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니, 최 PD님이 여긴 어, 어떻게……."
당황한 서희의 입에서 아무렇게나 말이 흘러나왔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마음속을 어지럽히던 사람이 대뜸 눈앞에 나타났으니 말이다.
당황한 그녀를 향해 무뚝뚝한 음성이 툭 던져졌다.
"아직도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 줄은 몰랐군."
그의 말에 서희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건 또 무슨 소리지?'
알 수 없는 소리에 문득 정신이 번쩍 든 서희가 뒤늦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뜬금없는 그녀의 인사에 도겸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고작 인사나 받으려고 차를 세운 줄 아는가 보군.'
곧이어 그녀의 인사와는 상관없는 묵직한 말이 날아들었다.
"타지."
"네?!"
놀란 서희의 두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방금 타라고 한 거 같은데.
어딜? 이 차에?! 에이, 설마?!
자신이 잘못들은 게 분명했다.
"내 차를 타고 같이 가지."
때마침 도겸이 자신의 뜻을 명확히 밝혔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던 서희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설마가 사실이었다.
순간 서희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왜?! 갑자기 나타나서 왜 나를 태워주려는 거지?!
서희가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지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한 서희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아, 저기. 전 괜찮은데……. 그냥 버스 타고……."
그러자 도겸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에게로 향했다.
순간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번쩍였다.
갑자기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서희가 몸을 움츠렸다.
말로 권하는 것보다 더 강한 압박이 느껴졌다.
마치 그녀가 타지 않으면 꼼짝도 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촘촘한 그물이 던져졌다.
더이상 도망칠 구석은 없었다.
결국, 서희가 잔뜩 움츠러든 자세로 말했다.
"타, 탈게요……."
그녀가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차에 올라탔다.
뒤이어 도겸이 조심스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
조용한 차 안.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매끄러운 도로 상황과는 달리 차 안의 분위기는 꽉 막힌 도로처럼 답답했다.
'왜 이렇게 불편한 거지?!'
도겸이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지난번 포장마차 때와는 달리 굉장히 서먹서먹했다.
정신을 놓고 있던 그녀가 버스를 제때 못 탈까 봐 서둘러 차를 돌렸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이미 버스를 타고 가버린 건 아닌지 불안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중적인 마음이었다.
그때 마침 그녀를 발견했다.
순간 불안하고 초조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편안한 안도감이 찾아왔다.
그녀를 차에 태우고 출발하자 알 수 없는 흐뭇함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숨 막히는 어색함이 찾아왔다.
막상 같이 타고 있으니 굉장히 불편하고 답답했다.
그리고 그건 서희도 마찬가지였다.
남의 차를 얻어 타는 것도 처음인데 하필이면 그게 최 PD의 차라니!
숨소리도 들릴 정도의 좁은 공간이다.
그런 곳에 그와 단둘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미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그에게서 느껴지는 냉랭한 기운에 몸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숨 막히는 긴장감에 시선 둘 곳도 마땅치 않아 안절부절못했다.
그렇게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가 계속될 무렵.
어렵게 먼저 용기를 낸 서희가 주먹을 꼭 말아쥐며 말했다.
"태, 태워주셔서 고, 고맙습니다."
말을 마친 서희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무안해진 서희가 얼른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빨리 회사에 도착했으면 좋겠다.'
서희가 속으로 애타게 빌었다.
잠시 후, 어색한 침묵을 깨며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줄은 몰랐군."
"네?!"
방심하고 있던 차에 훅 들어오다니.
놀란 서희가 저도 모르게 크게 움찔했다.
'이럴 수가! 우리가 같은 동네에 산다고?!'
서희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쪽도 몰랐던 눈치군."
"아, 네……."
모르고 있는 게 당연했다.
서로 얼굴을 알게 된 지도 며칠 안 됐는데 사는 곳까지 어떻게 알겠는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신기한 일이군."
"그, 그러게요……. 참 신기하네요. 하하하……."
어색한 웃음이 차 안으로 낮게 깔렸다.
그렇게 짧은 대화가 끝나자 다시금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차라리 음악이나 라디오가 켜져 있었으면 나았을 텐데.
그렇다고 남의 차에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고.
게다가 뭘 만져야 라디오가 켜지는지도 알지 못하는 그녀였다.
답답한 마음에 서희가 슬쩍 그를 쳐다보았다.
굳은 얼굴로 운전대를 잡고 있는 도겸.
때마침 아침 햇살을 받은 그의 모습이 근사하게 반짝였다.
하얀 셔츠 위로 드러난 매끈한 피부와 깊고 그윽한 눈동자가 블랙홀처럼 그녀의 시선을 빨아들였다.
정말 볼수록 매력적인 남자였다.
서희의 시선이 그의 날렵한 턱선을 지나 위쪽으로 향했다.
붉게 물든 그의 입술이 차분하게 포개져 있었다.
'꿀꺽!'
그녀가 저도 모르게 굵은 침을 삼켰다.
순식간에 얼굴이 빨갛게 차오르며 심장이 쿵쾅댔다.
'앗, 무슨 짓이야, 윤서희! 정신 차려! 그는 게이라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가 눈치 없는 자신을 나무라며 고개를 마구 저어댔다.
하지만 들뜬 마음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이성과 본능의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때마침 도겸의 시선이 그녀를 슬쩍 훑었다.
'꽤 불편해 보이는군.'
그녀는 뭔가 굉장히 답답한 듯 연신 고개를 저어대며 괴로워했다.
그 역시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이제 와서 음악이나 라디오를 켜는 것도 너무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그 역시 어색해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어색함을 깰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방법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도겸이 몹시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자신이 이렇게 무능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그 모습을 본 서희가 금세 초조한 얼굴을 했다.
'내가 훔쳐본 걸 알고는 기분 나빠하는 것 같아!'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이상한 여자로 낙인이 찍힐 것 같았다.
당황한 서희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사랑에 규칙은 없다고 생각해요!"
순간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그녀 자신도 움찔했다.
'갑자기 너무 뜬금없는 소리잖아!'
어리석은 자신을 탓하며 서희가 그를 슬쩍 쳐다봤다.
'아, 망했다!'
그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망연자실해진 서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의 볼이 창피함을 이기지 못하고 발그레해졌다.
그러자 도겸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그의 얼굴도 점차 붉어지는 것 같았다.
'뭐지? 뭐야? 내가 왜 이러는 거지?'
그의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댔다.
당황한 도겸이 크게 헛기침을 해댔다.
혹시라도 이 소리를 그녀가 듣는다면!
두고두고 이불킥을 할 일이다.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뒤이어 그의 모든 신경이 평정심을 찾는 것에 집중되었다.
서희는 뜬금없는 소리를 한 자신을 자책하느라 정신없었다.
자연스럽게 다른 얘기를 한다는 게 하필이면 그런 말을 하다니!
그의 입장에서는 별로 밝히고 싶지 않은 일일 수도 있을 텐데.
신중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렇게 생각이 많아진 두 사람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뒤, 애써 진정이 된 도겸이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내가 계속 말을 놓고 있군."
"네?! 아, 전 괜찮은데……. 그냥 편하게 하셔도……."
서희가 자신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어차피 자주 볼 사이도 아닌데 굳이 이제 와서 이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허락하면서도 꼴이 우스웠다.
"그런가? 그럼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하도록 하지."
도겸이 무심한 말투로 대답했다.
순간 서희가 움찔했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었다.
'앞으로?! 계속?!'
그와 자신 사이에는 등장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서희의 마음이 곧장 들뜨기 시작했다.
앞으로와 계속이라는 말이 이렇게나 달콤하게 들리는 줄은 처음 알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서희가 그를 힐끔거렸다.
'동네 어디쯤 사는 걸까? 혼자 살까? 아니면 가족들이랑?'
근사한 집에서 가족들과 단란하게 지내는 그를 상상해보았다.
이어서 넓은 집에서 혼자 지내고 있는 그도 생각해 보았다.
둘 다 제법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가족이랑 같이 사나?"
"네?! 아, 아뇨……."
느닷없는 그의 질문에 서희가 냉큼 대답했다.
예의 없게 느껴질 수도 있는 질문이었는데.
다행히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은 듯싶었다.
"그렇군. 나도 혼자 살고 있지."
말을 마친 도겸의 얼굴이 곧장 일그러졌다.
'이런!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지?!'
자신이 말해 놓고도 영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도겸이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생각보다 그렇게 꼬여있는 타입은 아닌가 보군.'
어쩐지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도겸이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괜찮으면 내일 행사도 같이 타고 가지."
"네?!"
갑작스러운 그의 제안에 서희가 놀란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내일 회사에 큰 행사가 있었다.
1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열리는 사내 체육대회가 바로 그것이었다.
창립 초창기 때부터 이어져 오던 행사로 전 직원이 참여해야 하는 불문율이 존재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실 하나가 빠져있었다.
"저기, 전 아무래도 못 갈 것 같은데요……."
서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도겸이 다소 의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이 바쁜가?"
"아뇨. 그게……."
대답을 망설이던 서희가 슬며시 고개를 돌려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심각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또다시 오해를 살 위기였다.
"저, 그게……. 제, 제가 정규직이 아니라서요……."
"……."
그녀가 어렵게 꺼낸 말에 도겸이 크게 움찔했다.
그런 규정이 있는 줄은 그도 지금 처음 알았다.
전 직원 참여라는 불문율에 비정규 직원은 해당되지 않는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순간 도겸의 표정이 싸느랗게 굳어졌다.
속에서 알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죄지은 것도 없이 미안해진 서희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전 내일 회사로 출근해요……. 할 일도 많고요……."
혹시라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까 싶어 그녀가 도겸을 슬쩍 쳐다봤다.
순간 그에게서 서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서희가 흠칫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역시! 자신의 제안을 거절해서 기분이 상한 것 같아!'
엉뚱한 오해로 서희가 안절부절못했다.
도겸은 도겸대로 분노를 잠재우려 발버둥 쳤다.
그렇게 또다시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