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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너에게 나를 보낸다[To You From Me]
작가 : 해모
작품등록일 : 2018.12.12
너에게 나를 보낸다[To You From Me]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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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그가 느꼈을 불안.
내가 느꼈을 두려움.
동시에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음은 알지만 피부로 느끼지 못해 외로웠던 사랑.

부칠 수 없는 편지인걸 알면서도 뒤늦게 펜을 든 소녀와 초여름의 어느 날, 필시 주소가 잘못된 듯한 편지를 받은 소년. 서로 누구인지도 몰랐기에 주고 받을 수 있었던 두 사람의 사랑이 담긴 편지 속 이야기.

 
《은기 외전. 추신. 행복하길 바래》
작성일 : 18-12-31 23:59     조회 : 239     추천 : 0     분량 : 8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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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하필 또 막걸리 집이람. 막걸리가 싫다거나 파전이 싫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단순히 좌식이라는 점이 싫다.

 요즘에는 좌식 아닌 막걸리 집도 많던데 취향도 구수한 선배들 탓에 항상 학교 근처 단골 막걸리 집을 고집한다. 오늘도 마찬가지. 상 위에 주르륵 올라와 있는 각종 초록색, 갈색 술병들을 보자니 다른 술을 더 많이 마실 거면서 뭐 하러 막걸리 집에 왔나 싶다. 과 행사 뒤풀이로 행사에 주력으로 참여했던 동기 몇몇과 노는 거 좋아하는 복학생들 몇몇이 모여 상 서너 개를 차지하고 둘러앉아서 주거니 받거니 술판이 벌어졌다.

 

 ”야, 너는 생긴 건 한 가닥 하게 생겨놓고 은근 술 잘 빼더라.”

 “별로, 입에 안 맞아.”

 “그러지 말고 내가 고진감래주 말아줄게 마셔봐. 이거 콜라 섞여서 술술 들어간다―.”

 

 술술 같은 소리 한다. 됐다고 고개를 젓는 나는 아랑곳 않고 이미 신나서 제조에 들어간 김기준을 한심하게 노려보다 고개를 돌렸다. 바로 건너편에 앉아 있던 수지가 눈에 들어왔다. 피곤한가. 축 처진 어깨와 무표정한 얼굴이 신경 쓰였다. 술은 한 잔도 마시지 않은 것 같은데 힘들어 보인다. 남들이 보면 무표정해 보이는 저 얼굴이 수지의 가장 힘든 표정임을 알고 있다. 수지는 어딘가 힘든 일이 있으면 항상 저런 표정을 짓고 자신의 생각 속에 빨려 들어가 멍해있곤 했으니까.

 

 “…말해주면 좀 좋아.”

 

 이제 삼 개월쯤 지났나. 역시 아직 힘들겠지. 수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당시 수지는 학교에 있었다. 마지막 수업을 남겨뒀을 즘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었는데 수지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더니 굳은 얼굴로 학교 밖을 빠져나갔었다. 그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그 이후로 수지는 저런 표정을 더 자주 지었다. 우는 것도 아니고 웃는 것도 아닌. 가까스로 수지에게서 시선을 떼내고 김기준의 손에서 술잔을 뺏어들었다.

 

 “어때 맛있지?”

 “맛없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연거푸 맥주 두 잔을 마셨다. 속이 탄다. 말해주면 좀 좋아? 누가? 내가? 수지가? 뒤엉킨 의문들이 목에 걸렸다가 맥주와 함께 쓸려내려갔다. 맥주는 어느새 소주가 되고 술이 별로 세지 않은 나는 금세 취기가 올랐다. 흐려진 시야 사이로 다시 수지가 보였다. 술은 마시지 않지만 다른 동기들과 간간이 대화는 하고 있었다. 힘들면서도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는다. 어쩌면 혼자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사람들 틈 사이에 끼어있는 건지도 몰랐다. 옆에서 작작 마시라며 말리는 목소리가 서서히 아득해졌다.

 수지야, 내가 어쩌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네 그 굳은 표정의 껍질을 깰 수 있지.

 

 “자자, 아직 차 안 끊겼지? 숙사 통금 있는 애들은 먼저 들어가고. 쟤 서은기는 누가 데려다줄래?”

 “아오, 좀 똑바로 서봐 새끼야! 아, 제가 주소 아니까 이 자식은 제가 처리할게요.”

 

 왁자지껄한 사람들 목소리가 바람과 차 소리에 섞여 웅웅거리는 소음을 냈다. 바닥이 휘청인다. 아마도 김기준의 어깨에 빨래 널린 듯 기대서 술집 밖에 서있는 거 같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흐린 시야 사이로 수지를 찾았다. 과대 옆에 서서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간신히 입모양을 해석했다.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휘적거렸지만 술 취한 놈의 흐느적거림으로만 보였을 상 싶다. 괜찮아?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아, 아까 괜찮냐고 물어볼 걸 그랬다. 찬 바람을 맞았는데도 취기가 쉬이 가시질 않더니 어느덧 나는 택시 뒷좌석에 실려있었고 반쯤 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집 침대 위였다. 꿈벅꿈벅.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올려 바지 주머니에 잘 챙겨져 있는 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3시. 머리가 아프지도 속이 쓰리 지도 않다. 그런데 여전히 마음 한구석은 답답하다. 폰을 만지작거리다 수지의 번호를 찾았다. 자고, 있으려나. 아까 묻지 못한 말이 신경 쓰여 나는 결국 고민 끝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직 안 잤는지 깨끗한 음성이 넘어왔다.

 

 “미안, 지금 자?”

 - 아니 이제 자려고. 넌 자다가 깬 거야? 속은 괜찮고?

 “알다시피 숙취가 없는 타입이라 멀쩡. 아까 정신이 없어서. 잘 들어갔지? 아, 새벽에 갑자기 이런 거 물으니까 좀 웃긴다.”

 - 그래 보이더라. 평소엔 빼기만 하면서 웬일로 그렇게 마셨대?

 

 불도 켜지 않은 캄캄한 방 안 침대에 누워 건너편 네 목소리에 집중했다. 뭘 하는 건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종종 들렸다. 아까는 자꾸 속에 뭐가 걸린 것 같이 갑갑해서 뭐라도 먹어서 밀어내고 싶었다. 수지의 고요한 얼굴이 무척이나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네가 너무 힘들어하길래.”

 - …어? 뭐라고? 못 들었어.

 “아니야. 너무 늦었다고. 이제 주말인데 푹 자.”

 - 아,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너한테 문자 하려던 참인데 딱 전화가 왔네.

 

 결국 묻지 못했다. 괜찮냐고. 괜찮다고 대답할 너라는 걸 알지만 그 말이 조금이라도 힘이 될까 묻고 싶었다. 안 괜찮으면 기대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수지에게 더 부담이 될까 쉽사리 말할 수 없었다. 친구는 뭘까. 사랑은 또 뭐지. 그딴 거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수지의 곁에 있는 사람으로서 도움을 주고 싶다. 뭐가 이렇게 어려운 거야. 같이 볼펜을 사러 가자는 수지의 부탁에 옅게 웃었다. 아직 이른 건가. 수지와 가까워진 건 1년밖에 안 됐으니 어쩌면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3년 전에 김기준 여친을 통해서 수지를 알게 됐는데 알고 보니 같은 과였다. 친해진 건 언제 해도 거지 같은 조별 과제 때문이었고. 나랑 수지 빼고 다들 어찌나 무임승차하려고 갖은 변명을 다 대는지. 그때 둘이서 무임승차 한 애들은 모조리 이름을 빼자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었지. 그걸 계기로 수지와는 급격히 친해졌다. 성격이나 취향은 오히려 반대였지만 희한하게 수지와 나는 곧잘 대화를 이끌어나가곤 했다.

 

 “목소리는, 괜찮은데….”

 

 무언가 찜찜하다. 멀쩡한 목소리 너머로 어딘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다. 나한테도 말할 수 없는 게 있긴 하겠지. 누구나 비밀은 있는 거니까. 그래도 마음 한편에 씁쓸한 바람이 분다. 그건 내가 그녀에게 친구 그 이상을 바라고 있기 때문일까. 아닐까. 잘 모르겠다. 나는 너에게 뭘까. 답답하다. 가슴에 뭐가 얹힌 것 마냥 갑갑해서 아무리 한숨을 깊게 쉬어도 나아지질 않는다.

 

 “담배 때문인가. 빨리 끊든지 해야지."

 

 달아오른 폰을 끄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씻지도 않고 그대로 뻗다니 좀 마시긴 했나 보다. 그날 새벽은 술로도 뒤엉킨 속이 풀리지 않아 찬물을 뒤집어써야 했다.

 

 

 ***

 

 

 더운 바람이 분다. 얇은 셔츠를 입었다지만 그닥 통풍이 잘 되는 거 같진 않다. 눅눅하고 습한 바람. 그늘진 유리문 옆에 서서 아무것도 없는 주차장 아스팔트 바닥 위에 뜨겁게 내리쬐고 있는 햇빛을 내려다봤다. 풀 한 포기 심어져 있지 않은 삭막한 납골당. 저 유리문 안에 홀로 들어간 수지를 기다렸다. 같이 들어가진 않았다. 수지는 항상 혼자서 아버지를 뵈길 바랐으니까. 나는 딱 한 번, 수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며칠 뒤 그녀가 먼저 함께 가 달라 청했었다. 옆에 내가 있었기 때문인지 수지는 애써 담담한 척을 했었다. 그 모습이 보기 안타까워서라도 나는 더 이상 같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늘 오게 된 것도 이틀 전 수지가 먼저 같이 가 달라 부탁했기 때문이다. 어쩌고 있을까. 혼자인데도 애써 담담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까. 나는 결국 딱 하나 남은 담배를 입에 물어야 했다. 끊은지 이주는 됐는데 비상용으로 가지고 있던 돛대다. 후우. 긴 숨을 뱉자 탁한 연기가 뙤약볕 속으로 사라졌다.

 

 “뭐야, 끊었다더니?”

 “끊었지, 끊었는데…!”

 

 끼익. 유리문이 열리는 소리에 황급히 담배를 등 뒤로 감췄다. 아니나 다를까 수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수상한 눈초리를 보낸다. 아! 그 와중에 끄지 못한 꽁초 재가 손에 떨어져서 꼴사납게 비명을 질렀다. 나는 따가운 손을 털며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냐 물었다. 수지는 내가 앞에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진짜 아무렇지 않은 건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음, 아니? 거의 못 했어. 우리는 자연스레 뙤약볕 아래로 걸어 나갔다. 수지가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유난인 거 같지? 솔직히 같이 살았던 날보다 떨어져 지낸 날이 더 많잖아. 이제 와서 효녀 흉내 어설프게 낸다고 해도 나 할 말 없어.”

 “거 혼자 앞서나가지 좀 마라. 누가 그렇대?”

 “…그렇잖아.”

 “뭐, 꼭 옆에 붙어 있어야만 더 잘 보답해주는 건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통하는 사이란 게 있잖아.”

 

 말을 뱉고서도 괜한 말을 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수지는 내 말을 듣고 곧 바람 빠지는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을 뱉었다. 나는 단지 수지가 제가 하는 말에 저 자신이 상처받고 있는 듯이 보여서 그랬다. 효녀인지 아닌지 그게 뭐가 중요해. 아버지와 딸 그만큼 좋은 말이 또 어디 있겠냐고. 수지는 말이 없었다. 어딘가 머뭇거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이던 그녀는 결국 하려던 말은 숨기고 점심을 먹고 가자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녀가 숨기고 있던 말을 꺼낸 건 내가 아무 준비도 하고 있지 않은 무방비한 순간일 때였다. 수강 신청에 실패해서 이른 오전 강의를 10분 앞둔 시간에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졸음에 못 이겨 전공 책을 베개 삼던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수지가 작고 빠른 말로 입을 열었다.

 

 “나…, 한동안 어디 좀 다녀와야 할 거 같애. 혹시 학교도 며칠 안 나올 수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 아마 연락도 제때제때 못할 거야.”

 “어 뭐라고? 가? 어딜? 언제?”

 “나중에. …아빠, 만나러.”

 

 한달음에 졸음이 달아나는 게 느껴졌다. 수지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한참을 머리를 굴려야 했다. 더 묻고 싶었지만 더 묻기도 뭐 한 질문이라 괜히 부산스레 움직이는 수지를 쳐다만 보았다. 그로부터 이주 후, 수지는 정말 연락이 되질 않았다. 딱 일주일에 두 번 수업이 겹치는 날이었는데 그날 수지는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고 교양만 빠지나 싶었는데 아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는 걸 점심이 지나서야 알았다. 걱정스레 전화와 문자를 했지만 아무 답장도 받을 수 없었다. 점심을 다 먹은 후 식후땡을 하자는 김기준에게 담배 끊었다는 소리를 할 때였나 이주 전 지나가듯이 말했던 수지와의 짧은 대화가 생각난 건.

 

 “그게 오늘인가 보네….”

 

 수지와 내가 처음 납골당을 다녀갔을 때 그녀가 넌지시 말한 적이 있다. 이 납골당에 아버지를 모시고 싶지 않았다고. 아마 이제 다른 곳으로 옮길 결심이 섰나 보다. 일주일이면 금방 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주일이 이렇게 긴 시간이었던가. 짧은 가을이 이토록 길게 느껴질 일인가. 정말 아무 연락이 되질 않는 수지를 이해하는 한편 걱정이 됐다. 잘 도착은 한 건지 거기서도 혼자인 건 아닌지 이런저런 걱정으로 일주일은 마치 한 달 같이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수지가 연락이 되지 않은지 오일쯤 지나서였나. 저녁에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요즘 OT나 자잘한 술자리에 자주 참석했다. 술이 늘었다는 뜻이다. 반가운 수지의 전화를 받고 나는 괜스레 서운한 척 농담을 했다. 공기 좋고 물 좋으니까 내 생각은 하나도 안 났지? 그 말을 하며 시끄러운 술집 밖으로 나갔다. 한층 가까워진 수지의 음성이 들린다. 나는 머뭇거리다 한마디를 건넸다.

 

 “이제 괜찮아?”

 - 응, 괜찮아. 이번엔 확실해.

 

 목소리가 많이 밝아진 거 같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아니라, 괜히 담담한 듯이 말하는 게 아니라 진짜 괜찮은 목소리였다. 그에 여태껏 가슴을 갑갑하게 짓누르던 체중이 쑥 내려갔다. 희한한 일이었다.

 

 “그래, 괜찮으면 됐다. 빨리 오라곤 안 할게. 조심히 와.”

 

 역시 담담한 척하는 네 얼굴을 보는 게 마음 아팠던 모양이다. 보지 않아도 수지가 웃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녀는 겉으로 보기에 꽤 조용한 편이지만 그래도 밝고 활기찬 사람이라 항상 잘 웃곤 했다. 그런데 사고가 있고 나서부터는 통 웃지를 않아 아니 웃지만 않으면 다행이게 억지웃음을 짓는 날이 많았었다. 제 딴에는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그런 거겠지만 그게 지켜보는 사람을 더 걱정스럽게 한다는 걸 알려나 모르겠다. 나에게는 무척이나 길었지만 그 짧은 며칠 사이에 수지는 자신이 행복해질 방법을 찾은 것 같았다. 그렇게 나머지 이틀을 남겨놓고 다시 연락이 되지 않았어도 나는 더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다. 본인이 괜찮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또, 그게 정말 괜찮은 목소리였으니까.

 드르륵, 강의실 문을 열었다. 대충 자리를 찾아 앉아 책상에 가방을 올려놓는데 툭툭 누군가 내 어깨를 치는 게 느껴져 무심코 돌아본 곳에 수지가 있었다. 근래 본 적 없던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가.

 

 “야, 너…! 언제…?”

 “어제 왔지. 어쩌다 보니 하루 더 늦게 왔지만. 되게 오랜만인 것 같다 반갑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대체. 묻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많았는데 나는 묻기보다 들어주는 걸 택했다. 묻지 않아도 수지가 어련히 말해줄 것이다. 밝은 모습과 편안한 얼굴로 인사를 건넨 수지는 수업이 끝나길 기다렸단 듯이 나를 끌고 학교 근처 카페로 향했다. 그리고 지난 일주일 간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더불어 사고가 있은 후로도 계속 아버지에게 혼자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도. 예상은 했지만 겉으로 보는 것보다 수지의 입으로 직접 듣는 지난 시간이 훨씬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가기를 잘한 거 같아. 용기 내기 잘 했어. 아마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나 절대 그렇게까지 못 했을 거야.”

 “…좋은 사람이네. 다행이다.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궁금하네.”

 

 그리고 새로운 인연을 만났다는 얘기를 조금 가슴 쓰리게 들어야 했다. 하지만 마음 한 편으론 기뻤다. 내가 어떻게 해주지 못했던 그녀의 슬픔을 그 사람이 함께 보냈다 생각하니 그래서 이렇게 밝은 모습을 되찾은 너를 보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네가 이렇게 말해줘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나는 계속 네가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거 같거든. 희한하게도 수지는 그곳에서 돌아온 후로 다시 내려가질 않았다. 왜 다시 가지 않느냐 물었을 때 수지는 이렇게 말했다.

 

 “딱 일주일이었어. 꿈은 간직해야지.”

 

 알 수 없는 소리만 하는 수지를 이상하게 봤지만 겨울이 오고 새해가 다가온 날 수지는 다시 한번 그곳에 내려가는 듯했다. 완전히 아버지를 보내주기 위해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이라 했다. 정작 그 사람은 만나지 않은 것 같았다. 좋아하는 거 같은데 왜지. 종종 그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곤 하는 그녀가 떠올라 나는 의아하기만 했다.

 또 그런 나를 의아하게 보는 놈도 있었다.

 

 “왜 고백 안 하냐? 확 사귀자고 해버려. 남친도 없잖아 한수지.”

 “뭐래. 남친 없다고 내가 남친이 된다냐?”

 “오올―, 되고 싶기는 한가 보지?”

 “닥쳐.“

 

 새해가 왔다. 해는 새로운데 겨울은 현재진행형. 아마 내 마음도, 현재진행형. 희망을 가질 법도 하지만 나는 이미 접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수지에 대한 감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이거 하나 일방통행인 내 마음은 접어두어야 한다. 이유는 첫째, 수지가 나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눈에 뻔히 보였고 둘째, 수지는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김기준은 사랑은 타이밍이라며 네가 꾸물거리다 놓친 거라 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수지를 소중히 생각하지만 수지도 나를 소중히 생각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 의미가 연인으로서의 사랑이 아닐뿐이지 나는 분명 또 다른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 또 그 사랑을 버리면서까지 모험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 그게 내 결정이다.

 

 “벌써 4학년이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그러니까. 엊그제 신입생이었던 거 같은데.”

 “저기, 새내기들인가 보네. 이야 다들 동아리 홍보하느라 바쁘다 바빠.”

 “…너 학생회잖아?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돼?”

 “안 되지. 아 씨, 내가 이래서 입부하기 싫었는데…. 먼저 간다. 수업 끝나면 전화해. 점심에 학식이나 같이 먹자.”

 

 캠퍼스 입구에서부터 열렬히 동아리 홍보를 하는 재학생들과 그 옆을 우르르 지나다니는 새내기들 틈으로 끼어들자니 저절로 썩은 얼굴이 됐다. 2학년 때 뭣 모르고 학생회 들었다가 이게 뭔 꼴이야. 수지를 보내고 무리 근처로 다가갔다. 얼씨구, 이미 순진해 보이는 새내기 한 명이 딱 걸려있다. 새로운 희생양인가.

 

 “저기, 저는 그냥 미술과 건물이 어디인지….”

 

 까맣고 단정한 생머리에 유순한 눈매를 한 남자가 학생회의 악의 손길에 붙잡혀 쩔쩔매고 있었다. 그게 퍽 불쌍해 보여 가까이 다가가 붙잡혀 있는 남자를 끌어당기며 말을 붙였다.

 

 “미술과라면 저기 연못 끼고 왼편으로 돌아가면 있어.”

 “아! 감사합니다. 진짜 복받으실 거예요!”

 “…복까지야.”

 

 정말 살았다는 표정을 하고 쳐다보길래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복까지야. 그 남자 새내기는 웃는 얼굴로 내게 감사하다 인사하더니 황급히 호수가 있는 쪽으로 뛰다시피 걸어갔다. 가만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왜 낯이 익지?

 

 '그 사람 웃는 거 보면 나까지 환해지는 기분이야. 뭔지 알아? 웃는 게 깨끗하다고 해야 하나. 아, 사진 보여줄까? 그때 같이 찍은 사진 있는데.'

 

 갑자기 수지가 한 말이 기억났다. 언제 사진까지 찍었던 건지 폰을 들어 한참을 뒤적거리던 수지가 보여준 폰 화면이. 한 장의 폰 사진 속엔 오래된 시골집 마루에 앉아 바다를 배경으로 한 채 셀카를 찍었는지 어떤 할머니와 남자애 그리고 수지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담겨있었다. 설마. 방금 남자 새내기가 사라진 곳을 돌아봤다. 이미 저만치 호수 가까이 가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지금쯤 시간이 남은 수지도 종종 산책하는 연못 근처에 있을지도 몰랐다.

 

 “허어, 아무래도 나 좀 복받을 거 같다.”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한 번이라도 고백할 걸 하는 욕심도 들었지만 저 남자 새내기 얘기를 할 때면 환하게 밝아지는 수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있잖아. 그냥 지나쳐도 상관없는데 끝으로 적어는 볼게. 좋아해. 하지만 이건 굳이 몰라도 될 말이야. 몰라도 될 마음이지. 그러니 말하지 않고 내 마음 끝자락에 적어보는 거야. 그래도 이거는 꼭 알아주라. 너는 나한테 정말 소중한 사람이고 친구, 연인 같은 세상 모든 관계를 다 떠나서 사람 대 사람으로 네가 행복했으면 한다는 걸.

 

 
작가의 말
 

 회차마다 딸려있는 부제를 이으면 문장이, 하나의 편지가 완성돼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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