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양 울음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박인하와 한울 역시 발걸음을 멈췄다. 어디서 들리는 소리인지 주변을 살피던 중 박인하가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 백주 근방에서 토루가 나타났다는 얘길 들은 거 같은데…….”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란 풀과 나무 사이에서 두 마리의 양이 등장했다. 아니, 그건 양의 모습을 한 식인요괴 토루였다.
“오호, 이게 누구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토루 두 마리의 뒤에서 한 남자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온 몸이 근육질인 이 거한은 산짐승의 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한 손에는 거대한 철퇴가 들려 있었다. 거대한 덩치와 들려있는 철퇴로부터 오는 위압감은 별로 하여금 겁을 먹어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감도 못 잡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거 분명 중경유수의 따님으로 보이네만. 아닌가?”
“그러는 그쪽은 누구려나? 나야 꽤나 유명한 사람의 딸인데다가 나 스스로도 나름 이름 좀 있다고 할 만한 사람인데 반해 그쪽은 전혀 알 도리가 없네?”
한껏 비웃으며 빈정거리며 묻는 남자에게 박인하도 지지 않으며 대꾸했다. 박인하의 대꾸에 남자는 마치 짐승이 내지르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나? 나를 모른다? 하기야 잘 나가는 규중의 아가씨가 날 모를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 조금 섭하군. 나름 전장도 나갔다는 아가씨가 날 모르다니 말이야. 역시 규중 속 화초는 화초인 셈인 모양이군, 크하하하하하하.”
소리 높여 웃어 보이는 남자 외에도 웃음소리가 사방에 들려왔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 상당한 사람들이 이 주변에 숨어 있음이 분명했다.
웃음소리에 정신 차린 별은 일단 박인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에게 다가갔으나 박인하는 그런 별을 오히려 지키듯이 앞에 서서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 제가 굳이 당신을 알아야 하나요? 알아야 한다면 이름을 얘기해주지 않으실 건가요, 두로.”
말끝에 자신의 이름이 불렸다는 사실에 놀란 거한의 남자 두로는 순간 놀란 눈으로 멍하니 있다가 박인하를 사납게 노려보며 말했다.
“알긴 아는군. 그럼에도 내 이름을 묻겠다?”
“그것이 서로에 대한 예의가 아닐는지?”
“예의? 다짜고짜 남의 영역에 발을 들인 계집이 예의를 논해?”
“이 언덕이 당신의 소유라고 증거가 있나? 이 나라 모든 땅은 나라의 땅, 임금의 땅이거늘, 누군가 개인소유의 땅이 존재하나? 설령 있다고 한들 이 하늬언덕은 엄연히 중경의 영역에 해당되는 만큼 내 부친이신 중경유수 진경후의 영토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하! 이 난세에 그런 게 통용되냐! 먼저 먹는 놈이 주인이고, 먼저 차지하는 놈이 주인이지. 그리고 증거? 증거라면 여기 있다. 바로 이 두로님이 여기 이곳에 살고 있다는 게 바로 증거다!”
주변의 나무와 땅이 뒤흔들 정도의 큰 목소리였다. 별은 그 박력에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눈에 고이는 걸 느끼며 박인하와 한울의 얼굴을 살폈다. 잔뜩 겁먹은 별과 달리 박인하와 한울은 별다른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박인하의 경우에는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과연 일단 납득은 하도록 하지. 다만 받아드릴 생각은 없어.”
“누가 너 같은 계집애가 받아드리고 한 줄 아느냐.”
으르렁 거리듯 말하는 두로의 말에 반응했는지 그가 이끄는 두 마리의 토루는 물론 숨어있던 그의 패거리들이 모습을 드러내어 점차 다가왔다. 각자 무시무시한 무기들을 든 그들을 본 별은 까무러치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어떻게든 박인하를 지켜야한다는 마음으로 박인하 곁에 섰다.
박인하는 그런 별에게 미소를 보내며 두로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그나저나 날 안다면 날 건드리는 게 위험하다는 걸 잘 알텐데.”
“알지. 오히려 너니까다, 계집. 너라는 계집을 잡으면 상당한 몸값이 따라오겠지. 그러니 괜히 반항치 마라. 넌 소중한 돈줄이니 말이야. 아, 네 곁에 있는 몸종은 어……, 내 부하들에게 조금 봉사를 해줘야 겠다. 거기 노인네는 당연히 볼 일 없고 말이지.”
욕망과 욕심에 눈이 먼 부하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두로가 노리 높여 웃자 박인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기대 좀 했더니, 결과는 한낱 도적놈이었다는 거로군.”
“허허허, 그럼 뭔가 색다른 기대라도 했나? 멋들어진 비늘을 가진 용 같은 거 말이네.”
“음, 그런 게 있다는 얘긴 들어서 말이죠. 예를 들면, 정도령이라던가.”
순간 두로의 얼굴에서 웃음끼가 사라졌다. 이를 본 박인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떤가? 내가 내놓은 답이 어느 정도 정답과 가까운지 궁금한데?”
“네 녀석들 살아 돌아갈 생각은 하지도 마라.”
조금 전과 다르게 차가운 어조의 말이 두로의 입에 나왔다. 마치 중요한 걸 들켰다는 듯이 노려보는 두로는 그냥 들고 있을 뿐이 철퇴를 바로 잡으며 박인하를 노려보았다. 그의 부하들 역시 웃음을 싹 거두고 박인하 등을 노려보며 살기를 내뿜었다.
“안타깝게도 난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라서 말이지.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그쵸?”
“그렇지, 아가씨.”
어조와 어투는 변함이 없지만 박인하와 한울의 얼굴에도 웃음끼가 가셔 있었다. 진지하게 각자 부채와 짧은 칼을 꺼내든 두 사람과 비무장인 별을 상대로 두로와 그의 부하들, 토루 두 마리를 포위망을 형성했다.
“죽여버려!”
“가능한 일인지.”
두로의 외침과 함께 달려드는 그의 부하들을 상대로 박인하는 비웃음을 날리며 자신의 부채를 펼쳤다. 이윽고 거센 돌풍이 그들에게 밀어닥치어 공중에 순간적으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뭐…….”
“가능한 일이겠어?”
두로와 그의 부하들이 눈을 크게 뜨며 놀란 상황에서 박인하는 제자리에서 한 바퀴로 빙그르르 돌았다. 그러자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박인하 등의 주변에서 불면서 두로 등을 공격했다. 거센 회오리바람에 날리어 두로의 부하들은 이리저리 날아가며 주변의 나무와 바위에 부딪쳤다.
회오리바람은 어느새 박인하 등 주변에 두꺼운 바람의 벽을 형성했다. 두로의 부하들이 이를 돌파하고자 했으나
이 벽을 살이 찢기면서 토루 하나가 돌파해내긴 했지만 이내 한울이 토루 방향으로 손을 뻗히는 것과 동시에 움직임이 멈추고 말았다.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한울이 주먹을 꽉 쥐자 토루는 온 몸이 뒤틀리면서 절명했다. 또 다른 토루는 자신의 동료가 맥없이 죽는 걸 보고는 겁을 먹고 뒷걸음질을 쳤다.
“가능한 일이라고 봐?”
살짝 공중에 떠오르는 박인하가 부채를 두로를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일무리의 회오리바람이 두로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해봐야 아는 법이다!”
두로는 자신을 향해 돌진해오는 회오리바람에 겁먹지 않고 내달리어 쥐고 있던 철퇴로 내리쳤다.
밀어내진 못했으나 밀리지 않으며 두로는 박인하가 부리는 회오리바람을 상대로 있는 힘을 다해 막아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감명을 받았는지 두로의 부하들은 상처를 딛고 일어서서 다시금 포위망을 형성에 좁혀가기 시작했다.
박인하 등의 주변에 포진해 있던 회오리바람들이 모두 두로를 향해 돌격한 지라 무방비상태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이를 인지한 별은 두 팔을 벌려 박인하를 지키고자 다가오는 무리 앞을 막으려 들었다.
“언니, 걱정하지마. 가능한 일이 아니니까.”
현 상황을 인지하고 있는 것인지 전혀 동요치 않는 박인하는 손가락을 탁 하고 튕겼다. 그러자 회오리바람이 일순간에 전부 사라졌다. 대신 타오르는 화염이 박인하의 주변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리곤 박인하가 한 번 부채를 휘두르는 것만으로 화염은 마치 파도와 같이 두로와 그의 부하들을 들이덮쳤다.
이 놀라운 광경 앞에 두로와 그의 부하들은 속수무책이었다. 회오리바람과 달리 화염은 그들의 옷이나 몸에 들러붙어 그것들을 불사르기 시작했다. 더욱 무시무시한 것은 박인하가 다루는 이 화염은 나무나 풀은 멀쩡이 놔두고 두로와 그의 부하들만 불태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과연 대단허이.”
감탄하는 말을 흘리며 한울은 들고 있던 짧은 칼을 허공에 던져 올렸다. 그리곤 재빠르게 한 쪽 밖에 없는 팔로 허공에 휘저었다. 그러자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내던져진 칼이 사라지더니 이내 뒷걸음질 치던 토루의 목에 피가 솟구쳤다.
고통에 울부짖는 토루는 바람을 가르는 몇 번의 소리가 끝나자 온 몸에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 토루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한울은 다시금 손을 휘저었고, 어느새 그의 손에는 아까 허공에 내던진 짧은 칼이 되돌아와 있었다.
“어…….”
“언니가 많이 놀란 모양이네. 그럼 이만하도록 하자. 이 이상 시간을 보내면 조금 좋지 않을 터이니 말이야.”
이미 충분히 좋지 않지 않냐고 묻고 싶은 별의 어깨를 박인하가 탁 하고 붙잡았다. 이어서 한울이 아까 이 동산에 오기 전처럼 하늘위로 손바닥을 펼쳐 잠시 살펴보곤 박인하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리곤 아까 이 동산에 온 것처럼 어느새 그들은 중경성 서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