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완의 아버지와 새 엄마가 들어오시자, 장내에 이목이 집중됐다.
중년의 중후한 신사와 화려하게 차려입은 연예인 같은 동안의 여자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도 했다.
“어머. 하완아. 엄마 왔어.”
여자의 말에 하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 네..”
습-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여자의 귀가에 닿았다.
“여보. 그래도 공식적인 행사인데. 제가 엄마 노릇을 해야죠.”
“어허.. 이 사람 아주..”
뒷말이 더 있어 보였지만 사람들의 눈치가 보인 신사는 말을 아꼈다.
마루유통 사장님과 신사는 서로 안면이 있어 보였다.
대한민국 국민들이라면 하나쯤 연관이 있다는 분명 학연, 지연, 혈연 중 하나 일 것이다.
하완은 마루와 여울이 있는 곳으로 왔다.
“두 사람 다 저녁 먹어야죠? 아침부터 와서 고생했는데.”
사장답게 아랫사람을 챙기는 하완의 말투가 퍽- 다정했다.
“저는 여기 더 있어야 하는데, 여울이 좀 챙겨주세요.”
처음에는 하완의 눈치를 보던 마루가 이제 공석에서도 여울을 편하게 불렀다.
그만큼 하완과 친해지기도 해서였지만, 필시 하완을 견제하려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
“여울씨. 밥 먹어야죠. 있다가 예향으로 내려가려면..”
불쑥 하완의 새엄마가 세 사람이 있는 자리로 왔다.
“어머. 이 좋은 날. 그냥 보내면 안 돼지. 여울씨 우리 집 와서 밥 먹고 가요. 내가 아줌마 시켜서 진짜 맛있는 식사 대접할게요.”
하완의 얼굴이 굳었다.
아무리 좋은 날이라고 하지만 아까부터 하완의 새엄마는 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하완의 표정을 본 여울이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신경써주시고. 그런데 어쩌죠? 제가 집이 여기가 아니라서 이따가 늦게라도 기차 타고 집에 내려가 봐야 해요.”
“어머. 그래요? 그럼 그냥 우리 집에서 자고가요. 방도 많은데.”
“네? 네?”
당황한 여울이 말을 더듬었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가 어떻게.. 갈아입을 옷도 없고.”
이쯤에서 하완이 가로막았다.
“어머니. 너무 오바시네요. 아무리 아삭파이 직원들이 식구처럼 지낸다고 해도 제가 사장이고 불편할 텐데, 저희 집에서 자고 가라니요.”
하완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하지만 하완의 새 엄마는 태도를 바꿀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당연히 하완이 기분 상한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어머 애. 어떠니? 너희 둘만 있으라는 것도 아니고. 나도 있고 네 아버지도 있는 걸. 그리고 우리 집에 옷이 얼마나 많은데. 내 옷 입으면 되겠고만. 나랑 사이즈 비슷할 것 같은데? 이래봬도 내가 꽤 날씬해.”
하완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어머니.. 이건 오바에요.”
“어우. 몰라. 몰라. 나 아줌마한테 전화해서 진짜 맛있는 저녁 준비해놓으라고 할 거야.”
하완의 새 엄마는 하완의 말을 싹 무시하고 가버렸다.
하완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했다. 화가 난 것 같았다.
하완의 눈치를 보던 여울이 사태를 수습해야겠는 지 하완에게 다정한 말로 말했다.
“사장님. 저 괜찮아요. 사모님이 대접해주시면 정말 좋죠.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실례라고 생각되고. 오히려 감사한걸요.”
“여울씨 미안해요. 내가..”
당황해서 말문이 막힌 하완이 이마를 감쌌다.
가만히 지켜보던 마루가 혀를 끌끌차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주여울.. 고생한다.. 저 아줌만 뭐야?”
여울은 자신의 불편함보다 하완의 굳은 표정이 계속 신경 쓰였다.
밍크코트를 입고 버스 손잡이만한 귀걸이를 하고 온 풍성한 파마머리의 여자와 하완은 정말로 모자지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하완이 어려서 재혼한 것도 아닌데, 하완이 친아들이라고 동네방네 말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하완이 참 감당하기 힘들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장님 참 고생하신다..’
여울은 안쓰러운 나머지 실수로 하완의 어깨를 짚을 뻔 했다.
‘아, 정신 차려야 하지.’
그저 안쓰러운 마음에 멀리서 바라볼 뿐이었다.
여울은 두 번째로 찾아온 하완의 한옥의 집이 조금 익숙했다.
그렇다고 하완의 집이 편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고 찾아왔던 저번보다 더 불편했다.
그때는 여울을 보여주고 싶었던 하완이 오버했고, 지금은 하완 때문에 신난 하완의 새엄마가 오버했다.
진수성찬을 앞에 두고 숟가락을 들었지만 휑한 집안 분위기는 어색하기만 했다.
수저를 손에들고 밥을 푸는 둥 마는 둥 식사에 소극적이었다.
“어서 들어.”
여울이 머뭇거리자, 보다 못해 하완의 아버지가 식사를 권했다.
“네!”
씩씩하게 말하고 밥을 한술 떴다.
밥은 당연히 맛있었다.
반찬도 많았다.
수저를 사용하는 딸가닥 소리만 집안에 울려 펴졌다.
어색한 분위기를 깬 건 하완의 새엄마였다.
“솔직하게 말해봐. 우리 하완이랑 어떤 사이야?”
“네?”
여울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입안의 밥알을 떨어뜨릴 뻔 했다.
하완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제 부하직원 앞에서.”
그러나 하완의 새엄마는 전혀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말했다.
“어머 애 어때? 이게 이상한 질문이니? 너 저번에 아버지 환갑잔치 때 만나는 아가씨 있으면 데려오라 했더니, 직원 데려가도 되냐며 묻고, 이 아가씨 데려왔잖아. 난 남자 데려올 줄 알았는데 여자 와서 깜짝 놀랐어.”
하완이 머뭇거렸다.
“그건 어머님이 워낙 제 사업에 관심이 많으시길래.. 누구 한명은 보여드려야겠다 싶어서..”
이 기세를 몰아 하완의 새엄마는 더 당당하게 말했다.
“솔직히 내가 네 사업에 관심이 많기보다는 네 근황에 관심이 많지. 너 아버지한테 연락도 잘 안하잖아.”
딸가닥- 숟가락 놓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하완의 아버지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 사람아. 지금 손님 앞에 두고 뭐하는 건가?”
“왜요? 내가 뭐 잘못했어요?”
“말 좀 가려서 해.”
하완의 아버지가 야단치시자, 하완의 새 엄마도 말을 아꼈다.
대신 다른 주제를 꺼냈다.
“있잖아요. 당신 전 부인 기일 곧 오죠.”
순간적으로 집안에 냉기가 가득했다.
“왜 제 엄마 기일을 아줌마가 챙기는 건데요?”
하완이 벌떡 일어섰다.
“죄송해요. 저 이만 일어설게요.”
탁- 지팡이를 이용해 하완이 나가는 것을 막은 아버지는 근엄하게 말하셨다.
“하완아. 손님 앞에 두고 네 멋대로 행동하는 거 아니다.”
끽- 이번엔 하완의 엄마가 의자를 끄집고 일어나셨다.
“너. 너무해!”
손가락으로 정확히 하완을 가리키는 새 엄마의 모습은 억울함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이었다.
‘오 마이 갓..’
이제 일어나서 나가고 싶은 사람은 여울이었다.
이 가족의 가족사를 일일이 알게 되어 매우 불편할 뿐이었다.
“너 아직도 내가 네 엄마 돌아가시기 전에 네 아버지 꼬셔서 네 엄마 신세 망쳤다고 생각하지?”
폭탄발언이었다.
여울은 옆통수의 땀을 닦았다.
“그만하세요!”
자리를 박차고 나간 건 하완이었다.
여울도 벌떡 일어났다.
“저.. 저도.. 이만..”
다이닝룸에 하완 아버지와 하완의 새엄마만 남았다.
흐엉- 하완의 새엄마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물을 한 컵 마신 하완의 아버지가 딱딱한 목소리로 새엄마를 나무랐다.
“일은 자기가 질러놓고. 우는 건 뭐야? 하완이 부하직원 앞에서 잘하는 짓이네.”
후- 입으로 바람을 불면 입김이 나올 만큼 추운 날씨였다.
여울이 겉옷을 대충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날도 추운데 어디가신거야?”
대궐같이 넓은 2층집을 싹- 뒤졌지만 어딜 가도 하완은 없었다.
아무래도 화가 나서 밖에 나간 것 같았다.
마당정원을 둘러보던 여울은 아무리 찾아도 없자, 대문 입구 까지 나갔다.
대문 앞에 세워진 하완의 차에는 운전석에 앉아있는 하완이 보였다.
운전석 등받이에 완전히 기댄 하완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었다.
매우 고요한 얼굴이었지만 입이 뾰로퉁 한 것이 아직 화가 덜 풀린 모양이었다.
여울은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갔다.
쿵쿵-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하완은 눈을 떴다.
“깜짝이야.”
창문에 딱 붙어서 하완을 쳐다보고 있는 여울의 얼굴이 보였다.
슥- 창문을 내린 하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에요?”
“추워요. 차에 들어가게 해줘요.”
“문 열려있거든요?”
“아, 그래요? 그럼 들어가도 돼요?”
“들어와요.”
웃는 얼굴로 여울은 하완의 옆자리에 탔다.
“혼자 뭐해요?”
“그냥 이것저것 생각 좀?”
하완은 애써 밝게 말했다.
하완의 얼굴을 이리저리 보던 여울은 괜히 꼼지락 거리는 손가락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오늘 눈치 없이 식사자리에 낀 게 화근이네요.”
“네? 아니요.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어머니가 실수하신 거죠.”
여울은 눈을 끔뻑거리며 하완을 조심스럽게 쳐다봤다.
“그래도 어머니라고 불러드리네요?”
“...”
여울에게 잠깐 시선을 준 하완이 턱을 괴고 포기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진짜 엄마는 여기 안계시지만.. 저 분은 어쨌든 지금 아버지 곁을 지켜드리고 있는 분이니까요. 그리고 정말로 내가 착각한 걸 수도 있으니까.”
여울은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어떤 부분을요?”
“여울씨..”
“네.”
뜸을 들이던 하완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했던 말들 다 잊어요.”
“네? 뭘요?”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여울은 하완을 쳐다봤다.
하완은 잠시나마 인자한 눈빛으로 여울을 따뜻하게 바라봤다.
“내가 했던 고백 다 잊어요. 다음 달부터 서울 아삭파이를 맡아주세요.”
“네? 제가요?
놀란 여울의 눈이 커졌다.
“네. 여울씨가 적임자죠. 원래 서울에서 일하던 사람이니까.”
“왜 말이 거기로?”
여울은 도통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설마 우리 집 가정사를 다 털어놓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것도 내 부하 직원한테?”
백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여울의 마음에서 서운한 감정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가끔 제가 서울에 올라갈게요.”
사심이라고는 1도 없는 하완의 냉정한 말에 여울은 상처를 받았다.
꼭 차인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