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달.
그것은 떠올랐다기보다는 눈을 깜빡이듯 한순간에 나타났다.
그것은 다른 때와 같이 항상 그 자리를 부유하던 숙주의 몸뚱이 한 가운데를 찢어발기고는 마치 자신이 오리지널임을 표방하려는 듯 그것들 중 아무도 닿지 못했던 한 차원 더 높은 공중에 자리 잡고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높이 떠감에 따라 핵은 주위의 검은 먹구름 한 점에도 쉽게 가려질 만큼 아주 작아졌지만 붉게 충혈 된 눈동자의 빛은 더욱 강렬하게 세상을 노려보았다.
칠흑의 어둠속에서 날카롭게 째려보던 눈동자의 시선이 멈춘 곳은 자신이 바스러뜨린 숙주가 또르르 흘러 떨어진 어느 창가였다.
방의 안쪽까지는 감시의 눈초리가 미치지 못하는지 어둑어둑하여 어떠한 물체의 형체도 알아 볼 수 가 없었다.
다만 쉴 새 없이 눈알을 돌리며 붉은 창틀 모양의 영역을 조금씩 확장시켜 나갔다.
동공을 차츰 크게 벌림에 따라 빛은 총기를 잃고 차차 뿌옇게 흐려졌다.
하지만 붉은 빛은 슬그머니 창틀을 넘어 고가의 가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붉은 선반, 그 위에 놓인 붉은 오디오와 붉은 TV,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 맞은편의 붉은 소파 그리고 그 어떤 것보다 붉게 비치고 있는 한 남자의 밝게 웃고 있는 액자.
그것은 군자의 눈으로 보기에도 어떠한 미련조차 남지 않은 성인의 온화한 미소였다.
집주인과 싱거운 눈싸움을 끝낸 밤손님은 거실에 그치지 않고 부엌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집안은 어두컴컴했고 바닥을 짚으며 살금살금 기어 어느 정도 침투했을 때 빛 한줌 없는 부엌에서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화들짝 놀란 토끼눈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절대 말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그게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애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렇게 살라고?”
“모르는 게 나아. 괜히 죄책감 가지고 살 필요 없지.”
“그러면 나는? 나는 어떻게 살라고! 나는 마음 편히 두발 뻗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시끄러! 나는 마음이 편한 줄 알아? 나도 이런 결정 내리기 싫어. 이 가슴이 어?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다고!”
“어차피 자기 마음대로 할 거였으면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하지 나한테는 왜 말해서 사람을 등신으로 만들어 왜! 나는 일말의 죄책감도 안 느낄 것 같아? 나도 할게. 응? 나도 한다고”
“제발 잠자코 너는 우리 애 옆에 남아줘... 내 선택이 틀리지 않도록... 내 마지막 부탁이니까.”
“당신... 그거 알아? 당신도 젊어. 우리 아직 시간도 있으니까 다른 방법도 생각해보자. 응? 당신 술 깨면 내일 다시 이야기해. 솔직히 취해서 하는 그런 허무맹랑한 말도 아직 못 믿겠어... 너무 극단적이잖아.”
“애기엄마. 잘 들어. 나는 알아. 나만은 안다고! 그리고 이건 절망이 아닌 희망이야 다시없을 기회라고! 그것이 악마의 속삭임이었다고 해도 상관없어. 내 영혼 하나면 싸게 먹히는 거니까. 두 말하게 하지 마! 나도 어렵게 결정한 결심이니까 더는 흔들지 마.”
격앙된 언쟁은 그걸로 종식되었고 누군가 걸어 나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엔 어느새 검은 눈꺼풀 한 무리가 덮쳐 왔고 숨어서 가늘게 실눈 뜨던 붉은 홍채는 빛을 잃어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검은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은 어슴푸레 붉은 빛을 띠고 있었고 이내 완전한 어둠으로 덮여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