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한 움큼 뱉어낸 릴리움은 바닥에 쓰러져 숨이 약해져가는 레인트에게 다가갔다.
기사들이 순식간에 그녀의 주변을 둘러싸고 검을 들었지만 켄이 말렸다.
“내가 책임진다.”
릴리움은 자신이 이 후에 무엇을 할지 알지도 못하면서 기다려주는 기사들에 살풋 미소 지었다.
“당신처럼 당신의 동료들도 다들 착한 사람들이네요.”
“허억.. 헉.”
레인트의 머리를 들어 자신의 무릎에 눕힌 릴리움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쓸었다.
자신의 피에 절어 있는 손으로 쓸었지만, 이상하게도 아까처럼 그에게 독의 피해는 일어나지 않았다.
“생각을 바꿔 당신에게 죽으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 손에 죽게 생겼네요.”
이미 심장과 가까운 곳이 뚫렸기에 그녀의 목숨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힘든 기색도 지친 기색도 없이 평온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죽으려면 조금 시간이 더 있답니다.”
흐려진 시야지만, 그녀에게서 무언가가 변화하고 있는 것이 보여 무척 놀랐다.
진보라색 이었던 긴 생머리가 조금씩 색이 옅어지면서 서서히 싱그러운 풀잎처럼 연녹빛으로 퍼져나갔다.
“아주 오래전의 저는 독이 아니라 수많은 약초를 다루던 사람이었죠. 그리고..”
손가락으로 레인트의 입술을 가만히 쓸다가 엄지로 그의 입을 벌렸다.
“잊혀진 저희 가문의 비전. 평생에 단 한번밖에 쓸 수 없는 능력이 있답니다.”
허리를 숙여 그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지만, 죽지 않았다면 자신의 목숨과 바꿔 상대를 어떤 상태라도 살릴 수 있어요.”
코끝과 코끝이 거의 닿을 듯이 가까이 온 릴리움의 숨결이 그의 피부를 간질였다.
“지금껏 많은 것이 어긋나, 나쁜 일을 많이 한 제 목숨에 가치가 없겠지만, 당신이라서 오히려 잘 되었을지도요.”
시야가 흐릿하지만 않았으면 지금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을 텐데 레인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그저 숨만 껄떡껄떡 몰아 쉴 뿐이다.
“서로 상극이 되는 독과 약 두 성질을 가지게 된 몸인지라, 당신에게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후훗”
레인트는 그녀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이야기 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도 처음부터 멍멍하게 들려와 꿈속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고 있었다.
릴리움은 아드득 혀를 강하게 깨물어 피를 내어 입 안 가득 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자신의 피를 그가 삼키도록 도왔다.
목을 타고 반복적으로 넘어가는 피의 비릿함과 맡아 본적이 없는 진한 약초들의 향이 코를 자극하기 시작하자, 레인트의 눈이 갑자기 크게 뜨여졌다.
릴리움과 레인트의 입맞춤에서 시작한 연녹의 빛 무리가 점점 퍼져 둘의 전신에 둘러졌다.
무언가 성스럽게 느껴지는 장관에 조금 전까지 이 곳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전투의 현장이었다는 것을 잊을 정도로 기사들은 넋을 놓고 지켜보았다.
배에서 왈칵 흘리던 피들이 멎고, 치이익 타는 소리처럼 들리면서 레인트의 복부에서 연녹의 기체와 함께 그의 상처가 빠르게 아물어 가면서 구멍을 메웠다.
한참의 키스가 끝나고 입을 뗀 릴리움은 그대로 옆으로 기울어 쓰러졌다.
“차라리... 처음에 만난 사람이 당신이라면 달랐을...”
“바빠서 나중에 보지.”
“요즘 거의 보지 않잖아요. 부모님도 저희가 언제 결혼하실지 계속 기다리고 계세요.”
다급하게 손을 잡는 그녀를 팔을 휘둘러 거칠게 뿌리친 사내는 깜짝 놀라며 상처받은 그녀의 얼굴에 짜증나있는 자신의 표정을 들킬세라 순식간에 표정에 가면을 드리워 사랑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불안해하는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미안. 내가 업무에 짜증이 많이 쌓였었나봐. 이번 일만 끝나면 너를 찾아가려고 했어. 멋진 프로포즈도 따로 준비해뒀고.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 사랑해. 미르티.”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럽고 사랑이 넘쳤지만, 간악하게 휘어진 눈매와 틀어져 비웃는 입매가 사나웠다.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맞춤을 하고 떨어진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갈 길을 갔다.
늘 바쁜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며 매일매일을 아쉬움에 한숨을 삼키다 오랜만에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직접 약초들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를 반기는 집안은 온통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엄마? 아빠?”
“꺄아악~~”
“아가씨. 어서 피하...컥!”
도망치라고 자신에게 달려오던 하인이 뒤에 쫒아온 검에 베여 쓰러졌다.
겁에 질려 여기저기를 둘러보니 검에 베인 가족들과 가족처럼 함께 해왔던 이들이 주검이 되어 바닥을 빨갛게 적셨다.
“흐흐흐... 흐하하하하하.”
도망쳐야지만 그들의 시신에 경직된 몸은 잘게 떨릴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을 때, 미친 듯 한 웃음소리에 고장난 태엽인형처럼 끼긱 고개를 돌려보니 이곳에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한 이가 계단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항상 사랑한다고 속삭여주던 사람이 자신의 부친의 시신에 발을 얹고 또 다시 광소를 터트리는 모습에 지금 무슨 상황인지 판단 할 수가 없었다.
“아~~ 미르티. 네 가족들이 죽은 건 다아~~ 네 탓이야.”
“아...”
광기와 욕심이 섞인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런 그녀를 비웃으며 더 잔인하게 그녀의 아버지의 머리에 더러운 발을 비볐다.
“오랜 전통과 역사. 수많은 업적을 세운 가문의 비전을 찾으려고 되도 않는 연극한 한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헌데, 겨우 알아낸 게 뭐? 목숨과 목숨을 바꾸는 숭고한 희생? 푸핫~”
자신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었다며 가치 없는 집안에게 분노한 그의 발길질은 분이 풀릴 때까지 멈추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이미 차갑게 식은 시신만 더욱 처참해져갔다.
“뭐, 그래도 아예 얻지 못한 건 아니니, 그나마 나은가? 아~~ 표정이 왜 그래? 미르티 사랑해~ 그러니 알아주겠지?”
사랑스러운 연인을 대할 때 보였던 미소를 짓기도 잠시, 그는 허리를 굽히며 배를 잡고 웃겨 죽으려 했다.
“내가 이렇게 네 집안 연놈들을 대 놓고 죽여도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이미 즉각 사형감인 집안을 잡아들이라는 통보서를 받아 두었거든. 아! 반항하면 죽여도 된다고 명시 되어있네? 죄명이 뭔지 알아?”
챙겨온 서면을 읽어주다가 그녀를 돌아보니,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창백하게 하얘진 표정에 이제야 자신의 이상형이 된 것 같다 그녀를 칭찬하면서 그녀에게 터벅터벅 걸어갔다.
“칭송 받는 업적들을 위해 뒤에서 무고한 이들을 데려와 지하 감옥에서 잔인한 인체실험을 한 죄. 그것도 대대로. 즉시 멸문당해도 할 말이 없지.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목숨들이 희생되었는데. 누가 도와줘?”
그녀에게 바짝 다가와 볼을 톡톡 두드렸다.
“억울하다고 호소해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오히려 침을 뱉으면 그나마 나으려나? 크크큭~ 미르티. 가보는 잘 쓸게.”
“...째서... 어째..”
“응? 탐나니까. 돈이 되고 명성을 얻잖아. 내 가문도 약초나 병, 의술에 관계된 가문이지만, 억울하게도 늘 네 가문의 그림자에 치였잖아.”
사랑에 눈이 먼 자신 때문에 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에 왈칵 눈물을 흘리며 배신감과 억울함, 그리고 엄청난 죄책감이 속을 헤집는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의 표정은 못 볼 것을 봤다는 것처럼 경멸뿐이었다.
“그래도 그동안에 지낸 정은 정이니.. 시간을 줄까? 10분 어때? 10분줄께. 도망쳐봐. 아~ 역시 나는 참 자비로워.”
자기애에 취한 그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미르티의 눈동자에 병사들이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벽 한 켠에 자리 잡은 작은 상자 쪽으로 저절로 고개가 돌려졌다.
상자의 틈에 자신과 똑 닮은 눈동자와 마주치자마자 벌떡 일어나 상자 속에서 어린 동생을 꺼내 안아들고 그대로 도망쳤다.
넘어져도 일어났고, 신발이 벗겨져 발바닥이 까여 피가 나고 아파도 멈추지 않고 달리고 달렸다.
경사단들까지 범죄자 집안으로 몰락한 자신들을 잡기위해 혈안이 된 모습에 좁은 골목 그림자에 숨어 숨을 죽였다.
“도망쳐.”
“누.. 누나...”
미지의 약초를 찾고, 의술을 연구하기 위해 대륙을 다닐 수 있는 허가를 받은 덕분에 휴대하고 있는 통행구가 이리도 다행인지, 한명이라도 살 수 있는 방법은 둘이 서로 찢어지는 것이었다.
“처음 사용해서 어디로 갈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어린 동생이 어제 저녁에 처음으로 마력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좋아하며 모두의 앞에서 자랑했었다.
천운이다.
떨어지기 싫고 무서워 울고 매달리는 동생을 억지로 보내고 자신이 미끼가 되어 도망치고 도망치다 깜깜한 암흑을 맞이했다가 눈을 떴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남은 것은 허망함과 원망, 저주스러운 세상과 자신뿐이다.
한참을 넋을 놓고 자조하는 그녀에게 낮게 깔린 목소리가 불러 깨웠다.
“어쩌다 보니 주워 오게 되었지만, 눈빛이 마음에 드는군.”
청년의 옆에 있는 백발의 여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했다 칭찬해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이름...”
그녀는 이름을 곰곰이 생각하다 요염하고 매혹적으로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릴리움 블랙.”
“흠? 꽃이라.. 특이하군.”
“꽃말이 무척 사랑스럽답니다.”
흑백합의 꽃말은 저주. 지금 자신에게 더없이 어울리고 아름다운 이름이기에 매우 만족했다.
짧고도 긴 꿈을 꾸고 눈을 뜬 레인트는 상체를 일으켜 구멍이 났었던 자신의 배 부분을 한 번 쓸고, 버석하게 말라 누워있는 릴리움의 시신을 가만히 내려다 봤다.
“이것이 주군께서 말씀 하셨던 그런 건가?”
주먹을 쥐었다 피면서 죽어가면서 느꼈던 상황을 되짚어 상기했다.
생과 죽음을 바꾸며 영혼과 영혼이 서로 얽혀 상대의 기억이 꿈처럼 그에게 들어왔고, 그래서 알게 된 그녀의 과거와 상처들이 마치 자신이 겪었던 상황처럼 머리와 영혼에 새겨졌다.
신체를 다른 것으로 바꾸는 능력들 중에서 더욱 강력한 능력을 다루는 이들의 공통점은 직접 섭취해서 제 몸에 기억하는 것이었다.
특히나 그녀의 가문은 수많은 약학들을 기초로 매끼 식사를 하는 것처럼 약초들을 먹었고, 무수히 많은 약초들이 몸에서 섞이며 진화해 최고의 약이 되었다.
그것에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연구에 매진하여 의학을 진보시키는 것에 앞장서나갔다.
멸망해가는 세상을 위해 홀로 품은 자신의 주군과 생명의 존귀함을 지키기 위해 품은 그녀의 가문의 차이점은 없다 느껴졌다.
모로 누워있는 릴리움이 부서지지 않게 조심히 들어 근처의 나무 기둥에 앉혔다.
그리고 그녀의 마른 볼을 쓰다듬다가 자신이 선물해주었던 귀걸이를 잡자, 부스스 부서져 손바닥에 떨어졌다.
레인트는 귀걸이를 소중하게 자신의 앞섶에 보관하고 품에서 피에 젖었지만 작은 주머니 안에 있는 약초 잎을 하나 꺼내 물었다.
“미르티.”
그녀가 죽어서야 알게 된 본명을 한 번 불러본 뒤에 자리에 일어났다.
뒤에서 조용히 서있던 동료들과 기사들에게 갈라진 목소리로 질문했다.
“내가 한심하냐?”
“그럴 리가 없잖아.”
레인트의 어깨를 짚으며 칼라임이 되도 않는 소리를 들었다 핀잔을 주었다.
“하.. 처음에 각오하고 왔는데, 허탈하다.”
예상보다 너무나도 짧고 허망하게 끝난 싸움에 지금 심정을 꺼낸 켄의 마음은 다른 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찌 보면, 네가 큰 것을 막은 거야.”
별로 달래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동료들은 레인트의 업적을 세웠다.
재앙처럼 거의 막지 못하고 가장 크게 피해를 봤을 지도 모를 것을 레인트 덕분에 막은 것과 진배없다고 모두가 생각했지만, 그 이상은 입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 싸움이 끝나면...”
레인트는 모든 것을 저주하던 그녀가 끝까지 놓지 못하고 동생을 찾아 온 대륙을 뒤졌던 일을 대신 하겠다 그녀의 시신 앞에서 맹세했다.
주변을 정리하고 돌아가는 그를 뒤에서 소중하게 끌어안는 묘령의 여인이 언뜻 비쳤다 사라진 듯,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기이한 현상이 비친 듯 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