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내부인
*
기이한 일이었다.
이런 숲 속 깊은 곳에 편지통이라니?
심지어 그것은 우리가 아는 편지통의 모습이 아니었다.
보통 편지통이라 하면 나무로 만들어진 조그마한 상자을 떠올리는데, 여기 우두커니 서있는 것은 이질감이 들정도로 커다랗고 피칠갑을 한 것 처럼 새빨갰다.
때문에 처음엔 이것이 편지통인지도 몰랐다. 손으로 살짝 밀자, 철판이 안으로 들어가며 하얀색 종이가 슬며시 보였다. 단 한장이었다.
[ 안녕, 오필리아 공주 :) ]
*
6시간 전.
우리는 현관에서 다 같이 놀다가 막 잠이 들려는 참이었다.
"날 밝으면 계곡이 있는지 가보자. 정원 뒷쪽에."
불쑥 헨리가 말했다.
오필리아도, 나도 재미있겠다 싶었다. 모두 동의했고, 그렇게 몇 분정도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아침 6시.
이 시간이면 우리 모두 거의 동시에 깨어난다. 4시간 정도 자는 건데, 항상 그래왔으므로 이게 짧은건지 긴건지는 모르겠다. 씻는건 항상 헨리가 제일 먼저다. 그는 부스스한걸 병적으로 싫어했기 때문에 눈을 뜨자마자 씻으러 들어가야 했다. 헨리는 윗옷을 벗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잠그지 않았다. 곧 욕조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부터 샤워라니, 오필리아도 그렇고 나로서는 이해할수 없는 행위다. 아, 오필리아는 아직 내 옆에 누워있다. 그녀는 누워있기를 좋아했다. 정신은 깨어있지만 그냥 누워있는 것이다.
얇게 뜬 눈이 앉아있는 나의 눈과 마주치자,
"좋은아침."
언제나의 아침처럼. 나는 옅게 웃으며 끄덕였다.
"좋은아침."
"어? 말했다. 헨리! 에버렛이 아침인사를 했어!"
오필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온 집이 떠라가라 소리를 질렀다.
살짝 심장이 쿵 했다. 누워있는 오필리아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 눈이 너무 맑아서. 나는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고, 나도 모르게 평소엔 속으로 말했던 아침인사를 입밖으로 내어버렸다.
욕실 문뒤로 헨리의 큰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도 크게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래? 저녀석이 하는 아침인사라곤 들어본 적이
없는데!"
아침부터 떠들썩 하다. 보통은 이렇지 않았는데.
헨리는 준비를 마친지 오래였다. 나도 준비를 마친 뒤 오필리아가 나오길 기다리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욕실에서 물줄기가 떨어지는 소리. 물소리... ...말소리?
오필리아의 목소리였다. 누군가와 대화하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그럴 리가 없었다. 혼잣말인가?
"너 진짜 오필리아 좋아하냐?"
과연 저게 산을 오르는 사람의 복장인가 싶을 정도로 말끔하게 차려입은 헨리가 나의 노트를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그리고 있었다. 이것 참...
"좋아하지, 친구로서."
"너 그런 마음이 사랑으로 번지면 안되는건 알고있지?"
이 녀석 무슨 태도지?
그래. 우리는 모두 오랜 친구로서 서로를 좋아하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셋 중 어느 둘이 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있다. 그런데, 이 녀석 태도가 왜 '오필리아는 내꺼니까 뺏으면 안되는건 알고있지?' 라고 말하는 것 같지?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이 만년필은 도대체 몇년을 쓴거야?"
헨리가 내가 들고있던 만년필을 집어 살펴보며 물었다.
"너를 만나기 전에. 그러니까 오필리아와 내가 처음 만난..."
어라?
오필리아와 내가 처음만난... ...언제였지?
"뭐야, 말을 하다말아."
갑자기 기억이 안난다. 아니, 애초에 내가 그 날의 날짜를 기억하고 있었던가?
"아무튼 처음 만난 날 아버지께서 사주신 거야."
"뭐야, 생각보다 더 옛날이잖아? 너 나랑 만나고 너희 아버지 얘기할 때 3년 전에 돌아가셨다며? 쓴지 최소 13년이네."
"뭘 그렇게 열심히 쳐다보냐? 매일 쓰던 건데."
"아, 맞다. 미안해. 만년필 닳겠다."
헨리는 이렇게 말하고는 또 웃어댔다. 어젯 밤 일이 떠올라서 나도 피식 웃었다.
"무슨 얘기해? 같이 웃자."
다 씻고나온 오필리아가 언제나처럼 속옷차림으로 나오며 말했다.
*
헨리는 난잡한걸 참지 못하고, 오필리아는 답답한걸 참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는 옷을 잘 입지않는다. 헨리와 나는 아무리 그래도 입으라고 다그쳤지만, 그녀의 논리에 따르면,
"물기가 남아있는 피부위에 바로 옷을 입으면 답답해 죽겠단 말이야."
라고한다. 헨리의 결벽증과 마찬가지로 주위에서 충고를 준다고 해서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그녀를 보고있으면 행복했지만, 알몸을 보는건 마음이 불편해져서 보고싶지 않았다. 헨리도 같은 생각이리라.
모두 준비가 끝났다.
밖으로 나와서 현관문을 닫았고, 열쇠로 잠궜다.
산장 뒤의 정원으로 갔고, 연못과 텃밭을 지났고, 흔들의자도 지났을 때, 헨리가 말했다.
"텃밭에 받줄로 울타리를 쳐야겠는걸. 동물들이 내려오는것 같아. 작년엔 이렇지 않았는데."
*
우리 셋 모두 산장 밖의 숲으로 들어가는건 처음이었다.
(이미 숲 속에서 살고 있었지만) 진짜 숲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녹음이 더욱 짙게났다. 한여름이라서 초목들이 무성하게 난 때문이리라.
계곡을 찾으러간다. 찾아서 시원하게 놀다 올 계획이다.
숲에 들어온지 십분정도 되었을 때였다.
큰 나무가 있었는데, 밑동이 썩어서 금방이라도 부러질것 같았다. 그리고 몇 분 후에 무성한 나무들로 꽉 막혀있던 하늘이 갑자기 뻥 뚫렸다.
그 중앙에는,
"뭐야, 저게?"
이상한 물체가 있었다.
시뻘건 색이었다. 저런건 꿈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철로 만들어 진건데, 용도가 뭐지?
헨리가 손으로 두드려봤다.
퉁퉁퉁.
"안이 비었는데."
오필리아가 이곳저곳을 만지다가 쑥 들어가는 곳을 발견했다. 정말 이상한 물건이었다. 뚜껑이 안으로 밀어서 열리는 상자라니.
"종이가 있어."
그녀가 말했다. 과연 하얀색 종이가 보였다. 나는 안쪽을 들여다보고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했다.
종이의 크기는 손바닥을 겨우 덮을만큼 작았다. 그리고 그 종이에는 단 한 줄의 문장만이 쓰여져 있었다.
[ 안녕, 오필리아 공주 :) ]
한쪽 뺨과 어깨에 소름이 돋았다.
한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뭐지 이게?
종이에 쓰여진 글자를 본 헨리와 오필리아도 얼굴이 굳어지며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 짧은 글은 우리를 삽시간에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인삿말이 아니었다. 우리들 만이 아는 이곳에서, 우리들만이 서로가 친구인 이곳에서, 우리들만이 살고있는 이곳에서, 우리를 아는 누군가가 나타난다는 것은 우리가 유지해온 모든 평형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했다.
이 사람은 누구지? 어떻게 오필리아를 아는거지?
"뒷면에도 쓰여있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헨리가 내 손에있던 종이를 가로채 뒤집어보며 말했다. 뒷면을 본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 보낸사람: 내부인 ]
[ 받는사람: 오필리아 ]
[ 추신. 매일 밤 이곳에 편지를 넣고 다음 날 아침에 돌아오면 답장이 있을거야. ]
"어떤 개자식이 이런 장난을 치는거야?"
헨리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무진한 애를쓰고 있었다.
물론 이 편지가 누군가의 사소한 장난은 아니라는 것을 헨리는 물론이고 오필리아와 나도 알고있었다. 오필리아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고, 분명히 그녀에게 무언가 목적이 있는것이다. [ 내부인 ]이라는 글자도 신경이 쓰였다.
무슨 의도로 적은건지 짐작이 가지않았다.
우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무. 온통 나무 뿐이었다.
산장에서 보던 나무들과는 느낌이 달랐다. 하지만, 이 느낌이 도데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서늘함...
어라?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 순간, 헨리가 내 뒤에 바짝 붙으며,
"쉿. 너도 봤겠지만,"
그래. 봤다. 이 숲에...
"이 숲에 무언가 있어."
공포가 밀려왔다. 움직일 수가 없었고 눈동자를 굴리는 것조차 두려워져서 나는 땅만 보고 있었다. 두 다리가 떨리는 것을 멈출수가 없었다.
"사람일까, 헨리?"
나는 내가 본 그것이, 한 순간 내 눈에 비친 그것이 인간이 아니었음을 알고있었지만, 헨리가 '응. 사람이었어.' 라고 말해주길 바랐지만, 헨리가 내뱉은 한마디는 나를 극한의 공포속으로 몰아넣었을 뿐이었다.
"절대."
오필리아가 한발짝 우리에게 다가온다.
"저기... 돌아가는게 좋겠어..."
"섣불리 움직였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도데체 뭐였지?"
"우리를 죽일지도 몰라."
"편지의 주인일까?"
"아마도."
"저 녀석이 아니면 누구란 말이야."
"몰라. 하나가 아닐지도 몰라."
"어서 돌아가자."
"하나가 아니라면..."
"조용히 좀 해봐."
"도데체 오필리아를 누가 아는거지?"
"젠장, 다물으라고."
우리는 모두 패닉에 빠져 그 자리 그 곳에서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공포에 찬 말들을 여과없이 내보내고 있었다.
파란 빛. 내가 본 그것은 파란 눈동자 두 개였다. 그리고 나무사이의 햇빛에 비친 그것의 윤곽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헨리가 우리에게 눈짓을 했다. 그의 눈동자는 강인하게 우리에게 지시를 하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흔들리는 동공이 그가 느끼고있는 공포감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게했다.
우리는 모두 한 곳을 바라봤다. 3... 2...
"뛰어!"
헨리의 단말마와 함께 우리는 정신없이 산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무성한 수풀들에 살갗이 찔리고 베였다. 심장이 타들어가는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의 다리는 멈추지않았다. 이미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따라오나? 어디있지?
나는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뒤를 돌아봤지만 아까의 그것은 보이지 않았다.
"잠깐만. 없어졌어."
나의 말에 우리는 달리는 것을 멈췄다. 심장은 여전히 고동치고 있었다. 모두 숨을 미친듯이 헐떡였다.
숲 속은 조용했다. 쾌청한 날씨, 푸르른 나무들. 갑자기 모든것이 평온하고 따스해 보였다. 아까의 서늘한 느낌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상황이었고, 들리는 거라곤 정겹게 울리는 벌레들 울음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소리와 우리의 거친 숨소리 뿐이었다. 이쯤되자, 나는 혹시 잘못본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잘못본걸까?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찰나, 나는 멀리서 파란 눈동자를 보았고, 다시 미칠듯한 공포감에 휩싸여 버렸고, 나의 흔들리는 시야로 친구들이 보였고, 그들이 달리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고, 공포감이 나의 발을 묶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고, 내 허벅지를 마구 내리치며, 가까스로 달리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달렸고, 눈이 질끈 감겼다.
-와자자작-
갑자기 앞에서 나무가 쓰러진다. 아까 올때 본 그 썩은나무다. 그 나무가 온갖 나뭇가지와 다른 나무들을 부서뜨리며 앞서 뛰어가던 헨리와 오필리아의 위로 무너져 내렸다.
안돼!
"오필리아! 헨리!"
다리가 멈췄다.
몇 미터 앞에 친구들이 있었다. 불과 몇 미터앞에...
나는 심장이 무너져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