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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아삭아삭한 로맨스
작가 : 진소르
작품등록일 : 2018.12.17

가진 건 자존심뿐인 빈털터리 백수 주여울과 빼어난 외모, 우수한 두뇌를 타고나서 결국 노동과 결혼한 남자 박하완의 밀고 당기는 갑을관계 로맨스! 가을 한정 홍옥같이 탐스럽고 풍미 있는 그들의 아삭아삭한 로맨스를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5화 여울의 가을_낯선 목소리보다 더 낯선 전 남친 마루.
작성일 : 18-12-20 09:05     조회 : 283     추천 : 0     분량 : 4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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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여과지에 담긴 고운 원두 가루가 떨어지는 물에 조금씩 적셔졌다.

 주전자에 원을 그리며 뜨거운 물을 붓는 하완은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커피를 추출했다.

 커피서버에 커피원액이 차오를수록 하완의 지나간 기억도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승강장에서 파이를 팔 때, 봤던 트렁크가 터진 여자,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 옆자리에 앉은 여자,

 레스토랑에서 남자친구의 눈물을 닦아주던 여자,

 마지막으로 과수원 수확을 도우러 왔다가 조막만한 손으로 서툴게 사과를 수확하던 여자.

 탕- 소리 나게 주전자를 하완이 놓았다.

 

 “뭐지. 이 여자?”

 

 하마터면 같이 식사라도 하자고 데이트 신청을 할 뻔 했다.

 

 “그 때 남자친구는 헤어진 건가?”

 

 여자 친구 앞에서 펑펑 울던 철부지 어린애 같은 남자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아니, 이걸 내가 왜 신경을 써?”

 

 혼란스러웠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빨리 노동의 현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완은 거칠게 씽크대 위 수납 칸을 뒤져, 쟁반을 찾아냈다.

 예쁜 찻잔에 담긴 커피가 하완의 싱숭생숭한 기분에 맞춰 출렁거렸다.

 

 ***

 

 우아하게 커피잔을 들 시간도 없이, 집으로 돌아온 하완의 이모부 내외에 끌려가 막바지 수확을 다시 시작했다. 씨암탉도 먹었건만 여울은 힘이 없었다. 오전 중에 고갈된 에너지는 영양식을 먹어도 당장 돌아오지 않았다. 여울은 당장 딸 수 있는 사과들만 건드렸다. 그래서 여울이 지나간 나무들은 아직도 열매가 주렁주렁했다.

 

 “어이. 아가씨.”

 “네?”

 “아니, 사과를 다 따지도 않고 나무를 그냥 지나치네. 지나간 나무에 사과가 한가득 이구만.”

 “아, 죄송합니다. 우선 딸 수 있는 것만 따고 나머지는 사다리 이용해서 한꺼번에 따려구요.”

 

 여울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 그런 게 어딨어? 그때, 그때 다 따는 거지. 사다리 줄 테니까, 나무 위에 있는 사과도 다 따.”

 

 아저씨는 핀잔과 함께 사다리를 여울이 있는 곳으로 옮겨주셨다.

 여울은 사다리를 받치고, 나무 위로 올라갔다.

 나무 위에는 제법 사과가 많았다.

 사다리의 높이에서 딸 수 있는 사과를 다 따자, 손이 안 닿는 곳까지 사과를 따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안 따져?”

 

 사과가 잡히질 않아 허공에 손짓하기도 했다.

 아래에서 수확하던 하완은 불안 불안한 여울의 뒷모습이 신경 쓰였다.

 사과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여울이 덥석 사과 한 알을 잡았다.

 여울이 잡은 사과 한 알의 꼭지가 힘없이 끊어졌다.

 

 “꺄악-”

 

 사과 꼭지가 끊어진 후, 허공에서 중심을 잃은 여울의 무게중심 때문에 발을 헛딛었다. 사다리는 이미 앞으로 넘어졌고, 여울은 뒤로 넘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여울이 두려움에 실눈을 떴다.

 

 “안 다쳤어?”

 “괜찮아?”

 

 수확을 하던 일손들이 모두 쓰러진 여울의 주변을 감쌌다.

 푹신한 감촉이 누군가 뒤에서 여울을 받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괜찮으세요?!”

 

 여울의 눈에 하완의 긴 팔이 자기를 감싸 안은 모습이 보였다.

 헐레벌떡 일어난 여울은 하완을 확인했다.

 

 “괜찮아요.”

 

 팔이 조금 불편해 보였으나, 다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여울이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손바닥을 모았다.

 

 “아이고! 하완아! 아가씨 뭐여! 도움이 안 될 거면 그냥 가!”

 

 뒤늦게 달려온 아저씨가 여울에게 역정을 냈다.

 

 “우리 하완이 다치면 내가 아가씨 가만 안둘겨!”

 

 여울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하완 곁에만 맴돌 뿐이었다. 두 눈에는 미안함이 한 가득이었다.

 

 “그만하세요. 일부러 그런것도 아닌데. 여울씨 오늘은 그냥 집에가요. 제가 데려다줄게요.”

 

 하완이 흙을 털고 일어섰다.

 

 “뭘 집에 데려다 줘. 하마터면 네 명 줄일 뻔한 여자를. 그냥 알아서 가게 냅두고. 너나 어서 병원가자.”

 “삼촌 저 안 다쳤어요. 윽박 좀 그만 지르세요. 여울씨 놀라잖아요!”

 

 하완의 강경한 태도에 순간적으로 주변이 조용해졌다.

 호들갑을 떨던 외삼촌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여울씨 가요.”

 

 하완은 여울의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뭐여? 왜 지 삼촌한테 지랄이여?”

 “맞다니까. 저 총각이 아가씨 좋아하는 거.”

 

 뒤에서 사람들이 수군댔다.

 하완은 여울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여울은 영문을 모른 채 하완의 손에 이끌려 가고 있었다.

 

 ‘그런데 싫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가 친절해서일까? 여울은 이 상황이 싫지 않았다.

 그의 따뜻한 연갈색 피부에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자연스러웠다.

 여울은 편안하게, 아주 편안하게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

 하완은 한철의 수확이 끝나고 별일 없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수확한 사과들을 저장하고, ‘아삭파이’ 납품 재료로 썼다.

 우수한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납품 전까지 과정을 꼼꼼히 점검하고, 규모가 큰 터미널 안 ‘아삭파이’매장을 관리하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아삭파이’ 매장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일손도 더 필요해졌다.

 

 “파트타임 직원만 늘리지 마시고 차라리 종일직원을 한명 뽑아주세요.”

 

 여욱이 똑 부러지게 말했다.

 

 “네가 말 못하니까. 내가 대신 해주는 거야.”

 

 여욱이 준영을 콕 집었다.

 준영이 여욱을 힐끔 째려보더니, 밖으로 나가 비질을 시작했다.

 

 “아무리 쟤가 성인남성 두 명 분량을 한다 해도, 여자인데, 일이 너무 많아요. 제가 하루 종일 있는 것도 아니고.”

 

 하완이 피식- 웃었다.

 

 “간만에 보는 인간적인 모습이다?”

 “에이~ 간만에까지야. 제가 원래 한 인간하는데, 그동안 보일 기회가 없던 거거덩요?”

 

 여욱의 건방짐에 하완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여간 말대답은. 넌 군대 가면 크게 고생할거다. 언제 갈 거냐? 내년이면 스물넷인 애가.”

 

 여욱의 입이 비틀어졌다.

 

 “언젠가는 가겠죠!”

 “내가 애랑 말씨름 하느니, 차라리 일어서고 말지.”

 

 여욱 때문에 골이 아파진 하완이 장부를 들고 일어섰다.

 

 “네가 말 안 해도 직원은 한 명 더 뽑을 생각이었어. 내달에 프랜차이즈 확장 문제도 있고. 관리직도 필요하니까.”

 

 동그랗게 커진 여욱의 눈에 억울함이 보였다.

 

 “진짜 전국 체인 내시게요? 헐. 나 군대 갔다 와서 내시지!”

 “너 군대갔다오면 2년후 인데. 어느 세월에? 프랜차이즈 사업 도와준다는 회사 있을 때, 얼른 내야지. 그러니까 남들 군대 갈 때, 빨리빨리 갔다 오지. 이제 가니까 얼마나 손해냐? 너 이미 군대 갔다 왔으면 내가 바로 점장으로 채용하지.”

 

 울상인 여욱 앞을 하완이 태연하게 지나치며 한 마디 했다.

 

 “나 미팅하고 늦을 거야. 오늘은 여욱이 네가 마감하는 날 맞지?”

 “네.. 다녀오세요.”

 “다녀오지 않을 거다. 바로 퇴근! 내일 보자.”

 

 시간이 오후 8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하완은 서둘러 주차장을 향해 걸었다.

 

 ‘직원을 새로 뽑아야 한다고?’

 

 아까 여욱과 한 말들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늦지 않게?’

 

 어쩐지 좋은 예감이 들었다.

 

 ***

 

 우우웅- 여울이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렸다.

 과수원 가을 땡볕에서 오래 있어서 그런지, 머릿결이 많이 상한 게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거칠고 푸석푸석한 머리를 힘겹게 빗질로 박박 빗었다.

 얼굴에는 자잘 자잘한 뾰루지들이 올라왔다.

 여울은 화장대를 뒤져 영양크림 샘플을 찾아냈다.

 엄지손가락만한 샘플을 최대한 손으로 짜내 얼굴에 벅벅 발랐다.

 탁상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어쩐지 처량해 보였다.

 수확한번 했다고 근 10년은 늙은 것 같았다.

 

 “에휴. 남자친구도 없는데. 얼굴이 벌써 이래갖고..”

 

 여울이 고개를 갸우뚱 휘저었다.

 

 ‘남자친구가 정말 없나?’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했다.

 남은 크림을 대충 바르고 침대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침대 위에서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마루와 싸우고 연락이 안 온지 꽤 오래됐다.

 

 ‘먼저 연락을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지. 내가 왜?’

 

 미안해서 그런 건지, 자존심 때문 인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새로운 남자한테 설레다니 미친 건가?’

 

 심지어 자신의 가장 추한 모습만 본 남자였다.

 

 ‘창피해야 하는 게 정상아냐?’

 

 아직 마음 한 구석에서 마루가 나가지 않았다.

 휴대폰 연락처에 마루를 쳤더니, ‘내 사랑마루’라는 저장명이 떴다.

 으아아악- 여울이 팔다리를 사방으로 휘저었다. 내 사랑마루라니!

 오글거림에 익사하기 직전, 얼른 연락처 이름을 ‘조마루’로 바꿨다.

 휴..이제 한숨 놓였다. 그리고 결심했다.

 한번쯤은 마루가 ‘조마루’인지 ‘내 사랑마루’인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수화기 버튼을 누르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뚜- 신호음 소리에 심장박동수가 쿵쾅쿵쾅 뛰었다.

 

 “여보새요?”

 

 오잉? 5초도 안 돼서 마루가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 우리?’가 아니고 ‘여보세요?’라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설마 이미 번호를 지운건가?’

 “여울이니?”

 

 여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상태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오빠 샴푸 어딨어?”

 

 정적을 깬 것은 어린 여자의 목소리였다.

 청아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오빠 샴푸 어딨냐구?”

 

 뚜뚜뚜- 여울이 수화기 버튼을 눌렀다. 전화가 끊겼다.

 휴대폰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낯선 여자의 목소리였다.

 마루가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안 될 건 뭐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러니까 이미 헤어진 사이에서 왜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눈물이 고였다.

 

 ‘확실하게 난 마루와 헤어졌다. 그날 이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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