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했던가. 그간 럼멜하트 상단의 만년 과장으로 유명했던 레너드는 갖은 노력 끝에 드디어 한 건 했다는 생각에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면서도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단장 럼멜하트가 원하던 인재를 손에 넣은 일등 공신이 바로 자신이라니! 입단 동기이면서도 자신보다 승진이 빨라 열등감만 선사하던 동료들에게 드디어 자신의 성과를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레너드는 어서 빨리 일을 마무리 짓고 자신의 승진 소식을 접하고 싶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상단을 두리번거렸다.
‘그 아이는 어디 있지? 분명 잡아왔다고 했는데.’
대륙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상단답게 대형 마차와 천막이 끝도 없이 즐비하게 늘어서있다. 어느새 해가 넘어가서 흰 천막 위로 붉은 빛 어둠이 내려앉고 있음에도 상단은 손님으로 북적거린다.
‘저 쪽은 장사와 경매가 이루어지는 곳이니 없을 테고…….’
레너드는 창고와 빈 마차를 몇 군데 열어보며 자신을 승진시켜 줄 그 아이의 행방을 찾았다. 아까 보고하러 온 녀석에게 위치도 물어볼걸, 후회가 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영업 중인 간부라도 찾아 물어보는 수밖에.
그 때, 골동품 판매장으로 들어가려던 그를 한 시종이 불러 세웠다.
“저기요!”
레너드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연한 베이지색 바지에 밤색 조끼, 상단 시종의 유니폼이다. 하지만 저렇게 뚱뚱한 녀석은 한 번도 못 봤던 것 같은데, 싶으면서도 그 시종의 가슴팍에 상단 마크의 배지가 달려 있는 것을 보면 상단 소속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레너드였다.
“뭐냐?”
“그... 죄송하지만, A급 물류창고가 어디인가요? 부서장님께서 수량 확인을 다시 해보라고 하셔서요.”
“붉은 깃발이 달린 천막이잖아. 넌 일하는 놈이 그것도 몰라?!”
“죄송합니다... 일한 지 얼마 안 돼서...”
“하긴, 너 같은 녀석은 쳐다보지도 못 할 물건들이지. 저 마차를 지나가면 보일 거다.”
“감사합니다!”
소년이 뚱뚱한 몸을 움직여 레너드가 가리킨 방향으로 멀어졌다. 레너드는 저런 어리바리한 녀석이 어떻게 상단에서 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혀를 차고는 골동품을 파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확실히 골동품은 가격도 나가고 마니아가 아니면 잘 찾지 않는 까닭에 천막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대여섯 명 정도 되려나. 여기 분명 렌 과장이 있을 텐데, 하고 두리번거리던 레너드는 곧 그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쪽빛 한복을 입은 백발의 젊은 여성 옆에서 담뱃대에 대해 설명하느라 한껏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100년 전 제이칸 왕실에서 쓰던 담뱃대라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답니다. 이 손잡이 부분이 특히 고급스럽죠? 구리와 라네트 원석을 합금해서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레너드는 고객에게 실례가 되지 않도록 말이 끝나길 기다린 후 렌 과장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이봐, 렌.”
“어머, 레너드 과장님. 여긴 무슨 일이세요?”
“혹시 상단에서 어떤 여자애 하나 잡아왔다는 소식 못 들었어?”
“여자애라니... 아, 이틀 전에 과장님이 쫓던 그 애요? 15번 창고에 잡혀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과장님이 잡으신 거나 마찬가지라면서요?”
“아니, 뭐, 그런 셈이지.”
레너드는 가볍게 크흠, 기침을 하곤 렌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나왔다. 자신이 발견한 아이니 반드시 단장님이 원하던 ‘열 술사(術士)’임을 증명하고 말리라. 결심하며 15번 창고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15번 창고, 그곳은 다른 창고에 비해 깨끗하고 잠금 장치도 훨씬 튼튼했다. 다른 창고도 상태가 나쁜 건 아니지만, 그곳은 새 마차를 구입하면서 함께 보수한 것이라 특히 누군가를 가두기에 안전했다.
이곳에는 안대로 눈을 가려진 채 손발이 묶인 여자아이와, 그 아이를 감시하기 위해 남아 있던 직원 하나가 탁자를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그래봤자 보고 있는 건 직원뿐이었지만.
직원은 아까부터 계속 똑같은 질문만을 하고 있어서 꽤 지친 상태였다. 물론 엄한 곳에 잡혀 와서 묶여 있는 이 아이의 고생에 비하겠냐마는, 그 역시 지겨웠던 터라 한숨을 쉬며 같은 질문을 다시 한 번 내뱉었다.
“자, 다시 한 번 묻지. 너는 이틀 전에 열 능력을 사용한 적이 있냐, 없냐?”
“몇 번을 물어보셔도 제 대답은 같아요... 전 아무 능력도 없어요... 이렇게 잡아 둬봤자 없던 능력이 생기지는 않는다고요. 이제 그만 보내주세요...”
강력하게 부인하던 소녀는 두 시간이 넘는 취조에 지쳤는지 이젠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다. 하긴, 고작 17살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에게 이런 처우는 과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너드 과장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단장이 찾던 능력의 소유자임에 틀림없었다. 자신이 레너드 과장과 함께 이 사건의 일등 공신이 되어 특급 승진을 할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직원은 다시 힘을 내어 그녀에게 물었다.
“이틀 전에 열 능력을 사용한 그 아이의 현상수배지가 있다. 너의 인상착의와 매우 유사하지. 그래도 모른다고 할 테냐?”
“그래봤자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그린 것 아닌가요? 제가 그 사람과 닮았나 보죠! 도대체 그 사람이 어떤 짓을 했는데 아무 잘못도 없는 저에게 이러시는 건가요?”
확실히 이 아이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라면 정말 큰 잘못을 하는 것이긴 하다. 직원이 미간을 꾹꾹 누르며 골머리를 썩고 있을 때, 창고 문을 노크하는 소리와 함께 레너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들어가겠네.”
레너드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직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과장님, 오셨습니까.”
“그래, 아직 아무 자백도 하지 않았나?”
“예. 계속 자긴 모르는 일이라고...”
레너드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직원에게 잠깐 밖으로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두 사람은 창고의 문을 닫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내가 직접 본 사람으로서 확신하는데, 저 아이는 그 열 술사가 맞아. 어찌 저렇게 고집이 센지...”
“우리 상단에서 데려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는 걸까요?”
“아, 알면 더 좋은 것 아니겠어? 황성으로 보내준다는데?”
“그래도... 당사자 입장에선 그게 싫을 수도...”
직원이 소심하게 말했지만 레너드는 들은 척도 않았다.
“됐고, 오늘 안으로 저 아이 입에서 자기가 열 술사라는 말 얻어내. 마음 같아서는 고문이라도 하고 싶지만...”
“힉! 과장님, 그건 큰일 납니다!”
“말이 그렇다는 거야, 말이! ...그건 그렇고, 부서장님께는 이 사실을 아시나?”
“아뇨, 3일 전 옆 마을에 가신 후로 아직 안 오셨잖습니까. 아마 모르실 겁니다.”
“그렇군... 뭐? 잠깐.”
레너드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다 눈을 번뜩였다. 아까 그 뚱뚱한 시종, 그 녀석이 분명, ‘부서장님께서 수량 확인을 다시 해보라고 하셨다’고 하지 않았나?
레너드가 갑자기 표정이 바뀌자, 직원은 의아한 얼굴로 그의 상태를 살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게... 잠깐 기다리게. 급히 갔다 올 데가 있으니. 저 아이는 내가 직접 심문하겠네.”
“아, 알겠습니다.”
직원이 대답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레너드는 어디론가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녀석, 어쩐지 처음 보는 얼굴이다 싶었는데... 도둑질을 하러 온 건가? A급 물류 창고라면 최상품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당연히 철저히 잠가놨겠지만 뭔가 수를 쓰려는 것이 분명하다. 레너드는 어느새 걸음이 점점 빨라져 그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직원과 레너드가 나간 뒤, 15번 창고에 남아있던 소녀는 한동안 미동도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러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는 듯하자, 그녀는 낑낑거리며 바지 주머니에서 은빛 쇠붙이 하나를 꺼냈다. 열쇠였다. 양 손이 모두 묶인 상태라 열쇠 구멍을 찾기가 어려웠지만 시간을 들이자 ‘찰칵’ 소리와 함께 두 손이 자유로워졌다. 소녀는 기다렸다는 듯 눈에 쓰인 안대를 벗고 기지개를 켰다.
“으으읏-! 좀 쑤셔 죽는 줄 알았네.”
기지개 후 의자에 축 늘어진 몸과 달리, 안대에서 벗어난 검은 눈에는 생기가 감돌았다. 2시간 만에 찾은 평화를 만끽하려는 것인지, 소녀는 잠깐 그 자세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별안간 벌떡 일어나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정신 차려, 미르!”
자신의 볼을 두어 번 찰싹거린 미르는 문으로 다가가려다 멈칫하고는 창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문으로 나갔다가는 아까 그 두 사람과 마주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니, 빨리 여기서 탈출해야 한다. 하지만 급박한 상황임에도 미르는 여유롭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좀 전의 그 열쇠를 꺼내, 단단히 잠겨 있던 창문의 자물쇠를 열었다. 그리고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창문을 열어젖힌 후, 어둑어둑해진 주변을 휙휙 살펴보곤 창틀로 뛰어올라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상단 밖에서 레너드가 사라진 쪽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발장난을 치던 직원은, 문득 그가 그렇게 급히 갔다면 금방 오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일단 창고에 가둬 둔 소녀가 딴 마음을 품지 못 하도록 들어가서 감시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발을 툴툴 털고서 창고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빈 의자와 깔끔하게 벌어진 수갑, 그리고 바람에 소리 없이 덜렁거리는 창문이 들어온 것은, 미르가 이곳에서 탈출한지 5분이 채 안 되던 시점이었다. 물론 그 직후 경악을 담은 직원의 비명이 하늘 위 구름을 찢을 듯 솟구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레, 레, 레너드님-!!!!”
한편, 아까 레너드에게 길을 물었던 시종 소년은 A급 물류창고 안에서 뭔가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귀한 물건들뿐이라 다른 곳처럼 상품으로 북적거리지 않는다. 일정 간격을 두고, 진열장 안에 고이 모셔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그런 진열품에는 관심이 없는지 여기저기를 빠르게 훑어보며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의 기억이 맞는다면 이곳에는 고객에게 팔아먹기 위한 물건뿐만 아니라 상단의 주인인 럼멜하트에게 가는 귀한 선물도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소년은 신중하게 물건들을 살피다가 이내 어느 지점에서 눈을 빛냈다.
진열장에 들어가지 않고 탁자 위에 올라가 있는 물건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작은 보석함부터 시작해서 소년의 키보다 큰 직사각형까지... 아마도 그것은 그림일 것이다. 이것들은 파는 물건이 아니라 단장에게 가는 물건임에 틀림없다. 소년은 적당한 것을 찾기 위해 탁자 위에 올라간 물건들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곧, 가로로 길다란 모양의 선물함을 열어보고는 원하던 것을 찾아냈다. 붉은 비단 위에 놓인 그것은 검이었다. 화려한 검집과 그에 비해 소박한 손잡이를 가진 검. 소년은 조심스레 검을 집어 들고는 주머니에서 종이 쪼가리를 꺼냈다. 그리곤 검을 살짝 뽑아들어 검집에 종이를 끼운 후, 다시 검을 집어넣었다. 검집 밖으로 흰 종이의 일부가 삐져나와 있었다.
‘이렇게 하면 분명히 전할 수 있을 거야.’
소년은 검을 소중하게 상자에 넣고는 원상태로 돌려놨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땀이 한 줄기 관자놀이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제 목표를 달성했어,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물류창고를 나오려는데, 그런 소년의 앞으로 무시무시한 얼굴의 남자가 다가왔다. 레너드였다.
“아, 안녕하세요.”
소년은 자신이 내뱉어 놓고도 참 언어 선택을 못 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레너드의 표정이 장난 아니게 험악했던 것이다. 소년이 그걸 깨닫고 흠칫 물러서기도 전에 레너드가 소년의 멱살을 잡고 낮게 으르렁댔다.
“부서장님께서는 3일 전부터 외출 중이신데...?”
“......!!”
소년이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상황은 충분히 심각했다. 소년은 방금보다는 아까 전의 언어 선택이 더 끔찍했다는 것을 반성했지만, 실은 지금 어떤 변명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 가장 끔찍한 일일 것이다. 소년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정지된 머리를 굴리며 입을 뻐끔거렸다.
“저, 그, 그게... 실은...”
“시끄러, 당장 경비에게 넘길 테니 가서 사실대로 불어라.”
“아악- 아파요!”
소년은 레너드에게 머리채를 붙잡혀 끌려갔다. 이렇게 내 작전은 실패하는구나, 난 이대로 끝이구나, 하고 그가 눈을 질끈 감은 순간, 상단 전체에 고막을 뚫을 듯한 기분 나쁜 경보가 울려 퍼졌다.
왜애애애애애애애애앵-
[안내방송 드립니다. 15번 창고에 갇혀 있던 수배자가 탈출했습니다. 17세 정도의 여자로, 붉은 머리를 갖고 있습니다. 직원 여러분은 통로를 봉쇄하고, 수배자를 발견하시는 즉시 구속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립니다...]
“......?”
소년은 두피에서 느껴지던 얼얼한 아픔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는 레너드의 눈치를 살폈다. 레너드는 안내방송에 영혼까지 맡긴 듯 굳어 있었다. 소년이 뭔가 다른 생각을 하기도 전, 그는 알아듣기 어려운 욕설을 내뱉더니 소년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여기 가만히 있어’라는 말만을 남긴 채.
“흥, 가만히 있으라고 진짜 가만히 있는 놈이 어디 있냐?”
소년은 멀어져 가는 레너드의 뒷모습을 보며 약 올리듯 혀를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