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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너에게 나를 보낸다[To You From Me]
작가 : 해모
작품등록일 : 2018.12.12
너에게 나를 보낸다[To You From Me]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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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그가 느꼈을 불안.
내가 느꼈을 두려움.
동시에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음은 알지만 피부로 느끼지 못해 외로웠던 사랑.

부칠 수 없는 편지인걸 알면서도 뒤늦게 펜을 든 소녀와 초여름의 어느 날, 필시 주소가 잘못된 듯한 편지를 받은 소년. 서로 누구인지도 몰랐기에 주고 받을 수 있었던 두 사람의 사랑이 담긴 편지 속 이야기.

 
《5. 흐르는 계절을 느낍니다》
작성일 : 18-12-16 23:02     조회 : 269     추천 : 0     분량 : 10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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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 지민 씨

 

 실망하긴요! 제가 외동이라서 왠지 귀여운 남동생이 생긴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어요―.

 그러니까 지민 씨 말은 '후회해도 돼.' 라는 거죠? 그런 말은 처음 듣네요. 맞아요. 사실 크게 바뀌는 건 없고 조금 아니 많이 후회한다고 해서 제가 완전히 무너지진 않을 거란 걸 나도 알거든요. 마냥 이겨내고 버텨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민 씨는 반대로 굳이 이겨내려고, 버텨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네요. 그만 또 울뻔했지 뭐예요? 제가 이렇게 눈물이 많은 사람인지 미처 몰랐어요.

 

 지민 씨 부모님은 그래도 참 상냥하신 분들인 거 같아요. 그래서 지민 씨도 그렇게 다정한 건가요?(농담 아니고) 바쁜 와중에도 잊지 않고 꼭 어린 아들 선물은 챙겼던 걸 보면 아마 할머니 손에 지민 씨를 맡기고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던 게 미안하셨던 모양이에요. 저는 아빠랑 떨어져 지내다 보니 엄마랑 엄청 가깝게 지냈는데 제가 어릴 땐 사달라고 끈질기게 조르던 장난감 하나 사주지 않는 분이셨어요. 대신에 먹는 게 남는 거라며 과자나 사탕을 입에 물려주셨어요. 딱 한번 아빠한테서 택배가 온 적이 있어요. 제가 막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때였는데 아빠랑 떨어져 산지 고작 1년이 지난 무렵이었죠. 제 얼굴보다 큰 택배에는 흔히 문구점에서나 팔 법한 학용품 세트가 들어있었어요. 그날은 제 생일도, 무슨 기념일도 아니었는데 아빠가 선물을 보낸 거예요. 알록달록한 학용품 세트엔 연필, 지우개, 자, 풀이나 가위 같은 것들로 가득했어요. 저는 그게 너무 기뻐서 엄마랑 같이 학용품마다 라벨 스티커에 이름을 써서 내 거라는 표시를 붙였어요. 그게 아빠가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어서 계속 기억에 남아있어요. 지금은 다 없어지고 왠지 자 하나만 서랍에 들어있어요. 캐릭터 그림이 그려진 자는 때가 지고 라벨지는 벗겨질랑 말랑한 채로요.

 

 소중한 물건엔 늘 추억이 담겨 있잖아요. 물론 의미를 부여했으니까 기억도 진하게 남겨져 있는 거겠지만. 지민 씨가 부모님이 준 선물과 함께 그 다정한 손길을 추억하고 있는 것처럼요. 저도 3년 넘게 엄마랑 떨어져 살면서 대학이다 뭐다 자주 보진 못했던 거 같아요. 최근에야 아빠 일 때문에 보는 일이 많아졌네요.

 

 그나저나 부쩍 날이 더워졌죠? 서울은 바깥으로 나갔다간 곧바로 익어버릴 만큼 찜통더위가 한창인데 지민 씨가 사는 곳은 어때요? 제가 자취하는 집엔 에어컨이 없어서 선풍기 하나로 3년째 여름을 나고 있어요. 예전에 엄마랑 같이 살 때는 엄마 집에 에어컨이 있었는데 제가 워낙 에어컨 바람을 싫어해서 엄마가 제 눈치를 볼 정도였어요. 분명 시원하기는 한데 장시간 쐬기만 하면 머리가 아파지더라고요. 제가 너무 예민한 탓도 있겠죠. 그래도 지금은 다행히 학교가 방학에 들어가서 다행이에요. 아, 제가 말 안 했던 가요? 서울은 아니고 서울 부근에 있는 예대에 디자인 전공하고 있어요. 덕분에 통학하는 데만 2시간씩 걸려요. 이제 와서 후회 중이랍니다. 하아…. 작년에는 방학이면 쉬엄쉬엄 주말 알바도 했었는데 이번 여름에는 아무래도 알바 할 시간은 안 날 거 같아요. 곧 납골당 이장도 하고 또, 그냥 이번 여름엔 바쁘지 않게 지내고 싶네요. 지민 씨도 알죠? 늘어지고 퍼지고 싶은 이 기분! 실상은 복잡한 마음 추스르기 프로젝트지만….

 

 여름도 좋지만 빨리 가을이 됐으면 좋겠어요. 가을엔 좀 더 공기가 맛있게(?) 느껴지거든요. 한번 숨을 깊이 쉬어봐요. 분명 다를 테니까.

 

 PS. 세상에, 너무 귀여운 거 아니에요? 흰 털이 인상적이니까 반사적으로 흰둥이가 생각났지만 그것보단 솜이 어때요? 솜!

 솜방망이 같은 앞발이랑 솜사탕 같은 복실한 털이 그림에서도 느껴지는데 암컷인지 수컷인지 모르니까 양쪽 다 가능한 이름으로 '솜'.

 

 2017년 7월 20일.

 From. 한 수지

 

 계절은 흐른다. 지나간 계절은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지만 돌아온 계절을 다시 느낀대도 그때 느낀 시간과 감정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 낮의 하늘, 바람, 향기, 온도. 그 밤의 하늘, 바람, 향기, 온도. 그 순간순간 느꼈던 감정은 한낱 미미할지라도 매일이 다르듯이 매 순간 느끼는 것 또한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르다. 그래서 나는 매 순간 흐르는 계절을 느낀다. 여름의 무더위를 반기지 않더라도 즐길 수는 있을 정도로 흐르는 감정을, 계절을 느낀다.

 

 To. 수지 씨

 

 다행히 제가 집에 있을 때 수지 씨의 편지가 와서 바로 읽어볼 수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 굉장히 기분이 업되고 막 그러네요!!! 꼼꼼히 읽고 빨리 답장을 써야지 내일 바로 편지가 도착하면 좋겠다 하는 마음에 골목 밖에 있는 우체통까지 걸어가는 걸로도 모자라 뛰어가기도 해요. 그런다고 수지 씨한테 제 편지가 더 빨리 도착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제가 유난일까요? 부쩍 하루하루가 즐거워지는 기분입니다. 수지 씨 동생이 되는 거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데…. 말 놔도 된다고 하고 싶지만 왠지 수지 씨는 괜찮다고 할 거 같아요. 어, 방금 뜨끔했죠?

 

 우와 공통점 또 발견! 저도 형제자매 없이 외동으로 컸어요. 확실히 제가 할머니를 따라서 여기 시골집에 오기 전까진 부모님이 꾸준히 선물을 사다 주셨던 거 같아요. 음, 여기서 살게 된 게 9살 부터거든요. 사실 그전에도 거의 할머니 손에서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서…. 할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서울에 살던 애가 이런 시골집에 와서 잘 적응할지 걱정이었대요. 근데 의외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쉽게 적응해서 얘는 나중에 어디 가서도 잘 먹고 잘 살겠구나 싶었대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래요 큭. 그때 서울에서 내려와서 이 집에서 살게 된 날 환경은 무척 달랐지만 나쁘지 않았어요. 할머니는 항상 잘해주시고 부모님이야 어차피 보는 날이 많지도 않아서 여태 지냈던 날이랑 별반 다르지 않았거든요.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도 학교를 두 번이나 전학을 다녀서 새로운 학교도 금세 적응했어요. 아니면 그 나이에 벌써 체념하는 법을 깨우쳤는지도 몰라요. 울고불고 해도 달라질 게 없는 걸 아니까. 그래서 지금은 서울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도 흐릿해요.

 

 지금은 다른 애들처럼 어떤 대학교를 갈지 고민해야 할 때지만 저는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가서 제가 종종 취미 삼아 그리는 그림을 더 배우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자신이 없기도 해요. 부모님한테 묻기에도 이 상황엔 어려울 거고 금전적인 부담도 드니까요. 제일 중요한 건 성적도 영…? 하하. 수지 씨는 대학 다녀보니까 어때요? 이런 때 인생 선배한테 가르침을 받아야겠어요. 도와줘요 헬프!

 

 저도 제가 사는 집이랑 학교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통학하는데 꽤 시간이 걸려요. 읍내에 가려면 버스를 타고 40분은 가야 해요. 그래서 새벽같이 일어나야 하는 아침이 어찌나 끔찍한지. 이른 아침마다 최대한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다 겨우겨우 마을버스를 타면요 항상 그 시간대에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 저마다 옆구리나 머리에 시장에서 내다 팔 물건이 담긴 작은 수레나 큰 고무 대야를 들고 버스에 올라요. 덜 떠진 눈으로 버스에 할머니들 짐 옮기는 걸 도와드리고 같이 읍내에서 내린 후에 또 학교까지 10분 정도 걷는 게 제가 보내는 흔한 아침 풍경이에요. 물론 좋은 점도 있어요.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서 등교를 하다 보면 남들은 놓치고 지내는 이런 새벽의 풍경도 볼 수 있거든요. 동이 트기 시작할 때의 읍내는 딱 시작할 즘의 활기를 띠어요. 자리를 잡고 물건을 팔 준비를 하는 할머니들, 전날 접어둔 천막을 펼치는 노점상 아저씨, 기름을 짜내느라 풍기는 고소한 곡물 냄새, 밤새 내린 이슬 때문에 습하고 서늘한 새벽 냄새. 그런 것들로 가득하죠. 그런데 요즘은 점점 더워져서 버스에 앉아있는 시간이 최고인 거 같아요. 아무리 옆에 바다가 있다 해도 더 더워질 텐데 어쩌죠 으. 그래도 저는 여름이 좋아요. 반팔을 입고 잘 때 닿는 얇은 이불보의 감촉, 후덥하지만 해가 저문 후에 불어오는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는 느낌, 찬물로 샤워하고 난 다음 대충 옷을 걸치고 마룻바닥에 누워있을 때 느끼는 나른함. 이런 게 되게 좋더라구요. 그래도 심하게 더운 건 싫어요…. 장마 때문에 꿉꿉한 나날인데 8월 중순쯤 지나면 딱 좋은 날씨겠죠?

 

 PS. 솜이라…. 좋은데요? 금방 솜아 하고 불러봤는데 어떻게 알고 고개를 번쩍 들어요. 마음에 들었나 봐요. 제가 워낙 작명 센스가 없어서 수지 씨가 정해준 그 이름이 딱인 거 같아요! 슬쩍 봤는데 수컷이네요. 장군감 ㅋㅋㅋ.

 

 2017년 7월 24일.

 From. 지민

 

 깊이 숨을 쉬었다. 고개를 살짝 들고 눈을 내리감고 느리고 깊게 숨을 쉬었다. 가장 먼저 여름 장마의 습한 공기가 맡아졌다. 가을엔 좀 더 차고 건조한 공기겠지. 맛있게 느껴질 거라는 그녀의 말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여름이 숨을 지나 온몸 곳곳에 퍼진다. 다르다. 내쉬는 게 아니라 들이쉬는 숨에 계절이 가득 들어찼다.

 

 To. 지민 씨

 

 벌써 8월이네요. 항상 어서 빨리 여름이 지나가길 기다리지만 하루하루가 더디게 느껴졌는데 어쩐지 요즘은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거 같아요. 유독 지민 씨랑 편지를 주고받는 날이 길어질수록 더 그런 생각이 들어요. 한동안 장마 때문에 편지에도 습기가 스며들어 펼칠 때 눅눅한 감촉이 느껴졌어요. 아무래도 따로 보관하는 박스에다 제습제를 사다 넣어야 할 거 같아요. 혹시 지민 씨도 저와 주고받은 편지를 따로 보관하나요? 설마…, 막 버렸거나 그렇다면 조금 실망할 것 같기도…?

 

 며칠 전엔 친구랑 봉사활동을 다녀왔어요. 학교 때문에 일부러 한 거긴 하지만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방학이라 제 또래 대학생분들도 꽤 보였고 무료 급식을 도우는 일이었는데 독거 어르신들이 많이 오셨어요. 저는 배식을 맡았는데 어르신분들이 앉으면 자리로 가져다 드렸죠. 미처 몰랐는데 알고 보니 거동이 불편하거나 공간의 제약이 있을 수 있어서 일부러 그런 배려가 필요한 거더라고요. 같이 간 친구가 어른분들께 살갑고 깍듯하게 대해서 의외였기도 했어요. 은기라고 저번에 몇 번 편지에다 얘기한 거 같은데 평소 다정하긴 해도 남들이 말하는 겉모습은 무지 차가워 보인다고 얘기하거든요 크크. 저한테는 잘 대해주지만 봉사활동도 거리낌 없이 척척해내주니 왠지 고마웠어요. 제가 먼저 가자고 했거든요. 다음 방학엔 아동 보호 센터에 가볼까 해요. 어린애들이랑 별로 친하진 않지만….

 

 지민 씨, 한창 진로가 고민될 때라서 이런저런 고민이 많을 걸 알아요. 그래도 지민 씨는 딱 한 가지 확실한 게 있잖아요. 좋아하는 그림을 더 배우고 싶다는 의지요. 많이 보진 못했지만 지민 씨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더 많은 그림을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자꾸 더 알아가고 싶게 만든달까요? 물론 선택은 지민 씨가 하는 거지만 진학을 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지민 씨 그림은 앞으로도 쭉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 읍내 풍경 그림도 잘 받았어요! 새벽의 어스름한 색깔이 무지 예뻤답니다.

 

 PS. 반말은…, 역시 무리예요…. 지민 씨가 어려워서 그렇다기보단 이 약간의 거리감이 되게 좋아요. 성별, 나이, 위치를 떠나서 같은 높이 같은 거리에서 동등하게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러니까 소중히 대해지는,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이 같잖아요? 하하

 

 2017년 8월 2일.

 From. 한 수지

 

 대체 내 편지가 뭐라고 목 빠지게 기다린단 걸까. 하고 생각했던 나는 얼마 안 가 알 수 있었다. 똑같이 그 사람이 보낸 편지를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으니까. 그가 쓴 편지를 읽고 그가 그린 그림을 구겨지지 않게 차곡차곡 모아 소중히 간직하는 나를, 깨달았으니까.

 

 To. 수지 씨

 

 오, 되게 좋은 말 같아요.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히 대해진다는 느낌. 알 거 같아요. 솔직히 요즘 세대에 이런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학교 애들이 알면 놀라서 뒤집어질걸요? 지금까지 편지라고 써본 건 어렸을 때 어버이날에 쓴 카네이션 편지밖에 없었거든요. 그것도 학교에서 어버이날 행사 때문에 쓴 편지요. 편지를 제대로 써본 적도 없는 제가, 쓴 문장을 또 읽고 곱씹어 본다는 건 수지 씨와의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는 거겠죠?

 

 그나저나 수지 씨는 그 남사친분 얘기를 가끔 하는 거 같은데, 좋은 분인가 봐요. 처음엔 연인인 줄 알았지 뭐예요. 제 주변엔 여사친이라고 할 만한 애가…. 아, 교실 제 옆 옆자리에 안승연이란 애가 있는데 얼마나 친화력이 좋은지 마당발로 유명해요. 입학식 때 교실에 뻘쭘하게 앉아있는데 느닷없이 오늘 정상 수업이냐고 급식은 됐으니까 빨리 집에나 가면 좋겠다면서 주절주절 수다를 늘어놓는 거 있죠. 요즘엔 공부한다고 안경까지 쓰고 다니는데 종종 면전에다 비웃어주고 그래요. 나보곤 나중에 수능 망하면 세계 명화들을 베껴 그려서 그걸로 동업하자는 헛소리도 한다니까요. 어째 제 주위에는 멀쩡한 애가 한 명도 없는 거 같아요. 하.

 

 장마가 끝나니까 열대야 때문에 밤에 몇 번을 자다 깼는지…. 이런 날씨에 봉사활동까지 열심히 다니고. 수지 씨 아주 칭찬해~ 혹시 너무 더우면 바가지에다 차가운 물 퍼다 놓고 발 담그고 있어봐요. 그럼 금방 시원해지니까. 에어컨이 싫다고 했으니까 한번 이렇게 해보는 거 어때요?

 

 2017년 8월 6일.

 From. 지민

 

 어쩌다 한번 그녀의 편지에 그녀의 남자인 친구 얘기가 오르내리곤 했다. 어쩐지 신경이 쓰여 나도 모르게 내가 유일하게 친한 여자인 친구 얘기를 했다. 그런다고 그녀가 신경을 쓸지는 모르겠지만. 사소하지만 소중한 얘기들이 조금씩 쌓여간다. 어느 하나 놓칠 수 없어서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운다. 편지 속 문장을 조그맣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착각이 일었다.

 

 To. 지민 씨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어요. 한창 학기 중엔 관련 자료만 빌려 본다고 들렀던 도서관인데 이번엔 제가 읽어보고 싶은 소설이나 에세이 같은 책들을 읽어보고 싶었거든요. 주위에 다른 사람들처럼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책을 펼쳤어요. 바로 옆이 창가여서 열린 창문 사이로 부드러운 햇살이나 낮의 잡다한 소리들이 섞여 들어왔어요. 바로 옆이 고등학교였는데 점심시간이라고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남고생들이 몇몇 있어서 소리치는 목소리들이 조금씩 들렸어요. 그걸 보고 문득 지민 씨 생각이 났어요. 지민 씨도 막 점심시간이나 이런 때 밖에 나와서 친구들이랑 축구도 하고 그러나요? 어떤 교복을 입고 어떤 가방을 메고서 어떤 모습으로 학교 수업을 듣는지 문득 궁금해지더라구요. 왠지 지민 씨라면 샤프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턱을 괸 채 칠판을 멍하니 보고 있을 거 같았어요. 나는 고등학생 때 필기만 형형색색으로 잘 하는 애였어요. 막 볼펜도 깔별로 가지고 다니고. 반에 한 명씩은 꼭 있잖아요? 그래도 필기하면서 본 거는 있어서 잘 찍으면 성적은 중위권을 웃돌았던 거 같아요. 대학은 수시로 들어갔어요. 수능은 뭔가 무서웠거든요. 한 번의 시험에 제 인생을 모조리 맡기는 기분이랄까…. 사실 워낙 걱정이 많은 편이라서요.

 

 오후 내내 도서관에 있다가 나머지 책들은 빌려왔어요. 마침 목이 말라서 나가는 길에 자판기에서 캔커피도 뽑아 마셨어요. 평소에 커피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왠지 도서관에 오니까 믹스커피를 마셔줘야 할 거 같더라구요. 한동안은 내내 독서만 할 거 같아요. 그리고 꾸준히 지민 씨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 그렇게. 이번 여름은 정적인 여름이랄까요.

 

 2017년 8월 15일.

 From. 한 수지

 

 조용히, 차분하게, 나는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혼자서 여름을 보내고 있지만 실은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내 일상을 공유하고 누군가 내 이야기를 읽어주고 있다. 수업 중에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손가락에 샤프를 끼운 채 열린 창문 밖을 내다볼 그가 궁금해지는 것 또한, 당연스러웠다.

 

 To. 수지 씨

 

  주말에 솜이랑 바닷가에 산책을 나갔어요. 사실 저번 주에 데리고 나가려고 했는데 마땅한 목줄이 없어서 집을 이잡듯이 뒤지다가 포기했었어요. 그래도 이번엔 읍내 애견숍에서 목줄을 사 왔어요. 쪼그만 강아지라 목에다 걸긴 또 미안해져서 몸통에다 걸 수 있는 줄로 구했는데 몸에 채운다고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어떻게 나가는 건 알고 좋아가지고 가만히 있을 생각을 않더라고요. 휴. 어차피 사방이 뻥 뚫린 마당 딸린 집인데 밖에 나가는 게 그렇게 좋을까요? 낮엔 해가 따가워서 해 질 녘에 바닷가로 갔어요. 팔팔한 솜이 따라서 같이 뛰어다닌다고 덩달아 나도 잔뜩 운동했지 뭐예요. 황금 같은 주말에 허어. 노을이 거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던 시간이었어요. 솜이를 옆에다 데려다 두고 모래사장에 앉았는데 바닷바람에 서서히 땀이 식어서 점점 시원해지더라고요. 그때 솜이는 이제 모래를 파는데 열중하고 있었어요ㅋㅋ 여긴 워낙 시골이라 바다에 사람이 거의 없어요. 가끔가다 혼자 전세 낸 기분도 들고―. 수지 씨도 같이 봤으면 좋았겠다 싶었어요. 좋을 거예요 분명.

 

 PS. 축구는…. 안타깝게 젬병이에요. 그래도 농구는 좋아해요. 좋아는 해요. 잘 하진 못하지만….

 오늘 수업을 듣다 말고 바보처럼 창밖을 내다보고 책상 서랍을 들여다봤어요. 혹시 수지 씨가 나를 관찰하고 있는 건 아닌가. 아니면 어떻게 내가 하는 양을 꿰뚫지? 하는 생각에요.

 

 2017년 8월 23일.

 From. 지민

 

 왠지 그림으론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사진을 찍어 보낼까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그림도, 사진도 눈으로 직접 보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그녀가 이 바다를 봤으면 좋겠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 아래 흐르는 바다를 보고 바다 내음을 맡고 바닷바람을 느끼고. 그렇게 제 아버지의 흔적을 찾았으면 좋겠다.

 

 To. 지민 씨

 

 올해가 가기 전에 어딘가로 여행을 갔으면 좋겠어요. 혼자도 좋고, 친구랑 같이도 좋고. 물론 이 소망은 버킷리스트 같은 거라서 꼭 올해가 아니라 내년이 될지도 몰라요. 뒤돌아 보니 한 번도 마음 놓고 여유롭게 여행을 가본 적이 없더라고요. 여행이래 봤자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이랑 대학 MT가 다였거든요.(재밌긴 했지만) 집 청소를 하다가 아주 어릴 때 썼던 버킷리스트 메모지를 발견했어요. 뭐가 그렇게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게 많았던지 메모지 한 장이 빼곡하더라고요. 그중엔 지금 이룬 것도 몇몇 있고 이루지 못한 것도, 아마 앞으로도 이루지 못할 수도 있는 그런 소망들이 섞여있었어요. 제일 먼저 눈에 띄던 게…. 해외에 있는 친구랑 펜팔 하기. 아, 이건 반쯤 이룬 거 같네요. 해외는 아니지만 일단 지민 씨랑은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좀 기분이 이상해진 소망도 있었어요. 아빠랑 인사해보기. 지민 씨가 보기도 좀 이상하죠? 사랑한다 얘기해보기. 안마해주기. 효도하기. 뭐 이런 것도 아니고 인사해보기라니. 기억을 더듬어보니까 막 초등학교 졸업하면서 세웠던 버킷리스트더라구요. 인사를 한다는 게 정말 사소한 일인데 저한텐 가장 어려운 일이었을 거예요. 남들이 하는 사소한 일상의 일들을 아빠랑 해보고 싶었어요. 그게 뚜렷하게 나타난 게 인사였나 봐요. 그땐 소망이 소원이 되진 않았으면 좋겠다 하는 막연한 마음에 그렇게 썼던 거 같아요. 언젠간 꼭 이룰 거니까 막연한 소원이 되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제 제법 날이 선선해요. 낮엔 아직 덥지만 아침저녁으론 공기가 선선해진 게 확 느껴져요!

 

 PS. 은기가 찍어준 사진이에요. 과 MT 때 같은데 그나마 이게 제일 최근이네요.

 

 2017년 8월 30일.

 From. 한 수지

 

 아직은 물이 들지 않은 푸른 은행나무 아래를 지나가는 내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달라붙는 청바지에 영문 프린팅이 새겨진 노란 반팔을 입었다. 가슴께까지 닿을락 말락한 머리는 풀고 있었고 카메라를 발견하고 어색한 미소를 띠고 있다.

 

 사실 망설였다. 사진은 너무 오버인가 싶어서. 편지가 아닌 사진을 동봉해 보냄으로써 괜히 이 관계에 균열이 생기진 않을까 공연히 불안해진 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생긴 유대감과 결속력은 갈수록 더 단단해짐을 느낀다.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 당신은? 의 반복.

 그게 내가 여름의 끝자락에서야 사진을 동봉한 이유였다. '나를 말해주다 보여주고 싶어졌다.' 기껏해야 사진 한 장이었지만 말이다.

 

 9월. 그렇게 여름이 갔다.

 

 To. 수지 씨

 

 언젠가 나도 수지 씨와 인사를 주고받는 날이 온다면 그것만큼 반갑고 기쁜 일은 없을 거 같아요. 인사는, 처음 보는 사이면 당신을 알게 돼서 기쁘다. 다시 보는 사이면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의 함축같이 들리거든요.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여행을 간 적이 없네요. 할머니 따라서 큰 병원에 갈 때 말고는 이 시골집을 벗어난 적도 없는 거 같아요. 부모님은 항상 바쁘셔서 가끔 두 분이 여기로 오실 때도 따로따로라서 제가 서울에 가 볼 일은 일절 없었어요. 그마저도 가뭄에 콩 나듯이 있는 일이에요. 음, 수지 씨가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기회가 생긴다면 꼭 여행 가보고 싶어졌어요. 흐흐.

 

 방학이 끝났어요. 사실 한참 전에 끝났지만 뒤늦게 사사로이 얘기하네요. 고삼한테 방학이래 봤자 실상 일주일 정도지만 그래도 개학하고 학교에 다시 가니까 죽을 ㅁ…, 막 새롭고 그래요(?) 수지 씨 학교도 이제 개강이겠죠? 헐 벌써 9월이에요! 수지 씨랑 편지 주고받은 지 벌써 두 달은 훌쩍 지난 거 알아요? 따로 편지 보관하던 박스가 가득 찼어요. 더 큰 상자를 구해야 할지도….

 

 PS. 나는 카메라가 없어서 정호원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었어요. 사진 한 장당 천 원꼴이라면서 어찌나 생색을 내는지 천 원으로 얼굴을 때려줄뻔했다니까요. 하아.

 

 2017년 9월 3일.

 From. 지민

 

 작은 사각 필름 안에는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빈 교실에서 책상에 걸터앉아 카메라 너머를 응시하고 있는 내가 들어있다. 왠지 모를 쑥스러움에 시선이 카메라를 똑바로 향하질 못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일부러 정호원한테도 일찍 나오라고 닦달을 해댔다. 교복을 입은 내 모습이 궁금하다던 그녀를 위해 넥타이까지 바르게 챙겨 입었다.

 자꾸 옷과 머리를 가다듬자 대체 언제 찍을 거냐고 짜증을 바락 내던 녀석을 째려보느라 사진이 잘 나왔는지 어쨌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내가 생각한 모습과 어딘가 비슷했다. 내 모습을 상상했던 그녀처럼 나도 은연중에 그녀의 모습을 이리저리 상상해보고 있었나 보다. 기분 탓인지 착각인지는 몰라도 내게 그녀 자신을 스스럼없이 보여주고 있단 사실이 나를 기쁘게 만들었다. 이젠 내 이야기를 하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존재한다에서 위안을 얻던걸 그치지 않고 서로를 알아 가고 있다 더 알아 가고 싶다에서 더 큰 위로와 기쁨을 얻고 있었다. '당신을 알고 싶어요.' 잔잔한 설렘이 가슴속 깊이 요동쳤다.

 

 9월. 그렇게 가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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