙겨주네.”
“동생이 아니라 웬수가 아닐까 싶다. 오빠, 출근해야 해. 간다.”
“잘 가!”
마루가 서둘러 나왔다.
오피스텔 주차장으로 가는 내내, 어제 일이 생각났다.
‘여울이니?’
‘...’
‘오빠 샴푸 어딨어?’
툭- 끊긴 전화는 다시 올 줄 몰랐다.
백번, 천 번, 만 번을 넘게 고민했다.
전활 다시 걸어야 하나, 아니면 그냥 기다려야 하나.
해명을 하는 게 맞지만, 여울이의 마음이 떠났다는 것은 이미 레스토랑 식사 때, 확인한 사실이었다.
‘왜 전활 다시 걸었을까?’
한 번쯤은 잡고 싶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 부러진 애니까 지금쯤 이미 정리도 끝났겠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우웅- 엔진소리가 꼭 빨리 뛰는 심장박동 같았다.
***
“하고 싶은 게 없다. 하고 싶은 게.”
부스럭- 새우깡을 집어먹는 여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채용공고를 아무리 뒤져도 할 만한 일자리가 없었다.
아니 하고 싶은 일자리가 없었다.
“사무직 경리로 들어갈까?”
아그작, 아그작- 씹어대는 새우깡 소리가 공허한 하늘에 메아리를 울렸다.
편의점 앞, 파라솔에 앉아있던 여울이 시선을 옮겨 편의점 안을 바라봤다.
20대 초반 여대생으로 보이는 편의점 알바생이 매대에 상품을 진열하고 있었다.
“내가 편의점 알바하면 너무 늦으려나..”
찰싹- 뺨따구를 때렸다.
“그러게. 어떻게 한 취업인데 거길 나와?”
쉰살은 족히 넘어 보이는 부장이 여울의 엉덩이에 손을 댄 순간, 망설이지 않고 사표를 던졌다.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 이었지만 앞으로가 막막했다.
예향에서 서울로 올라가 힘들게 대학생활을 하면서 안 해본 알바가 없었다.
레스토랑 알바, 카페 알바, 과외 알바, 콜센터 알바, 프리마켓 알바, 방송국 스텝알바.. 한 사람이 이 정도로 다양하게 알바를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알바를 했다.
알바라면 치가 떨렸다.
“곧 죽어도 정직으로 들어갈 거야.”
탕- 파라솔 탁자를 내리쳤다. 각오가 대단했다.
여울의 비장한 각오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시원하게 부는 바람이 여울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아 시원해.”
‘여울이 넌 잘하고 있어.’라고 꼭 하늘도 응원해주는 것만 같았다.
여울이 미소를 짓고, 시원한 바람을 만끽했다.
“컥-”
바람이 너무 쎈 건가? 여울의 얼굴에 날라 가던 전단지가 붙었다.
“이게 뭐야?”
여울이 얼굴에서 전단지를 뗐다.
언뜻 봤을 때, 구인광고인 것 같았다.
“요즘은 구인광고를 이런 전단지로도 하나?”
터미널에서 운영하고 있는 ‘아삭파이’ 구인광고 였다.
가만 보니, 터미널 점이라면 집에서도 가까웠다.
게다가 매장 정 직원을 채용한다는 내용! 여울은 솔깃했다.
오후 9시에 퇴근하는 것 빼고는 급여와 주 5일 근무도 괜찮았다.
선선한 바람이 멈추고 햇살이 비쳤다.
여울이 뜨겁게 내리쬐는 가을햇살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어쩌면 하늘이 주신 기회일지도 몰라.’
왠지 좋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