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가 보시죠”
수리가 알려주지 않았어도 이 일은 윤부장이 여기 온 업무 중에 하나였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판단이 섰다.
“예! 어디? …. 요”
지금까지 화주가 직접 탱크 위에 올라간 사례가 없었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쳐다보고 있었다.
“탱크 위에요”
적잖게 놀랐는지 눈알이 반짝이고 있었다. 지금까지 윤부장 같은 담당자와 같이 저장탱크 위에 올라 가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여자가 어떻게 올라간단 말인가에 스스로 의문부호를 붙여서인지 한참 동안 시선을 윤부장 시선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경이롭다는 의미의 눈은 절대 아니었다. 아주 단순히 놀란 눈이었다. 그리고 그 눈이 하나 둘 늘어났다. 담당자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른 다가와 놀란 눈들에 합류했다.
“직접 가 보시게 요? 저장 탱크가 많아 힘드실 텐데요”
“예! 직접 확인해야죠. 이렇게 많이 차이가 나는데 확인하지 않을 수는 없죠”
어디서 이런 호기가 발동했는지 모르지만 오기가 생겼다. 그건 아마 고동우 탓이었을 것이다. 여자라고 무시도 당하기 싫었다.
실제로 저장 탱크가 많았다. 5000톤짜리 저장 탱크 7개의 높이가 25미터나 되었다. 이를 바드득 갈았다. 만약에 감량이 나면 이 사람들과 같이 직접 올라가서 꼼꼼히 확인하라고 귀가 달도록 잔소리를 했다. 전부 다 타고 올라가고 내려 올 때쯤 다리가 후들거려 걷는 것도 힘들었다. 이럴 줄 뻔히 알면서도 어제 밤에도… 화가 났다. 25미터 높이의 7개 저장 탱크의 계단을 타는 데는 한나절이 걸렸다. 거의 초 죽음이 돼 다시 고객지원부로 들어 왔을 때는 정신이 몽롱했다. 악이 바쳤다. 괘씸했다.
“계산기 줘 보세요”
이를 악물고 그 놈이 가르쳐 준 대로 계산을 했다. 확실한 감량이 맞았다.
“저! 어떻게 할까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 놈이 가르쳐 준 대로 꼬박꼬박 보고도 했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선박에서 지켰다고 했다. 조금 더 뻥 튀겨서 계산도 같이 했다고 했다. 그 놈의 고대리에게 무시당하기 싫어서. 그런데 이게 뭐야? 이건 완전히 눈을 훤히 뜨고도 코를 베인 꼴이 된 것 같았다.
휴대폰에 손이 갔다가 뭔가 번뜩 떠올라 내려 놓고는 검정 담당자에게 수리가 시킨 대로 선박에서 받은 서류를 모조리 다 달라고 했다.
건네 받은 서류를 꼼꼼히 살피면서 밥도 먹지 않았는데 뿌듯한 포만감이 느껴졌다. 예습의 효과가 확실이 효력을 발휘하는 내내 저장소 담당자와 검정 담당자의 눈이 무시에서 경이로움으로 최종적으로는 경계로 변하고 있은 걸 확실히 감지되었다.
‘자식! 까불고 있어’
검정 담당자가 하역하기 전에 선박에 승선해 수량을 검사하면서 수량이 적게 실려 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선적 지에서부터 적게 선적되었다는 확인서를 작성해 선박의 일등 항해사에게 서명을 받아 둔 상태였다. 그런데 선적 지에서도 적게 실렸지만 하역 전에 이 사람들이 검사한 수량보다 저장 탱크에 받은 수량이 훨씬 적게 받은 것으로 나와 있었다. 500톤의 수량이 하역 중에 사라졌으면 아마 지금 울산 앞바다는 전국 방송에 나와야 정상인데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결정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결정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물어 볼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부장이다. 갑갑했다. 할 수 없었다. 밖으로 나갔다.
“여보세요. 오빠! 전데요”
“저! 여기서 전화하면 안됩니다”
수리 목소리가 아니고 저장소 직원이 위험물 장치 장이라 휴대폰 사용이 금지라고 했다. 할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먼저 주변부터 살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오빠! 어디야”
전화를 받자 마자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고래, 고래 소리부터 질렀다.
“어!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어? 왜? 왜? 휴대폰 액정 깨질라 살살 소리 질러라”
이 순간에도 이런 농담이 나오나? 어두운 밤 풀벌레 소리만 들리는 깊은 산 속에서 헤매는 기분이었다. 눈물이 벌컥 쏟아졌다.
“몰라! 몰라! 여기 와 봐”
부장이고 나발이고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입이 나발이었다.
“빨리 와! 나 어떡해? 어떡해?”
하필 그때 고대리의 무시하던 눈빛이 얼른 머리 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이 놈도 원망스러웠다. 만약에 이 놈을 여기서 만나지 않았으면 이렇게 나약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단 며칠 사이에 착각을 해도 너무 많이 했다는 후회도 밀려왔다. 너무 의지했다.
“빨리 와~~”
이왕 의지한 거 끝까지 의지하는 의향이 저절로 비쳐지고 말았다. 콧물에 막혀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눈물에 막혀 어디로 갈지도 모르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수리 마음도 복잡했다. 하필 이때 저 놈이 와서 이렇게 마음을 아프게 할 줄이야? 그 놈이 6촌 오빠란 걸 미리 알려줬다면 이런 사단이 날 짓은 다음으로 미루거나 시작도 하지 않았을 텐 데. 끝내 눈물을 흘리게 하고 말았다는 자책이 밀려왔다. 불과 며칠 전이지만 6촌 오빠라는 사실을 알기 전에는 너는 너고 나는 나였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은 아니지만 그래도 열 손가락 내에 들어가는 무역 회사에 취업하는 데 일조도 해줬다. 그래서 거의 30년 가까이 호의호식하게 해줬다. 그런데 지금 콧물에 막힌 목소리에 가슴이 아려 왔다. 또 오지랖 넓은 짓을 해야 하는가? 그건 아니지! 남의 여자 눈물에 자수할 이유는 전혀 없지.
“야! 임마! 너 거기 어디야?”
“응! 저장소”
계속 훌쩍이고 있었다.
“창피하게 거기서 계속 울 거야?”
“몰라! 몰라! 오빠 때문이잖아”
연어도 수리도 휴대폰을 귀에 대고 말도 되지도 않은 투정에 헛웃음을 치고 있다. 서로 모를 뿐이다. 수리는 ‘야! 너 몇 살이냐’라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상황이 아니란 걸 선박이 들어오기 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그것부터 얘기해”
“응! 감량이 500톤이나 났어”
“그래서?”
너무 무덤덤한 목소리, 인간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무미건조한 이 목소리. 또 들렸다. 연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사람은 오래 전에 내 사람이 아니다. 아니다. 지금은 신랑이라도 이 문제는 해결해 줄 수가 없다. 아주 잠시 어린 애가 아니 이 사람의 연인으로 데이트를 하다가 어리광을 부리고 말은 셈이다.
“걱정 마! 보험처리 하면 돼! 자네 회사가 가입된 보험회사 일을 내가 하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마! 그리고 빨리 거기서 나와. 그런 일은 용역 준 회사에 맡겨. 그 회사에서 책임지고 해결해 줄 문제야. 네가 다 해결할 것 같으면 그런 회사에 용역을 왜 맡겨? 호들갑 떨지 말고 얼른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