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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너에게 나를 보낸다[To You From Me]
작가 : 해모
작품등록일 : 2018.12.12
너에게 나를 보낸다[To You From Me]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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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그가 느꼈을 불안.
내가 느꼈을 두려움.
동시에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음은 알지만 피부로 느끼지 못해 외로웠던 사랑.

부칠 수 없는 편지인걸 알면서도 뒤늦게 펜을 든 소녀와 초여름의 어느 날, 필시 주소가 잘못된 듯한 편지를 받은 소년. 서로 누구인지도 몰랐기에 주고 받을 수 있었던 두 사람의 사랑이 담긴 편지 속 이야기.

 
《13. 꼭 다시 만나요》
작성일 : 18-12-29 21:51     조회 : 244     추천 : 0     분량 : 9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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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살다 보면 그 어떤 값진 보물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생기는 때가 있다. 가령 그것은 사랑하는 가족, 친구, 연인, 또는 반려동물같이 고개 돌리면 마주칠 수 있는 내 곁의 소중한 존재가 되기도 하고, 앞으로 살아갈 인생 전체를 흔들어 놓는 찰나의 순간이나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 문득문득 슬픈 기분이 들기도 하는 할당된 오늘 일 수도 있다.

 

 내게는, 기억 한 자락이다.

 

 내 기억 한 자락에는 모든 잡념을 휩쓸고 가는 철썩대는 파도 소리와 짭짤한 바다 바람을 타고 풍겨오는 군침 도는 옥수수 냄새 그리고 살갗에 달라붙는 마룻바닥의 시원한 감촉과 온 마음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은 그 사람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꺼지지 않고 살아 숨 쉬어 매 순간 그곳에 있는 기분을 들게 만드는 기억. 이 기억 한 자락만큼은 절대 잊고 싶지 않다. 그 세상 어떤 진귀한 보물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날'들이었다.

 

 

 지민 ver.

 

 

 「어제는 지나버린 시간이다. 오늘은 곧 과거가 되고 미래는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나는 진정 오늘을 즐기며 살고 있는가. 지나버린 과거를 붙잡아 놓으려 노력하거나 내일의 두려움 탓에 오늘을 불안 속에 그저 흘려보내고 있진 않은가. 완벽했던 어제를 보냈다 해서 오늘을 그와 똑같이 보낼 수는 없고 내일을 안다고 해서 오늘을 그만큼 잘 지낼 수야 없다. 그런데 왜 사람은 지난 과거에 미련을 두고 닥치지 않은 미래에 두려워 떨면서 변하지 않는 오늘에 타협하는지.

 

 당연히 과거로는 후퇴할 수 없으니 무시무시하게 아가리를 벌리고 버티고 선 미래를 향해 전진해야 하는 건데 오늘을 보류할 수 있다면 거리낌 없이 그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겠다 이거다. 잠깐 현실을 미뤄두고 내일을 알고 난 뒤 다시 나타난다면 오늘의 나는 내게 잘했다고 칭찬해줄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일단 미리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겁은 반감되니까. 하지만 앞서 말했듯 내일을 안다고 오늘을 더 잘 지낼 수야 없겠지만. 그래서 그런가 어제를 발판 삼아 더 나은 오늘을 보내고 미래를 위해 일궈나갈 뿌리를 내린다는 부분도 나는 썩 석연치 않다. 오늘은 왜 어제와 내일의 들러리가 돼야 하는 건지. 오늘은 오늘로서 인정해주면 안 되는 건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결국엔 '나'로 이루어진 시간이다. 그 시간을 얼마나 알차게 보냈든 허망하게 보냈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오롯이 내가 보낸 흔적이고 지낼 꽃길이고 살아갈 현재다. 수많은 오늘이 모여 내가 형성되는 것이다. 나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을 즐기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그리워하고 완벽한 미래를 꿈꾼다고 해서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이미 지나버린 시간과 아직 닥치지 않은 걱정들로 인해 오늘을 내팽개치지는 말자는 거다. 그 끝에 무엇이 있든 나와 내 사람들에게, 진정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길 바란다.」

 

 “뭐야, 웬 독서? 승여나 어디 해가 서쪽에서 떴는지 확인 좀 해봐라.”

 “불행히도 동쪽에서 떴네. 완전 정상―.”

 “…뭐가 불행히도야! 너희들은 나한테 하루라도 시비를 안 걸면 입에 가시라도 돋치냐?!”

 “어, 어떻게 알았냐. 안 그래도 입이 따끔거려서 찾아온 건데.”

 “하… 말을 말자….”

 

 배를 잡고 교실 바닥을 나뒹구는 정호원을 짜증스러운 눈길로 내려다보다 마저 읽고 있던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르게 책상 위에 놓인 책이 영 어색했다. 혹여 더러워지진 않을까 학교로 들고 오는 것도 망설여졌더랬다.

 

 '심심할까 봐 챙겨온 건데 나는 이미 여러 번 읽은 책이거든요. 무명작가 에세이인데 시간 나면 읽어봐요. 옛날에 혼자 있을 때마다 읽고 많이 위로받곤 했어요. 물론 지민 씨 편지 받기 전까지만―.'

 

 사실 저 애들의 반응이 이상할 것도 없다. 교과서 외에는 책이랑 전혀 친하질 않아서 초, 중학교에서 흔히 필독이니 권장이니 하는 책들도 손에 대질 않았었다. 책 보단 그림 그리는 게 더 좋았으니까. 하지만 수지 씨가 빌려준(아니 준 건가?) 이 책은 감회가 색다르다. 다 읽을 수나 있을까 싶으면서도 오늘 학교에 챙겨오긴 했지만. 학교에서 모조리 읽어버리고 수지 씨가 떠나기 전에 그 감상을 얘기해주리라 하는 다짐에 수업도 뒷전이다.

 

 “아하 그래, 너는 수능 안 본다 이거지! 그러니까 생전 안 하던 독서도 여유롭게 하시고… 응 그래….”

 “추하다 호원아.”

 “헹, 그래봤자 난 대학 안 갈 거야. 내 가게 차릴 거라고.”

 “아직 수시 결과 안 나왔어. 나야 수능 안 본다 하지만 너넨 뭐냐. 여기서 노닥거려도 돼? 그리고 그 되지도 않는 피시방 사업이 문제가 아니라 그전에 너희 엄마한테 가루가 되고 없을걸.”

 “응, 맞아… 가 아니라 도를 넘는 팩폭은 삼가줄래? 호워니 마상….”

 

 정호원은 혼자 펄펄 열을 내다 현실을 직시했는지 금세 시무룩해 했고 푹 꺼진 어깨를 애잔한 얼굴로 토닥거려주는 안승연이다. 그러다 문득 승연이 묻는다. 수시 발표 어제 아니었어?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갤 끄덕이며 말했다. 안 그래도 오늘 마치고 확인해보려고. 그 와중에 팔자 좋은 놈…. 하고 구시렁거리는 호원의 목소리도 들렸지만 무시했다. 어제는, 여러모로 그럴 정신이 아니었다. 어제 일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호다닥 달아오르는 얼굴에 황급히 책을 읽는 척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러자 문장 하나가 시야 끝에 걸린다.

 

 「다행히도 우리에겐 후회와 불안뿐만이 아닌 지난 추억을 음미하고 다가올 내일을 기대하는 설렘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커다란 위안이 될 것이다. 만남에는 헤어짐이 정해져 있고 떠남이 있으면 반드시 돌아옴이 있다는 뜻의 회자정리 거자필반이란 말처럼 때론 꿈결 같은 어제를 뒤로하더라도 훗날 다시 재회할지도 모를 내일에 대한 기대가 오늘을 살게 하기도 한다.」

 

 “……그래, 오늘은 오늘이지.”

 

 이런 말을 읽고 있자니 그저 현재에 안주하고 싶어진다. 마지막을 두려워하지 않게. 말 그대로 오늘을 즐겨야 한다면 현재에 안주하는 것만큼 만족스러운 건 없겠다. 지난 며칠을 돌이켜보건대 부족함 없이 훌훌 털어낼 마지막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지막이 아닌, 오늘은 오늘로 끝맺고 싶다.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는 건가. 나지막이 내쉰 짧은 한숨이 글자 위를 덮었다.

 

 

 ***

 

 

 시간이 빨리 흐르길 바라면서도 늦게 흐르길 바라는 생각이 속에서 마구 충돌하고 있었다. 어서 빨리 학교를 마치고 수지 씨를 만나고 싶은 달뜬 마음과 그녀를 보내기 싫은 식은 마음. 시간이 차곡차곡 수를 더해갈수록 헤어짐의 순간은 피할 새 없이 빠르게 다가왔다. 마음 같아선 마지막을 최후의 최후의 마지막으로 미뤄두고 싶다. 하. 마지막이 아닌 오늘은 오늘로 끝맺고 싶다고 한 게 불과 네 시간 전인데 막상 시간이 닥치니 대면하기가 싫어지고 만다.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라, 언제 이렇게 운동화 밑창을 바닥에 질질 끌고 걷고 있었지. 최대한으로 늦춘 걸음이 심경을 대변했다. 머리를 한번 흩트리고 그에 반항하듯이 나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한달음에 교문을 빠져나가 때마침 정류장 앞에 정차 중인 버스에 올랐다. 부르릉. 덜커덩 거리는 차창 밖으로 아직 해가 지지 않은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다행히 날씨가 좋다. 문득 가방을 뒤져 수지 씨가 줬던 책을 꺼냈다. 기어이 끝장까지 모조리 읽어버렸다지.

 

 나는 책의 맨 앞장을 펼쳐 옅은 노란색의 속 색지 위에 같이 꺼낸 연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세밀하지 않은 인물을 그리는 건 처음이다. 이 책은 역시 다시 돌려줘야겠다. 끼이익. 버스가 급정거하는 소리에 책에 박혔던 고개를 뻣뻣이 세웠다.

 

 “어, 어? 아저씨! 저 여기서 내려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급하게 내뱉은 말을 끝으로 버스는 나를 큰 도로에 있는 정류장에 내려두고 떠났다. 한 손에 책을 움켜쥐고 집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쏜살같이 골목을 통과해 당도한 파란 대문을 벌컥 열었다. 곧장 시야에 들어오는 마당 딸린 기와집. 마루에 걸터앉아있던 수지 씨가 나를 보고 활짝 웃는다. 내 시선이 닿는 곳에 그녀가 있는 건지 그녀가 있는 곳에 내 시선이 닿는 건지 알 수 없게 됐다.

 

 “왔어요?”

 

 아득한 행복이 밀려왔다. 갑자기 할머니한테 고맙고 미안하다. 수지 씨를 만날 수 있게 만든 그녀의 아버지 편지를 대신 받아주어 고맙고 할머니만큼, 어쩌면 할머니보다 더 그녀가 소중해져 미안하다. 하지만 할머니도 이해하겠지. 처음으로 되돌아가 이름 모를 편지에 답장을 한 나까지 소중하게 만든 수지 씨니까. 나와 당신 모두 사랑할 수 있는, 사랑받을 자격 있는 사람으로 믿게 만들어준 사람이니까.

 

 

 ***

 

 

 수지 ver.

 

 

 마지막 날이래도 어제와 별다를 바 없는 하루를 보냈다. 새벽부터 시장에 채소를 팔러 다녀오신 할머니는 끼니는 절대 굶어선 안 된다며 아침에도 점심에도 맛있는 밥을 챙겨주셨다. 나도 도우려 했지만 손님한테는 일 시키는 거 아니라며 극구 말리시는 바람에 부엌엔 얼씬도 하지 못했다.

 

 여느 때처럼 할머니의 손맛이 듬뿍 담긴 밥은 맛있고 날씨는 청명했으며 한가로울 만큼 여유로웠다. 단 오전 중엔 지민 씨가 없어서 조금 심심하긴 했다. 나도 모르게 그가 돌아올 시간을 자꾸 확인하고 있었달까. 거의 10분에 한 번씩 안방 벽에 걸린 옛날 시계를 돌아보는 나를 발견하고 얼굴을 붉혔다. 반사적으로 머리께로 손을 올려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당장이라도 지민 씨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좋아해요. 진짜…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졸음에 겨워 몽롱한 정신 틈을 비집고 들어왔던 그의 말이 꿈결같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왠지 그 말은 서글프게 들리기도 했다. 행복에 겨워 슬픈 목소리였다. 나는 눈을 감고 있던 그 짧은 순간 동안 빗소리에 섞여든 그의 숨소리와 소중하게 더듬는 듯한 느낌이 드는 단어 한마디 한마디를 음미했다.

 

 '…걱정하지 마요. 전해졌을 거예요.'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지민 씨도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닌 거 같았다.

 전해졌을까요? 못다 한 이야기가, 살아가던 시간을 따라잡지 못했던 진심이, 마주친 그 두 눈에 비친 나의 마음이.

 

 “수지 씨! 나, 합격했어요!”

 

 조금이라도 지민 씨를 더 일찍 보고 싶어 일부러 미리 나가 마루에 앉아있던 나는 덜컹 대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고 이내 환하게 웃었다. 지민 씨는 어딘가 상기된 얼굴로 어깨 한 쪽에서 반쯤 흘러내린 가방을 추스를 생각도 않고 한 손에 내가 건네주었던 책을 든 채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미소를 거두고 영문을 모를 눈으로 지민 씨를 쳐다봤지만 곧 그 뜻을 알아채고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아! 수시 말이죠? 진짜 합격했어요?”

 “사실 기대 안 하고 있었는데 아까 확인해보니 합격했더라구요. 물론 아직 남은 게 많지만….”

 “잘 됐다! 결국 진학하기로 결정한 거예요?”

 “네…. 그동안 수지 씨랑 얘기 많이 했잖아요. 나, 더 배워서 쭉 그림 그리고 싶어요.”

 

 대학을 가던 안 가던 나는 언제까지나 지민 씨의 그림을 보고 싶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살든 그가 그린 그림을 보지 못한다면 너무 아쉬울 거 같다고 한편으론 슬플 거 같다고 말이다. 괜히 내 이런 말이 지민 씨에게 부담이 될까 그의 고민에 대한 답변 하나하나 한없이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씩 웃는 그 얼굴에 나도 덩달아 환히 웃음을 담았다. 서로 한참을 웃으며 마주 보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질 즘 부엌 저편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놓고 거서 뭐 하노? 퍼뜩 상이나 내놔라!”

 

 그 외침에 놀란 우리 둘은 동시에 깜짝 어깨를 들썩였다가 좀 전과 달리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밥, 밥 먹을까요? 하하. 후다닥 신발을 벗고 먼저 안으로 들어가는 지민 씨의 동글한 뒷머리가 어째 붉게 물든듯한 착각이 들었다. 후다닥 부엌에 들어갔던 지민 씨는 곧 저녁거리가 담긴 상을 마루로 들고 왔다. 그 뒤를 보리차가 담긴 물병을 들고 따라 나오시는 할머니다. 어느새 익숙해진 풍경이다. 해가 질랑 말랑하는 저녁 시간대. 지민 씨가 돌아오면 이렇게 마루에 상을 펴고 앉아 모여 밥을 먹는 것이.

 

 “아가, 차린 건 없지마는 괜히 가다가 배곯지 말고 든든하게 무라.”

 “차린 게 없기는요, 진수성찬인데요? 매번 이렇게 챙겨주셔서 고맙습니다 할머니. 감사히 잘 먹을게요.”

 “할매, 이게 어디 차린 게 없어! 나 들고 오다 허리 부러지는 줄 알았다고―”

 “그래서 싫나?”

 “아니~ 완전 좋지.”

 

 상다리가 휘어질 것 같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보다. 갖가지 기본 반찬은 물론 불고기와 잡채, 오징어무침까지 보인다. 국은 첫째 날에 처음으로 다 같이 먹었던 것처럼 김치찌개다. 나는 수저를 들어 찌개를 한 입 맛보고선 감탄을 흘렸다. 나름 김치찌개는 자신 있었는데 첫날 내가 만든 것보다 배로 맛있는 거 같다. 역시 할머니 솜씨. 마루에 앉아 저녁상 너머 소소한 이야기 거리들이 오고 갔다. 지민 씨는 할머니께도 대학 수시 합격 소식을 전했고 할머니는 무척 좋아하시며 지민 씨의 등을 쓰다듬어주셨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가슴 깊이 따뜻함을 느꼈다. 달그락달그락 그릇에 수저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서서히 해가 지니 쌀쌀하리 마치 차가워진 바람이 담장을 넘어왔다.

 

 배가 터질 것 같았지만 후식으로 사과까지 먹고서야 우리의 마지막 저녁 식사는 끝이 났다. 뒷정리까지 도우고 나자 정말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다. 방에서 괜히 빠뜨린 건 없나 가방을 세 번이나 풀어헤치고서야 더 지체할 수 없단 걸 알고 짐을 챙겨 나왔다.

 

 “가나 이제?”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일주일이지만 손녀처럼 대해주셔서 얼마나 편하게 있다 가는지 몰라요.”

 “다음번에 그 양반 보러 내려오면 또 찾아온나. 얼마든지 묵어도 좋으니께.”

 “네에….”

 

 왠지 코끝이 찡하다. 밭일을 하시느라 까맣게 그을린 주름진 손으로 내 두 손을 포개 잡으신 할머니가 다정한 목소리로 배웅을 해주셨다.

 

 “솜아, 누나 갈게. 으구―”

 

 할머니와 인사를 하는 내내 내 다리 사이를 맴돌던 솜이 앞에 쭈그려앉아 귀 뒤를 긁어주었다. 낑낑. 내 손등을 할짝거리는 솜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솜이 너도 아쉽구나. 나도 아쉬운데.

 

 “으차, 저 그만 가보겠습니다. …지민 씨?”

 “네, 에? 네?”

 

 어쩐지 내내 아무 말이 없던 지민 씨를 부르자 화들짝 놀란 멍한 얼굴이 나와 할머니를 번갈아 본다. 그러다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는데 한참을 왜 그러나 그의 모습을 눈여겨보다 깨닫고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배, 배웅해줄게요!!”

 

 별안간 지민 씨가 소리를 지르다시피 외친 그 한마디에 풋 웃음이 터졌다. 그렇구나. 지민 씨도 아쉬웠구나. 나는 간신히 웃음기를 감추고 그래주면 고맙죠. 하고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마당을 둘러보고 할머니께 꾸벅 인사를 드린 후 대문을 나섰다. 떠날 땐 등에 멘 배낭이 전부다. 곧장 뒤따라 나온 지민 씨가 내 옆에 나란히 붙어선다. 골목에도 사방이 바다 내음으로 가득했다. 말없이 따라 걷던 지민 씨가 문득 걸음을 늦추며 물었다.

 

 “바다, 보고 갈래요? 아직 시간 괜찮으면….”

 

 좀 전까지 머리를 긁적이던 손이 이번엔 목덜미 주변을 맴돌고 있다. 버릇인가. 발갛게 달아오른 귀와 가만히 둘 줄 모르는 손가락이 사랑스럽다. 나는 그런 지민 씨를 빤히 올려다보다 두어 번 가볍게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이곳과 바다는 너무도 가까워 마치 바다에 둘러싸인 섬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외딴섬에 떨어져 세상의 어둠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무언가. 시원한 바다바람이 온몸을 스쳤다. 어느덧 한층 차가워져버린 시월의 공기다.

 

 몇 분 가량 지민 씨와 나는 말없이 바다를 내다보았다. 얼룩덜룩 붉게 물든 하늘엔 하루 종일 구름 한 점 없다. 이내 그 불편하지 않은 침묵을 깬 건 나였다.

 

 “아쉽죠?”

 “……티 나요?”

 “엄청―.”

 “솔직히, 음… 네, 아쉽네요. 수지 씨랑 지내는 내내 저 진짜, 좋았거든요. 오늘은 오늘로서 쿨하게 인사하고 보내자 마음먹었는데 내일이 안 올까 봐 아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지민 씨가 내 앞에서 불현듯 약한 모습을 드러내자 그에 대한 애정이 왈칵 치솟았다면 과연 믿을까. 그 감정은 속부터 찬찬히 퍼져 걷잡을 수 없게 나를 뒤덮었다. 끝은 늘 놀랍고 아쉽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났나 새삼 뒤를 돌아보고 이런 날이 또 오긴 할까 걱정스레 앞을 내다보게 된다. 아까까지 그런 생각을 했던 나는 뒤늦게야 오늘의 나는 안중에도 없어 하는 걸 깨닫고 씁쓸하게 웃었다. 어제와 내일 때문에 오늘을 외면한다니 그것참 안타깝다. 지민 씨도 아까의 나와 같은 심정인가 보다.

 

 “나도 아쉬워요. 우리가 또 언제 이렇게 만날지도 모르고…, 스쳐갈 인연일지도 모르죠. 그렇다고 해서 가식으로나 허투루 흘려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아무리 스쳐갈 인연일지언정 끝까지 진심으로 대한다면 뭔가 바뀌어있지 않을까요?”

 “하아아….”

 “응? 왜 그래요?”

 “몰라요…. 저도 모르게 긴장했나 봐요. 붙잡는 것처럼 보일까 봐….”

 “으음, 붙잡아도 뭐라 안 하는데.”

 “어어, 농담이래도 그런 말 하지 마요. 진짜 붙잡을지도 몰라요 나! 그래도 수지 씨 말 들으니까 한시름 놓인다.”

 “어떤 부분에서요?”

 “스쳐갈 인연은 아닐 거라는 확신? 진심으로 대한다면 뭔가 바뀌어있을지도 모른다면서요. 그럼 나는 수지 씨한테만큼은 뼛속까지 진심이었으니까 그걸로 안심!”

 

 내 말이 끝나자마자 길게 한숨을 쉬며 풀썩 쭈그려앉은 지민 씨가 나를 힐끗 올려다보며 그제야 말갛게 웃어주었다. 푸하하. 참을 수 없어서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근 몇 달간 웃었던 걸 합친 것보다 요 근래 일주일 사이에 웃은 일이 훨씬 많은 것 같다. 그게 다 지민 씨 덕이다.

 

 “근데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그 책은 왜 들고 나왔어요?”

 

 대문을 나서던 순간부터 지민 씨의 왼손을 떠나지 않은 책 한 권. 내가 그것을 인식시켜줬는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제 손을 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지민 씨다.

 

 “이 책 학교에서 다 읽었어요! 칭찬해줘요.”

 “와, 반나절만에요? 잘, 잘했어요.”

 “히―. 수지 씨가 이 책을 통해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알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독서랑 친해져보려고 고생 좀 했지요. 자요, 돌려줄게요.”

 “어? 나 이거 지민 씨한테 준 건데….”

 “반나절이지만 나도 한번 가졌잖아요. 나보단 수지 씨한테 더 위로가 되는 책 같아서요. 앞장에 그림 하나 그렸는데, 아아 지금 보지 말구요! 돌아갈 때 버스에서 봐요 쑥스러우니까….”

 

 책을 받아들고 앞장을 보려 하자 한사코 손사래를 친 지민 씨가 책을 펼치려던 내 손을 잡아 덮었다. 그에 본인이 더 놀라 화들짝 한 걸음 물러난 건 못 본 척하기로 했다. 옆을 돌아보니 주홍빛으로 물들었던 해가 점차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고마웠어요. 고마워요. 내 편지 받아주고 이런 멋진 곳에서 신세 지게 해주고 본인 일처럼 걱정해주고 위해주고 또… 너무 많은데, 다 표현하기가 어렵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언제가 되더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탓인지. 지민 씨의 눈가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도 행복하게 보여서인지. 그의 미소 앞에 감히 눈물을 보일 수 없어서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슬프면서도 동시에 슬프지 않았다. 그건 한마디 말로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배웅은 여기까지면 충분해요.

 그래서 그저 그렇게 인사하고 어깨에 둘러멘 배낭끈을 고쳐잡은 후 품에는 지민 씨가 건네준 책을 안고 눈부시게 빛나는 바다를 떠났다. 모래사장을 막 벗어났을 때였나 뒤편에서 우렁차게 들려오는 외침 소리에 휙 고개를 돌렸다.

 

 “잘 가요! 우리, 또 볼 수 있는 거죠?”

 

 그 순간 확 세차게 불어온 바람 한 점에 머리칼이 나부꼈다. 그 목소리는 바람처럼, 파도처럼 내 온몸을 파고 들어와 곳곳을 넓게 적셨다. 저 멀리 힘차게 팔 벌려 손을 흔드는 그를 따라 나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우리, 꼭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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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7. 변함없는 세상 속에》 2018 / 12 / 20 226 0 9101   
7 《6. 보고 싶어요, 정말》 2018 / 12 / 18 249 0 9470   
6 《5. 흐르는 계절을 느낍니다》 2018 / 12 / 16 239 0 10882   
5 《4. 그대 없는 이곳에서》 2018 / 12 / 15 256 0 7164   
4 《3. 그리움이 사무치는 날엔》 2018 / 12 / 14 256 0 7331   
3 《2. 저는 괜찮습니다》 2018 / 12 / 13 236 0 4623   
2 《1. 혹 아픈 곳은 없는지》 2018 / 12 / 12 259 0 6872   
1 《프롤로그. 잘 지내나요?》 2018 / 12 / 12 432 0 3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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