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이름 모를 당신에게
안녕하세요. 어쩐지 인사가 느닷없게 느껴지네요. 아마 이 편지를 받고 많이 당황하셨을 거라 생각해요. 물론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그러니까, 답장이 올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지금도 손이 떨려서 글씨가 예쁘게 나오질 않네요. 아주 오랜만에, 실은 난생처음으로 아빠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편지를 쓰게 됐어요. 여태 아빠 외에 편지를 주고받은 적은 친구의 생일날 정도 밖에 없었으니까요.
이 편지에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이대로 모른 척하기엔 신경이 쓰여서요. 그저 작은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고마워요. 비록 이름도 모르지만 당신은 정말 마음씨가 상냥하군요. 많은 위로가 됐어요. 읽고 나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하하. 아빠도 그렇게 말했을 거란 생각이 드니까 더 울컥하더라구요. 역시, 제가 괜한 걱정을 하고 있나 보다 싶어서요. 아, 제 개인적인 말이 너무 길었죠? 다시 한번 고맙다고 말할게요. 하지만 이 편지에 답장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더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거든요. 당신이 보낸 편지는 앞으로도 소중히 간직할 것 같아요. 그럼.
PS. 같이 동봉한 그림이 혹시 직접 그린 그림인가요? 실제로 제 눈앞에 아빠가 동고동락했던 바다가 펼쳐져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미술 전공은 아니지만 한눈에 보아도 무척 어여쁜 그림이라는 게 느껴졌어요.
2017년 6월 26일.
From. 한 수지
바삐 움직이던 펜을 살며시 놓았다. 혹시 틀린 글자는 없는지 이상한 말은 없는지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았고 짧은 편지가 썩 만족스럽진 않지만 그 상태 그대로 봉투에 밀봉했다. 책상 한구석에 다 쓴 편지를 밀어 넣고 책꽂이에 끼워두었던 일주일 전 편지를 다시금 꺼내들었다. 깨끗한 흰 봉투가 내가 쓴 편지에 비해 참 밋밋했다. 마치 정말로 아빠가 살아생전 보낸 편지처럼. 엽서만 한 그림이 반으로 접혀있는 게 퍽 아깝게 느껴졌다. 파스텔 톤의 어여쁜 선들이 저들끼리 얽혀있는 게 참 예쁜 바다 그림이었다. 스타일만 봐서는 여성스러운 그림체였는데 섣불리 판단하기엔 일렀다. 상대가 누가 됐든 간에 정말 상냥한 사람이라는 게 편지의 답장을 받고서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피실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보고 싶다….”
그리움이 사무쳤다. 이 그림의 배경이 된 바다도, 실제로 보고 싶어졌다. 마지막이라고 단정 지은 편지를 쓰고서 나는 미련을 깨끗이 비우려 부단히도 애를 썼다. 혹 내가 쓴 편지를 누군가 받고 있었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황당할까 싶었고 괜한 피해를 주는 거 같아 편지를 쓰는 무의미한 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이런다고 이 세상에 없는 아빠가 알아줄지 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주일동안 망설이다 편지를 보내버리고서 허탈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오죽하면 은기가 왜 그렇게 기운이 없냐며 걱정했을 정도니까. 미련. 후회. 자괴감. 욕심. 내내 편지를 써오던, 그리움이 담긴 내 마음이 마냥 예쁜 모양은 아닐 거란 걸 안다. 그게 타인에게도 보였을 거다. 맞아, 참 우스운 일이라고.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나는 나를 비웃었다. 그래, 다 부질없다. 고 생각했었다. 며칠 뒤 내 앞으로 온 편지를 읽기 전까진.
To. 딸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마렴.
항상 끼니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먹고.
언제든지 편지해. 기다리고 있으마.
2017년 6월 19일.
From. 사랑하는 아빠가
머리말에 적힌 단 한 글자에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고작 세 문장에 나는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책상 앞에 주저앉아 편지를 부여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실제로 아빠가 보냈을 거란 말도 안 되는 환상은 물론 품지 않았지만 그 예상치 못한 답장으로 인해 여태 아빠와 소원했던 지난날의 관계를 모두 용서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 간단히 후회를 씻을 수야 없겠지만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그 후회를 품고 살겠지만, 그 답장은 분명 내게 위로가 됐다. 아빠를 대변한 이름 모를 그 사람으로 인해 그제야 숨을 트일 수 있게 됐다.
'엄마,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기억을 못하는 것도 아니면서 엄마에게 그리 물었던 이유는 내가 없는 곳에서의 아빠도 여전히 내가 아는 아빠인지가 궁금해서였다. 그는 내게 있어 언제나 아빠였다. 어느 날 문득 아빠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그의 삶이 궁금했었다. 여덟 살 때부터 떨어져 살았으니 내가 아는 그마저도 아득하게만 보였다. 떨어져 살아야 하는 생활도 아빠가 기억에서 흐릿해지는 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엄마는 어른이었고 겉으로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그래서 어렸던 나는 엄마가 혼자서도 괜찮은 줄로만 알았다. 전혀 보고 싶어 하는 티를 내지 않았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거기서 생각을 그쳤다.
'우리 수지, 왜 아빠 보고 싶어?'
'응, 아빠는 왜 집에 안 와? 아님 우리가 보러 가면 안 돼?'
하지만 아니었다. 엄마도 엄마이기 전에 여자였다. 나는 언젠가 엄마가 방 한구석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손마디로 눈가를 훔치는 걸 엿보았다. 어렸지만 그 상황에서 엄마에게 아는 척을 해서는 안된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통화 상대는 아무래도 내겐 할머니인 엄마의 엄마였던 듯싶다. 나와 눈높이를 맞추며 어째선지 측은한 눈빛을 띠던 엄마는 다정스레 내 어린 이마에 흘러내린 잔머리를 넘겨주며 천천히 말했다.
'아빠는 엄마랑 우리 수지 맛있는 거 먹고 예쁜 옷 입고 부족함 없이 공부시키려고 먼 데서 열심히 일하고 계셔. 아빠는 항상 어느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어. 엄마가 그 모습에 반했잖아.'
그래도 이러다 아빠 얼굴 까먹으면 어떡해? 하고 말하던 나는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그 때묻지 않은 순수한 말에 엄마가 상처 입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까맣게 못하고.
그가 지고지순한 사람이란 것 정도는 편지를 주고받는 날마다 알 수 있었다. 언제나 진심이 느껴지던 그 편지에 나는 고작 그따위 답장밖에 할 수 없었던 걸까. 지고지순한 사람. 사랑. 애정. 전부 느낄 수 있었는데도 나는 어째서 그의 반만큼도 보여주지 못했던 걸까. 그리움은 아쉬움을 남긴다. 아쉬움은 곧 미련을 남기고 미련은 끝내 집착이 된다. 아마도 나는, 그렇게 착하고 좋은 딸은 아니지 않았나 싶다. 그리움이 사무치는 날이다. 잊지 않으려 계속해서 떠올리고 곱씹었던 아빠의 얼굴이 아련히 떠올랐다. 그마저도 10년 전의 모습으로.
“답장은, 당연히 안 오겠지…?”
내가 굳이 답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면서 왠지 기대하게 되는 이 마음은 뭘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이토록 예쁜 그림을 담아내는 그분은, 어떤 사람일까.
그 어린 날 아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해하던 내 모습이 두둥실 머릿속을 맴돌았다.
***
지민 ver.
“아 좀, 저리 가라고―.”
“왜 뭔데! 나도 좀 보자아.”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얘는 왜 자꾸 난리야. 별로 친하지도 않으면서 정호원 얘는 오늘따라 왜 이리 엉겨 붙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녀석은 자기 아니면 내가 어울릴 친구도 없다고 말하지만 말이다.
“야 저기 고릴라 온다!”
“어디?!”
선생님을 지칭하는 별명을 덜컥 부르며 앞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화들짝 놀라 고갤 돌리는 꼴이 우습다. 나는 재빨리 손에 쥐고 있던 아직 뜯지 않은 소라색 편지봉투를 책상 서랍에 넣었다. 시험 기간인지라 평소보다 당겨진 등교 시간에 오만상을 찌푸리며 새벽부터 읍내로 나갔을 때였다. 이제 여름이라고 해가 길어져 6시쯤에도 밖이 환했다. 아침의 찬 공기를 느끼며 하품을 늘어놓는데 오늘도 눈짓으로만 살펴본 우체통에 낯익은 소라색 편지가 있어 고민하다 학교까지 들고 와버렸다. 언제부턴가 자연스레 우체통을 살피는 버릇이 생겼더랬다. 안 그래도 엄청 후회 중이다. 시험기간이라 아무도 주의를 두지 않을 거라 생각한 내 판단 착오. 저 오지라퍼놈을 미처 생각 못했다.
“아 씨, 없잖아 죽을래?”
“됐고 시험공부나 해. 반 조용한 거 안 보여?”
“그럼 지는 러브레터나 뜯어보고 있는 주제에―.”
“야! …그런 거 아니거든?”
“아니기는, 딱 색깔이 여자가 보낸 거구만.”
아직 1교시 시작 15분 전, 조용하기만 한 교실에서 목소리를 높였다가 황급히 소리를 죽였다. 그 와중에 괜히 얼굴을 붉혔다가 정호원의 의심만 더 사는 중이다. 나름 공부하는 시늉이라도 해보려 책상에 올려둔 교과서는 실상 깨끗하기만 하다. 그 속에서 편지를 까보려 했지만 결과는 대실패다. 너, 공부 안 하냐? 괜한 질문이었다. 어깨를 으쓱이는 정호원의 책상을 곁눈질하니 책은커녕 그 흔한 샤프 한 자루도 보이질 않는다. 드르륵. 교실 앞문이 열리며 선생님이 들어왔다. 그제야 정호원이 입을 합 다문다. 얍삽한 놈. 이윽고 1교시가 시작되고 나는 그 후로도 함부로 편지를 꺼내 읽지 않았다. 혹시나 걸려서 뺏길 확률도 있고 가장 큰 이유는 옆에서 깝죽대는 녀석이 제일 컸다. 그 후로도 계속 러브레터니 어쩌니 하도 건드리는 통에 편지를 읽을 만한 정신도 없었다.
평소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학교를 째는 날만 빼면 수업은 그런대로 열심히 들으려 노력 중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 학교를 무단으로 빠지는 날이 있다.
괜한 사춘기 반항으로 할머니 뒷목 잡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서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교복을 입고 잘 등교를 하러 가다가도 풍경 앞에 멈춰 서 나도 몰래 그림을 그리다가 시간을 뺏기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각도 번번하다. 며칠 전엔 편지를 기다린다고 아예 나가지도 않았지만. 굳이 대학 같은 거 가야 하나 싶어서 수능도 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뭐 이미 출석에 꽤나 빵구났겠지만 선생님이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내 편의를 봐주고 있는 것도 조금 작용하고 있다.
“야자는 째고 바로 집?”
“째긴 뭘 째 어차피 선택제잖아.”
“그건 학원 다니는 애들 한정이지.”
“언제부터 꼬박꼬박 야자했다고.”
“눼눼. 야, 나 너네 집 놀러가도 되냐?”
“…고삼 맞아? 안돼.”
종례 후 대충 가방을 둘러매는 내 어깨를 잡아채며 뻔한 걸 묻는 정호원이었다. 이제 집에 강아지도 같이 살게 된 탓에 저녁을 챙겨주려면 빨리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정호원 말마따나 학원을 다니는 건 아니다. 할머니 집까지 돌아갈 버스가 많지 않아서 애당초 야자는 할 수 없었던 거지. 분명 텅텅 비어 깃털 버금가게 가벼울게 뻔한 가방을 손에 달랑 들고서 집에 놀러 가도 되냐는 망발을 주절대는 녀석. 망설일 것도 없이 딱 잘라 거절했다.
맞다, 할머니 집에 없다 그랬지? 에이 너네 할머니가 해주신 닭도리탕 죽여줬는데.
…결국 목적이 그거냐.
저가 외로움을 달래주겠다느니 뭐니 하면서 연신 시끄럽게 구는 정호원과 투닥대다 보니 어느새 교문을 벗어나고 있었다.
“아!”
“뭐, 왜?”
“너 때문에 두고 왔잖아 아 씨….”
괜히 저 녀석한테 휩쓸려서 뒤늦게 책상 서랍에 두고 온 편지가 생각났다. 하마터면 그대로 집까지 가버릴 뻔했다. 정호원에겐 알아서 가버리라며 손을 휘저었고 툴툴대는 녀석을 무시한 채 나 홀로 교문을 반대로 지나쳐 올라갔다. 야자 전에 석식을 먹을 시간이라 다 급식실로 내려갔는지 교실엔 사람이 없었다.
해는 주홍빛으로 저물어가는데 학교는 아직 어둡다. 조금 있다 야자가 시작되면 하나둘씩 불빛이 켜지겠지. 편지만 꺼내가려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슬몃 주변 눈치를 보다 그 자리에서 조심스레 편지를 펼쳤다.
“…나한테 썼잖아?”
내용은 예상 밖이었다. 전에 보내온 게 마지막 편지라고 쓰여있긴 했지만 내가 보낸 답장 후로 이번에 편지가 온 걸 보고 다시 쓰기로 결심했나 보다 했는데 편지는 아빠에게 쓴 내용이 아니었다. 편지를 뒤집자 받는 이에 한 종철이란 이름이 쓰여있지 않았다. 보내는 이와 주소만 쓰여있었다. 이름 모를 당신에게. 내게 보낸 편지다. 나는 선 채로 순식간에 편지를 읽었다. 그녀는 내게 연신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상냥한 사람. 좋은 분. 어째 나와는 거리가 먼 얘기라고만 생각했던 단어들이 훅 가깝게 느껴졌다.
다행히 쓸데없는 동정으로 읽히진 않았나 보다.
“다행이다.”
살포시 미소 지었다. 위로를 받았다니 그거 참 잘 된 일이다. 교실 창문 너머로 고즈넉한 석양이 쏟아져 교실을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편지에서 시선을 떼고 창밖을 내다봤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가방을 툭하니 정호원 자리에 올려두고 서랍을 뒤져 노트와 연필을 꺼냈다. 그 자리에서 바로 교실 안으로 들어오는 석양의 풍경을 그렸다. 뒷장에 답장도 썼다. 이제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건 그녀의 아빠를 대변한 편지였던 거다. 이건 온전히 나로서 보내는 편지다. 그녀가 제 아버지가 아닌 내 앞으로 편지를 보낸 것처럼. 노트의 한바닥을 찢어 쓴 편지가 나란 사람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To. 수지
안녕하세요! 정식으로 인사부터 하자니 좀 기분이 이상하고 그러네요 그쵸? 제가 또 답장을 보냈다고 부담 갖지 마세요. 보다시피 겨우 종이 쪼가리 한 장에 글자 몇 자 얹었을 뿐이니까요. 또, 전편지에 담긴 건 제가 아니기도 했고. 일단 여태 몰래 편지를 봐서 죄송해요. 괜한 오해는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지금 학교를 마치고 빈 교실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아, 맞아요. 전 이번에 수능을 앞둔 고삼이지만 공부보단 그림 그리는 게 더 좋은 흔하디 흔한 남고딩이에요. 묻지도 않은 말까지 주절대자니 막 정호원이 된 기분이네요. 그냥 별로 친하지도 않은 되게 때려주고 싶은 녀석 있어요. 궁금해하진 마세요. 제가 상냥하다느니 좋은 사람이라느니 하는 말은 태어나서 할머니 이후론 처음 듣는 말이라 솔직히 수지 씨의 편지를 읽는 내내 기분이 좀 이상했어요. 갑자기 이름을 불러서 불편하시다면 죄송해요. 마땅한 호칭을 못 찾겠어서.
저는, 그러니까, 수지 씨가 상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은 아니에요. 제멋대로고 아직까지 철도 없어요. 기준이 이상하긴 하지만 저도 제가 엄청 좋은 애가 아니란 것쯤은 알아요. 수지 씨도 아마 그런 때가 있지 않나요? 내가 그린 그림이 남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그림의 배경이 된 바다는 현재 제가 할머니와 같이 사는 집 앞 바다예요. 실은 이 얘기를 하고 싶어서 편지를 쓰게 됐어요.
수지 씨는 아버지께서 사는 곳의 주소가 이곳이라 생각했겠지만 들은 바로는 아주 예전에 작은 슈퍼를 운영하던 제 할머니께서 수지 씨의 아버지와 알고 지냈던 모양이에요. 1년 중 바다에 있는 일이 더 많다 보니 꼬박꼬박 수지 씨의 편지를 받을 수 없어서 제 할머니가 대신 수지 씨의 편지를 받아주고 계셨대요. 그래서 수지 씨가 알고 있는 주소도 실제로는 저와 할머니가 지내는 집 주소인 거죠. 우연이지만, 이렇게 편지를 쓰는 지금 이 순간이 참 신기한 일인 것 같아요.
이곳의 석양은 제가 기억하는 한 서울의 풍경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어요. 무채색 연필로 그린 그림으로도 그게 느껴질까요?
PS. 급식 시간이 끝났나 봐요. 애들이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윽, 버스 시간도 놓쳐버린 거 같은데 어쩌죠. 오늘은 아무래도 걸어가야 할 거 같아요. 가는 길에 이 편지도 우체통에 넣구요. 궁금하지 않으시겠지만 제 이름은 유지민이에요! 다음엔 제 이름이 쓰여있었으면….
2017년 6월 29일.
From. 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