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의 질문에 잠시 악몽 같았던 그날 밤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바람에 한껏 예민해진 도겸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할 말이 끝난 모양이군."
도겸이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아직이야! 끊지 마!"
어떻게 알았는지 진우가 냉큼 소리쳤다.
도겸이 못 들은 척 끊어버릴까 고민했다.
곧 진우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무튼, 약속은 약속이니까 확실하게 도와줘야 해. 중간에 슬쩍 빠져나갈 생각하지 마. 알았지?"
"대답은 이미 한 거로 아는데."
도겸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피식 웃는 소리와 함께 진우의 능글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니, 네가 이렇게 순순히 움직여주니까 어쩐지 좀 불안해서 그러지."
"불안한 사람치고는 목소리가 상당히 들떠있군."
"헉!"
"역시!"
도겸이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더니 아예 휴대폰 전원까지 꺼버렸다.
그의 미간이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수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냥 없던 일로 하고 돌아가고 싶었다.
아무리 친구의 부탁이지만 역시 이용당하는 건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처음 부탁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도와줄 마음이 있었다.
번거로울 것도 없었다.
그저 진우 곁에 병풍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상대의 질투를 유발하고 진우가 그 빈틈을 공략해 들어가는 게 이번 작전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그 한 번의 병풍 역할로 친구는 사랑을 쟁취하고 도겸 자신은 안전한 수면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일거양득이었다.
하지만.
잔뜩 들떠있는 진우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딱 그만두고 싶어졌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도겸이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진우의 잔꾀에 걸려든 것 같았다.
마침 신호에 걸려 차를 세웠다.
여기서 우회전하면 다시 집으로 갈 수 있다.
달콤한 유혹에 시선이 저절로 우측을 향했다.
순간, 도겸의 눈빛이 차갑게 번쩍였다.
'어차피 한 번은 부딪힐 일.'
밤에 잠도 못 자고 술에 취한 친구를 찾아 도시를 헤매는 일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꿍꿍이가 있든지 오늘만 버티면 해방이다.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마침내 결심한 듯 운전대를 잡은 도겸의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곧 신호가 바뀌자 도겸의 차가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물론 방향은 직진이었다.
***
같은 시각.
마침내 일을 끝낸 서희가 퇴근을 하고 있었다.
일이 많아 힘들었던 것일까.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건물을 빠져나온 그녀의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하아."
그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낮에 있었던 일들 때문에 도무지 업무에 집중할 수 없었다.
덕분에 퇴근도 늦어졌다.
하지만 그보다는 다른 게 더 마음 쓰였다.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인데.'
아니다.
처음부터 자신과는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낡은 휴대폰 하나 때문에 잠시 어울린 것뿐.
낮에 서희 자신이 직접 말했듯이 그와는 인연이 아니었다.
스스로 불가능을 인정한 셈이다.
게다가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가 정말 동성애자라면 더더욱 자신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머리로는 이렇게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제멋대로 굴었다.
자꾸만 그를 떠올렸다.
잘생긴 외모에 현혹된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방송에서 매력 넘치는 꽃미남을 봤다고 지금처럼 가슴 설렌 적은 없었으니까.
물론 변수는 존재했다.
그 꽃미남들보다는 그 사람이 훨씬 더 매력적이라는 점.
거기에 꽃미남들과는 다르게 그는 서희의 현실 속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서희가 머리를 세차게 휘저었다.
그의 멋진 외모가 싫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못했다.
지금 그녀의 마음이 싱숭생숭한 이유를 설명하기엔 그것으로 부족했다.
그때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포장마차에서 보았던 그의 미소.
물론 그는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서희는 확신했다.
그 모습을 보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으니까.
서희가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다시 생각해봐도 가슴이 뛰었다.
정말 멋진 미소였다.
무섭게만 느껴졌던 사람이 한순간에 근사해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는 사람이 내 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자신일지라도 말이다.
"하아."
서희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었다.
그걸 잘 알기에 한숨만 이어졌다.
마음이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그렇게 서희가 멍한 얼굴을 한 채 터벅터벅 집으로 향했다.
온갖 생각들이 쉴 새 없이 떠올라 혼란스러웠다.
그 때문일까.
많은 사람이 그녀를 힐끔거리며 관심을 보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화장을 지웠는데.
화장하고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정작 본인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
3층 구조의 신축 건물.
그곳에 고급 레스토랑이 새로 문을 열었다.
유명 쉐프, 마카오 장의 열 번째 레스토랑이었다.
오늘은 개점 축하 파티가 열리는 날.
입구에서부터 소란스러웠다.
취재하는 기자들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내로라하는 유명인들은 죄다 모인 것 같았다.
방송에서나 볼 수 있었던 유명 연예인들부터 스포츠 스타들까지.
입구에 깔린 레드카펫 위를 그들이 지날 때마다 카메라 플래시가 요란하게 번쩍였다.
마치 시상식이라도 열린 듯 화려하고 시끌벅적했다.
때마침 주차장에 고급 승용차가 들어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을 향했다.
곧이어 운전석에서 멋진 슈트 차림을 한 남자가 내려서자 사람들의 탄성이 쏟아졌다.
"와, 잘생겼다."
"누구야, 누구?"
"글쎄.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군지는 모르지만 일단 찍고 볼 일이다.
여기저기서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일반인들도 저마다 휴대폰을 꺼내 들고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곧장 얼굴을 가렸다.
동시에 출입구를 향해 쏜살같이 뛰었다.
그러자 카메라가 집요하게 그 모습을 쫓았다.
입구를 지키고 선 남자가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황급히 인사를 했다.
그러더니 곧장 출입문을 열어주었다.
남자에게 초대권 검사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렇게 남자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이번엔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그와 함께 여기저기서 술렁이기 시작했다.
"어머, 저 남자 누구야?!"
"헉! 대박 잘생김. 누구 저 남자 아는 사람?"
"모델인가? 못 보던 얼굴인데."
"신인인가 봐. 기획사가 어디지?"
그렇게 등장만으로도 모든 시선을 잡아끄는 남자.
그는 바로 도겸이었다.
이미 구석진 자리의 몇몇 사람들은 휴대폰을 꺼내 들고 몰래 그의 사진을 찍기까지 했다.
도겸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어?! 여기 있었구나."
반가운 목소리와 함께 진우가 다가왔다.
혹시라도 오지 않을까 봐 마음 졸였는데.
뒤늦게 도겸을 발견한 진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도겸은 별로 반갑지 않은 눈치였다.
오히려 진우가 다가오자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본 진우가 괜히 친한 척 어깨동무를 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한참 찾아다녔잖아."
도겸이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원래부터 스킨십을 싫어하는 그였다.
더군다나 남자와의 접촉은 더욱 질색이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겸이 테이블로 다가가 찬물을 집어 들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속이 타는 듯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한 상태였다.
평소에도 사람들이 많은 곳을 꺼리는 그였다.
요란 떠는 것도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그 두 가지에 모두 해당하는 곳에 그가 서 있었다.
게다가 그런 곳을 제 발로 찾아왔다.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도겸의 곁으로 진우가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다가왔다.
"전화기는 왜 또 꺼놨어. 걱정했잖아."
"어떤 성가신 놈 때문이지."
도겸이 무섭게 쏘아보며 대답했다.
이 모든 게 이 녀석 때문이다.
어느새 그의 눈빛이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진우가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그때였다.
"오, 마이 베스트 프렌드! 정말 와 주었구나!"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요란한 복장을 한 채 다가왔다.
멀리서도 확연히 눈에 띄는 남자.
오늘 개점한 이 레스토랑의 주인.
바로 마카오 장이었다.
그가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도겸을 반겼다.
옷의 앞부분이 길게 파여 있어서 그의 가슴 털이 훤히 보였다.
복장만 보면 마치 라틴 댄스장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도겸이 금세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친구지만, 못 본 척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도겸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마카오 장.
갑자기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들뜬 목소리로 떠들었다.
"너 온다는 소식에 설마 했는데. 막상 마이 파티에 도겸이 네가 참석한 걸 보니 감격해서 눈물이 막 나려고 하네. 흑흑."
"요란 떨지 마."
덩칫값 못하는 친구를 향해 도겸이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눈치 없는 마카오 장은 여전히 도겸의 곁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보다 못한 진우가 서둘러 나섰다.
"그래. 그만하면 됐어. 이제 저쪽으로 좀 떨어져. 아, 그리고 도겸이 베스트 프렌드는 네가 아니라 나야. 착각하지 마."
"뭐? 어째서?"
진우의 말에 마카오 장이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자 곧장 진우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어째서는 무슨. 진작부터 그랬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웃기고 있네! 난 그런 소리 못 들었는데?"
"아, 이 춤바람 난 주방장 아저씨를 어쩌면 좋지? 도겸이 여기 온 거 보면 몰라? 얘한테 직접 물어봐. 누구 때문에 여기 왔는지 말이야."
"그래, 도겸아. 네가 한번 말해 봐. 저놈이랑 나, 둘 중에 누가 너의 베프야? 응?"
도겸을 사이에 두고 난데없이 다툼이 벌어졌다.
두 남자의 진지한 눈빛을 본 도겸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역시. 오지 않을 걸 그랬군.'
도겸이 애써 그들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때 마침.
새로운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