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대로는 되지는 않으……려나…….”
문제는 그 모든 게 박경 자신의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딸에 대해선 아비로서의 입장에서 약해지는 것도 있지만 박인하의 재능과 성격이 결코 통제를 쉽사리 할 수 있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어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져 한숨을 내쉬는 박경은 책상 위에 놓인 석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석상을 통해 유수부의 내부의 사정을 전해 듣고 있던 박인하는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녀는 걱정과 고민으로 힘들어 하는 자신의 아버지의 사정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런 그녀의 옆에 서서 지켜보는 별은 속으로 박경을 동정하며 물었다.
“이제 뭘 하실 건가요?”
이 이상 위험한 일에 자신을 끌어들이지도, 끼어들지도 말았으면 하는 그녀이나 그런다고 멈출 박인하가 아니었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별의 마음속에선 사실상 반쯤 포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음, 글쎄?”
“글쎄라뇨?”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의 별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도 잘 모르겠어.”
“예?”
“내가 하는 건 무대를 마련하는 거야. 무대 위에서 올라올 광대들이 무슨 행각을 벌일지는 광대들 자신들이 알 일이지. 뭐, 그래도 굳이 예측을 해본다면 새로운 세력의 등장? 일명 정도령과 추종자들!”
“뭔가 아련한 추억을 자극할지도 모를 이름이군요.”
오무의 지적에 박인하는 킥킥 대고 웃었다.
“정도령? 그거 분명……, 그 하늬동산에서…….”
생각하기도 싫은 기억이 별의 머릿속을 휙 하고 지나쳤다. 별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그 기억을 떨치고자 했다.
“언니, 그래봐야 소용없어. 어차피 그보다 더한 것도 보고, 듣고, 경험하여 기억에 남을지도 모르거든.”
마치 사형선고를 들은 것 같은 표정이 별의 얼굴에 떠올랐다. 박인하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싱글거리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밖에서는 진만의 무리가 쳐들어오고, 그런데 그건 나 아니어도 일어났을 일이고 말이지.”
“정도령의 경우에는 분명 아씨가 원인이겠죠.”
“응, 그럴 거야.”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대답을 하는 박인하는 기대감에 찬 어린 아이의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누구 하나의 도움이 없어선 불가능했지. 내게 정도령에 대해 알려주고, 그에게 접근할 길을 알려준 그 누군가가 말이야.”
“한울님 말씀이시군요.”
한 쪽 팔이 없는 노인이 일의 원흉이라는 걸 들은 별은 그 노인에게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응. 뭐, 그 사람 아니어도 대강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건 들었던 적이 있으니까. 그건 둘째치고 한울도 정도령의 행보에 흥미를 갖고 있다나봐. 정확히는 그로인해 미리내의 활동을 원하는 건지도? 후후후, 나도 기대는 되고 말이지.”
“어쨌든 그 노인도 아가씨와 한 패라고 봐야 하는 건가요?”
“정확히는 이해관계 일치에 따른 협력관계라고 해야겠지.”
침대에 누워 싱글거리는 그녀를 보며 오무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젯밤 이 방을 훔쳐보던 두 명을 떠올리며 오무는 정말 골치 아픈 아가씨의 곁에 자신이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의 그 둘은 어떻게 될까요?”
“몰라. 주랑이 알아서 하겠지.”
태평하게 모른다는 말이 나오는 그녀를 두고 오무는 어이없었다. 한편, 어제의 일을 방금 전에 들은 별은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울 거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랑이 그렇게 나올 거란 건 나도 알고 있던 일이었어.”
“그리고 그 덕에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그 정도령이란 사람이 이 중경에 끼어들 명분을 얻은 셈이군요.”
“응.”
이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는 아가씨는 과연 무슨 생각인건지 오무는 진지하게 궁금해졌다.
“네 궁금증은 점차 풀리게 될 거야. 뭐, 그것에 대해 네가 공감을 하는가, 이해를 하는가는 별개의 일이겠지만.”
박인하는 여전히 누워있는 채로 고개를 돌려 별을 쳐다보았다. 이제는 진짜 절망으로 향할 거 같은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인 박인하는 살며시 일어나 별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별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마, 언니. 언니는 내가 지켜줄 거니까. 설령 어떤 위험이 닥쳐도 언니는 다치지 않게 해줄게, 후후후.”
그럴 거라면 차라리 그냥 아무런 일없이 집안에만 있어줬으면 하다고 외치고 싶은 별이었다. 그보다 이런 대사는 하녀인 자신이 해야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도 그녀의 머릿속을 멤돌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지도 못하는 그녀를 두고 박인하는 박경의 사정을 전해주는 부적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지금까지가 서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 조금은 급전개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나름 기대는 해보라고.”
문밖에서 조용히 그녀의 그 말을 엿듣고 있던 석지만은 이빨을 빠득 갈았다.
이는 박인하의 발언에 대한, 정확히는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해서 결국 사단을 만든 그녀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현재 그는 정확한 사정을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박인하가 주도한 사태가 이 중경을 흔들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가 모시는 창령공에 대한 무례이자 불충이었다. 이를 용납하거나 용서할 관용따윈 그에겐 없었다.
동시에 석지만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인물에 대해서도 분노를 가지고 있었다.
최근 서문에서 일어난 사태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사적으로 조사하던 중 설마 하는 생각으로 몰래 박경의 집으로 들어온 그였다. 존재를 감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주술로 박인하의 방 앞까지 도달한 그는 예상치 못한 인물에 의해 옴싹달싹 못하는 중이었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산원 주랑이었다.
“나 참, 우리 아가씨는 참 얌전하기도 하지.”
비꼬는 언사를 내뱉는 주랑이 든 칼날이 정확히 석지만의 목에 닿아 그의 행동을 제지하는 중이었다.
석지만은 한낱 산원 따위가 자신에게 칼을 겨눴다는 사실도 화가 났지만, 고작 산원 따위의 접근을 눈치 채지 못한 자신에게도 화가 나 있었다.
“주랑 산원, 분명 죄인에 대한 심문을 하고 있던 걸로 아는데.”
“그거야 부하들이 알아서 하고 있죠. 그보다 우부승선께선 왜 이곳에?”
“난 감독관이다. 감독관으로서 불미스런 행동을 벌이는 용의자를 조사하던 중이다.”
“오호라, 그래서 시집도 안 간 왕실 종친의 여식의 방을 엿보고 있으셨던 거군요. 그것도 주술을 쓰고 몰래 말이죠.”
“…….”
주술을 언급하는 주랑 역시 어떠한 주술이나 도구를 쓰는 게 분명하다고 석지만은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주술로 존재를 감춘 그를 찾아낼 수 있었겠는가.
“네놈이 관여할 바가 아니다.”
“그게 그럴 수 없죠. 전 이 중경의 치안을 안정시키는 임무를 받으면서 중경유수이신 진경후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런 제 눈앞에서 이렇게 진경후댁에 침입하고 그분의 여식을 엿듣고 엿보려는 이를 그냥 둘 수야 있겠습니까. 지금 제 눈앞에는 우부승선께서 더 위험한 인물로 보이는군요.”
이 소리를 듣고 박인하보다 자신이 더 위험하냐고 따지고 싶은 석지만이었지만 그만뒀다. 어차피 박경을 오랫동안 곁에서 모신 이 주랑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말을 들을 가능성은 낮을 터이고, 무엇보다 이 상황에서 말다툼을 하며 시간을 낭비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 하면 석지만의 주술이 주랑에게 들키면서 약해지더니 아예 소멸하여 박경의 하인들에게 들킨 상황이었다. 박경의 하인들은 어느새 모여들어 웅성대고 있었다. 아마 방 안에 있는 박인하도 눈치챘을 것이다.
“죄송하지만 유수부까지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
반항하면 용서치 않겠다는 주랑의 시선을 받으며 석지만은 순순히 따랐다. 사실 주랑의 위협따윈 겁도 나지 않았지만 괜히 소란을 벌여서야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주랑은 앞서가는 석지만을 따라 가며 무슨 일인지 묻는 박경의 집사장에게 어깨만 으쓱거려보였다.
소란에 방문이 빼꼼 열리더니 박인하가 코웃음을 치며 석지만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