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안은 세이나의 시중을 만능 히데아에게서 이번에는 기필코 뺏기지 않겠다고 벼루고 있다가 세이나의 찻잔이 비자마자 샤샤샥 잔에 차를 채워주며 이겼다고 은근히 좋아하고 있었다.
세이나는 그런 그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의 옆얼굴을 눈에 새겼다.
“응? 차, 별로야?”
세이나의 시선에 바이안은 싫은 건가? 하며 그녀의 안색을 살피자 세이나는 이놈의 대형견은 멍뭉미가 한층 업그레이드되어 왜 이렇게 귀여운가를 연구해봐야겠다 싶어졌다.
“잘 마실게. 역시 반이 최고야.”
그가 따라준 차를 마시며 활짝 웃어주니 바이안도 덩달아 웃으며 그녀의 칭찬과 좋아해주는 모습에 어깨가 절로 들썩인다.
그때, 문가에서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시종장이 들어왔다.
“황후마마께서 오셨습니다.”
“갑자기? 들어오시라고 해.”
이야기도 얼추 마무리 되는 중이라 그녀의 등장을 반기며 안으로 들어오는 황후를 맞이했다.
바이안과 론, 하일만을 남겨두고 모두 나간 자리에 황후는 냉큼 세이나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엄마. 얼굴이 상당히 상기 되어있는데, 무슨 일 있으셨어요?”
이젠 자연스럽게 나오는 엄마의 호칭에 황후는 기분 좋게 자신이 나타난 이유를 신이 나서 풀었다.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호호호~ 세상에, 에바가 가출을 했지 뭐니.”
“풉. 켁켁 어 엄마. 에바가 가출을 한 건, 놀랍지만, 지금 좋아하시는 거예요?”
“어머, 내가 주책이었구나.”
입에 있던 차가 목에 걸려 기침을 하면서 황후가 자신이 주책이라고 한 말에 은근 동의했다.
“이건, 세이나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왔단다. 우리 아들, 딸의 친구의 일이기도 한걸.”
황후가 중요하다며 꺼낸 친구라는 단어에 문득 한명이 떠오른다.
“케리프씨요?”
황후는 맞다고 맞장구를 치면서 조금 전에 있었던 상황을 설명을 해주자 세이나는 어색하게 허허 탄식했고, 바이안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그래서, 지금 폐하는...”
“막 로도스로 내려간 참이란다.”
“아이고 골이야....”
사랑에 빠진 사람의 행동력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세이나는 은근히 딸 바보를 한 번씩 인증하는 황제의 노기가 가만히 있는 케리프에게 날아가게 생겼으니, 그가 진심으로 불쌍해졌지만, 그를 도울 길이 없어 어색하니 웃기밖에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에바의 남편으로 낙인이 찍힌 케리프였고, 그는 그것까지는 알지는 못하겠지만, 이미 그렇게 된 것, 일 년도 남지 않게 된 에바의 성인식 전에 가끔 만나면서 그 사이가 조금씩 진척이 되기를 빌었는데, 이건 너무 다짜고짜 일어난 일에 폭탄이 터지듯 터져 딸 바보 황제의 노기를 그대로 감내해야할 케리프의 정신에 애도를 표했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연예라는 것도 모르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에바였는데, 에바의 잘 못 된 행동을 지적해주며 대륙에 있는 연예서적도 추천해주면서 몇 가지를 알려주었더니, 아주 물꼬를 틀고 쏟아져 나오면서 여우가 다 되었다.
‘가만, 이거... 내 탓인가?’
자신의 책임에 통탄을 하고 있자니, 황후는 생글거리기만 한다.
“케리프라는 사내를 나도 보고 싶어서 함께 내려가고 싶었지만, 어쩌겠니. 내려가고 싶다고 함부로 막 내려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참아야지. 호호”
“폐하는 싫어하시는 것 같은데, 엄마는 케리프씨가 좋으신가 봐요.”
“그럼~ 한 번도 본적은 없지만, 우리 에바가 좋아하는 남자래 잖니? 나는 연예지향주의란다. 게다가 아들과 딸이 믿는 친구라는데, 안 봐도 호감 백배! 신용 백배!”
그것만으로 오케이를 해도 되는 것인지 고민스럽지만, 황후의 눈에 케리프는 이미 일등 사위감으로 자리 잡았다.
“어, 음.. 그래도 저기, 케리프씨는 아무것도 모르는...”
“응? 뭐라고?”
“...아니요. 아무 말도 안했어요.”
손을 예쁘게 오므려 귀에 대고 고개를 기울이면서 못들은 척하는 황후의 행동에 세이나는 급히 말을 돌렸다.
연예주의라고 하는 황후의 말에 어폐가 있는 것이, 서로 마음이 맞아야 연예가 성사 되는 것이다.
케리프는 아마도 한 번도 에바를 연예상대로 생각지 않고 있다는 것에 한 표를 당당히 던질 수 있었지만, 그 말을 했다가는 진짜로 좋아하고 있는 황후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행동이 될 터였다.
게다가 황후는 예전의 에바의 폭탄 발언에 둘이 진짜로 서로 좋아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기도 했고, 황태자의 일로 우울한 마음을 집안의 경사로 애써 더 즐겁게 포장하고 있을 황후이기에 입을 다물며 케리프에게 속으로 사과를 했다.
그래서 바이안의 옷깃을 슬쩍 잡아당겨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눈으로 물어보니 바이안도 뾰족이 내놓을 답이 없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 론은 황후가 있어서 무례를 저지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조용히 소파의 뒤에 몸을 쭈그리고 제 몸을 숨기고는 황제의 앞에 앉아 맹수에게 곧 잡아먹힐 노루처럼 굳어 있을 불쌍한 케리프의 표정을 상상이라도 했는지, 배를 부여잡고 소리 없이 재미지게 괴로워했다.
케리프는 속상해 하는 에바를 자리에 앉히고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높이를 맞춰 손을 잡아주며 달래주었고, 에바는 케리프가 잡아준 그의 손의 온기를 느끼며, 속으로 히죽이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케리프님 손 크다. 따뜻하고 부드러워. 시간아 이대로 멈추어라.’
온전히 자신을 걱정하고 바라봐주고 있는 케리프의 시선이 기쁘던 것도 잠시,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창백해진 집사가 그녀의 즐거운 한때를 깨버렸다.
“여...여여여 영주님”
갑자기 들어온 집사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밀고 들어온 한명의 거대한 맹수와 기사들 덕분에 케리프는 그대로 굳어버렸고, 에바는 어버버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며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을 발견하기라도 했는지, 순간적으로 혼을 몸에서 분리해버렸다.
금장으로 도색을 하고 있는 화려한 의복에 붉은 망토에는 황가를 상징하는 천공의 문양이 크게 새겨져 있었고, 빛을 받을 때마다 반짝이며 물결치는 금발이 퍽 어울리는 중년인, 케리프가 알고 있는 바이안이라는 황자님이 떠오르는 외모가 눈에 박혔다.
‘설마?’
“아바마마!”
그 설마가 에바의 한 마디에 역시나가 되었다.
황제는 범행현장을 덮친 경사단의 기사들의 무엇처럼 자신의 하나뿐인 딸의 손을 꼬옥 잡고 있는 호리호리한 청년을 눈에 세기며 황제는 이를 득득 갈았다.
아버지의 때 아닌 등장에 행여라도 케리프에게 불똥이 튈 까봐 당황하면서도 에바는 자리에 일어나 서둘러 그의 앞을 막아서서 케리프를 가렸다.
“비키거라.”
“싫어요. 케리프님께 뭐라고 하실 거잖아요.”
“에바!”
딸이 고집을 피우기 시작하면서 다른 남자를 감싸며 편을 드는 것이 아주 많이 서운했다.
에바는 자신이 케리프님을 너무 좋아하는 마음에 철이 없는 행동임을 알면서도 부모에게 있지도 않은 말을 주장했었던 것들이 떠오르자,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을 챙겨주는 케리프님이 자신 때문에 화를 입을 까봐 에바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아버지를 막으려 필사적이었다.
“케리프님은 아무것도 모르세요. 저 혼자 좋아하는 거란 말예요. 그때 그 말도 케리프님이 보고 싶어서 혼자서 짜고 친 트럼프란 말예요.”
“뭐 뭐라...”
두 사내를 향한 고백 아닌, 고백에 당사자 두 명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허... 후... 그래 화는 내지 않을 터이니 비키거라.”
“진짜?”
“그래.”
먼저 진정한 것은 황제였고, 누그러진 그의 말투에 진짜인지 확인 한 후에 비키기는 했지만, 아직도 믿을 수 없다며 케리프의 옆으로 후다닥 달려가 그를 호위하듯 버텼다.
서운함이 다시 밀려올라와 케리프에게 뿌득하고 이가 갈리려는 것을 이성으로 내리 눌러야하는 황제는 에바에게 눈길을 돌리자 자신을 경계하는 딸의 모습에 눈물이 핑하고 돌 것 같았다.
“지고하시고, 고귀..”
“되었다. 인사는 할 필요 없네.”
침착하게 황제에 대한 예우를 하려던 케리프의 인사를 막으며 근처에 있는 소파에 대충 털썩 앉음으로 그래도 딸을 뺏어간 도둑놈인 것에는 변한 것이 없다며 그만의 뒤끝이 작렬했다.
케리프는 꿇으려던 무릎을 피고 자신의 눈치를 살피면서 불안해하는 에바의 시선에 부드럽게 웃어주면서 자신은 괜찮다며 그녀를 다독였다.
케리프를 향해서 꿀이 뚝뚝 흐르는 에바의 표정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황제의 이가 뿌득하고 다시 갈리자, 자신도 맹수의 자식이라는 것인지 갸르릉 거리며 털을 곤두세우는 에바에 진짜 울고 싶어지면서 자신을 그렇게 바라봐주는 황후가 무척 보고 싶어졌다.
귀족이나 황족은 이미 익숙해 질대로 익숙해졌고, 하늘의 사람들이 지상인들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 룰도 이미 들어 알고 있는 케리프는 바이안과 론, 그리고 에바황녀에게 해왔던 대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달그락 거리며 사람 수대로 차를 우렸다.
“북부 지역에서 얼고 녹는 것을 반복하면서 그 곳만의 특수한 방법으로 말린 찻잎입니다. 대륙의 차가 황제폐하의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차를 황제의 앞에 먼저 놓은 뒤에 있는 기사들에게도 차례로 건네주었다.
그의 차를 받아드는 기사들 중에서 에바를 수행하러 내려왔었던 몇 기사들은 마치 자신들이 잘못한 듯 그에게 미안해하며 어색하게 웃었고, 케리프만의 트레이드마크인 사람의 마음을 풀어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차와 함께 건네주었다.
황제는 케리프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겠다며 날카로운 눈으로 그의 행동과 표정을 하나하나 관찰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차를 입에 가져다 댔다가 차의 깊은 향과 제 입맛에 맞아 은근 놀랐다.
덕분에 순간적으로 풀리려는 마음을 손으로 그러모아 심장에 꽁꽁 묶어 풀리지 못하게 한 뒤에 근엄한 척 무게를 잡았다.
“앉게.”
주객이 전도 된 상황처럼 황제의 말이 들려서야 맞은편에 앉았고, 에바는 케리프의 옆에 바싹 앉아 황제에게서 그를 호위했다.
“흐음...”
개인적인 감정이야 17년 동안 공들여 곱게 키운 딸을 한 순간에 뺏어가 버린 못 되 쳐 먹은 도둑놈이지만, 직접 만나 마주한 케리프라는 청년에게는 순수하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신분적으로 자신과 케리프는 땅과 하늘보다도 더 높을 진데, 빠르게 평정심을 찾더니 케리프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분위기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자신을 대하며 가지는 그의 태도에도 어디 나무랄 데가 없었으며, 에바가 조금 전, 고백한 내용에도 억울하다는 기색도 하나 없이, 이미 다 꿰고 있다는 것인지, 그의 미소에는 자애로움을 넘어 그의 머리 뒤로 후광이 나는 듯한 착각이 인다.
에바가 어디에서 케리프에게 반했는지 인정이 되면서 인정하기 싫다.
계속되는 침묵에도 불안해하기는커녕, 차를 홀짝이는 여유로운 태도가 억지로 따지자면 건방지기도 하면서, 대담해 보이기도 하는 두 가지의 감정이 맞물리는 것이 반복됐다.
황제 본인은 모르겠지만, 케리프는 이미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들에 이골이 날대로 난 사람이기 때문에 일찍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었다.
그렇기에 겉으로 나오는 여유로움인지라 속으로는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합격점으로 점수를 땄다.
“내가 왜 내려왔는지 알겠는가?”
“예. 어여쁘신 황녀님이 걱정이 되셔서 아버지로서 내려오셨다 감히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에바는 예쁘다고 하는 케리프의 말에 베죽 웃었고, 황제는 말을 예쁘게 하는 케리프가 못마땅하면서 옆에서 쑥스럽다며 손을 조물거리는 에바에 쓴 숨을 뱉었다.
물론 자신의 딸이 예쁜 것은 당연한 말이니 그가 보는 눈이 확실히 있다 인정하는 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