졌다. 또 진 기분에 울컥하고 목에 무언가가 치밀어 올라와서 어떻게 해서든지 뭉개기 위해서 다시 움직이려다 끝내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무심하게 내려다보는 바이안의 차가운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서리가 끼기 시작하더니 영혼까지 검으로 찌르고 베이는 착각이 일면서 자신도 모르게 흠칫 한 발 뒤로 물러나버렸다.
오히려 그것에 파드득 놀라 씨근대면서 그의 어깨를 치고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
무슨 일이 있긴 있었냐며 새까맣게 얼룩져 번진 메일을 북북 닦고 있자니, 하일이 카이덴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며 기가 차 물었다.
“저게 그 총명하다고 칭찬이 자자한 황태자가 맞냐? 멍청하다고 해야 맞는 말 아니냐? 뭐 저렇게 유치해. 애야? 저거 지금 싸우자는 거잖아.”
“나름 똑똑하다는 말은 맞아. 바이안만 연관되면 멍청해지는 건 저 미친놈의 특권이고.”
팔짱을 끼고 어깨를 으쓱여 한껏 비웃던 론은 심드렁하니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휘휘 돌려 파고 있는 바이안을 황당해했다.
“야, 너는 그게 뭐라고 가만히만 있어? 뭐라도 하나 갈겨주지.”
“같잖은 거 상대하는 건 시간낭비다.”
“큭큭 아, 그건 인정.”
“한대만 때려도 골로 갈 놈이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바이안의 짧은 대꾸에 카이덴을 깔보는 소리가 섞여 나온다.
힘의 차이가 크게 나는 강자가 약자를 마주 할 때는 그 차이를 가늠하기 위해 굳이 움직이지 않아도 한 번 마주하기만 해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카이덴과 마주 했을 때, 진심으로 때리면 한방에 훅 갈 것이 눈에 선했고, 반대로 카이덴이 조금 전에 본능적으로 강자에게 품어지는 기운에 밀려 뒤로 물러난 것이었다.
“황태자라는 놈, 난 처음 보는데, 저게 이녀석의 형이라고? 황궁의 미래가 암담하다.”
비꼬면서도 냉정히 내린 하일의 결론에 둘은 동시에 보는 눈이 있는 하일에게 박수를 보냈다.
“나만 없으면 잘 돌아가긴 할 거다.”
“제 감정 하나 추스르지 못하고 유치하게 구는 것이 무슨..”
“나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야.”
아직도 카이덴의 여운이 남았는지 신랄하게 떠드는 하일에게 마무리 하려 대답해준 바이안은 하일이 했던 말들 중 한 가지를 정정했다.
“나 저 사람 형님으로 생각한 적 없다. 놈이라고만 해라.”
갑옷을 대충 털고 닦아도 얼룩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메일을 내려다보면서 쯧 하고 절로 혀가 차졌다.
잉크의 얼룩을 깨끗이 지우려면 오늘 하루 잠을 자긴 글렀기에 절로 스트레스가 쌓였다.
“문득 드는 생각인데, 만약, 네가 단장이 되고, 저 멍청한 놈이 황제가 되면 보고서 올리러 수시로 만나야 되는 건데, 괜찮겠냐?”
기사단 내에서 바이안은 이미 다음 대의 단장이 될 것이라고 모두가 생각하고 떠들고 있기 때문에 나온 론의 당연한 질문에, 바이안은 그건 미처 생각도 하지 않았던 물음인지라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쉬운 결론을 고취해 보여주었다.
“네가 갈 거다.”
“뭐? 얌마.”
까짓 론을 보내면 되지. 라는 너무 쉬운 대답에 론은 뒷목 잡고 쓰러져 볼까 이 친구라는 놈을 때려볼까 고민했다.
“미쳤냐? 저런 썩은 물 같은 놈의 얼굴을 내가 수시로 보라고? 갈 때마다 맹장이 수시로 터질 것 같은 말을 하다니. 우웩~ 차라리 날 죽여라.”
“그냥 지금의 폐하가 장수하시고 오래오래 황제자리에 앉으시면 되고, 바이안이 단장이 된 후에는 폐하가 은퇴하실 때를 맞춰서 같이 은퇴 해버리면 되지.”
“오~ 명답이다.”
론은 역시 자신들의 팀에서 제일 유식한 놈이라며 하일의 훌륭한 정답에 찬사를 보냈다.
체내에 마력을 돌리며 입을 오물거리던 바이안은 크게 카악 소리를 낸 후에 바닥에 검은 핏덩이를 뱉어 냈다.
“오호~ 오늘은 독이냐?”
“역시 유치함의 끝을 보여주는 개새끼구만.”
기사인 자신들에겐 이런 독들은 하등 소용이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오늘은 독을 선물로 주는 카이덴의 대쪽 같은 애정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카이덴은 그 때 만난 이후로 심술을 부리기 위해서 현궁에 사람을 심어 두기라도 했는지, 한 번씩 바이안을 이런 식으로 괴롭혀 댔다.
바이안이 죽으면 더없이 즐겁겠지만, 지금은 요원한 일이니, 설령 그것이 아니더라도 편하게만 생활할 수 없으면 만족하는 듯한 반복되는 유치한 괴롭힘에 이젠 귀엽다고 해줘야 할 것 같았다.
“훈련에 손장난이 20번, 마실거나, 음식에 독 탄 것이 27번이네. 큭큭 어떤 독이 제일 맛있냐?”
능청스런 론의 질문에 바이안은 아직 독의 잔재가 남았는지 다시 한 번 피를 뱉어 냈다.
“이번 거. 배고파. 속 쓰려.”
오늘 점심 메뉴에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사과타르트가 디저트로 나오는 날인데, 바이안은 속이 쓰려 밥을 걸러야 한다는 것이 매우 못마땅하다.
이번에는 카이덴의 그 유치한 심술이 확실하게 효과를 보았다.
사과타르트는 헤넬아주머니가 해주는 간식까지 포함해서 세이나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었고, 그래서 자신도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된 간식이라 추억을 되뇌면서, 잠시간 느낄 수 있는 그 행복을 뺏긴 것이니 오늘 심사가 엄청나게 꼬인다.
덕분에 그날 하루 밑에 있는 기사들은 바이안에게 열심히 굴려졌고, 후배들은 바이안이 오늘따라 더욱 엄격하다며 자신들이 강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주는 선배님의 깊은 마음에 멋대로 감동을 하면서 더욱 열심히 굴렀지만, 바이안과 같은 팀인 동료들은 그가 지금 한참 뽀록이 난 심술을 풀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착각에 빠져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후배들을 매우 안쓰러워했다.
“불쌍한 것들...”
“착각하게 놓아두자. 저것들, 저놈 속을 알면 운다.”
“표정에 변화가 없으니, 어떤 생각을 하는지 누가 알겠냐? 그나마 녀석과 부대끼는 우리들이 유일하지.”
“아, 방금 조금 심했다. 저 새끼 갈비뼈 나갔어.”
“쯔쯔쯔”
“방금 힘 조절 실패 한 거야? 천하의 바이안이?”
“큭큭 그럼 어떻게 하냐? 녀석이 애정 한다는 사과타르트라고 사과타르트. 유일하게 감정이 고스란히 내비칠 정도로 애정하는 그 타르트. 나라도 힘 조절할 배려보다는 더 날 뛰어도 모자라겠다.”
모두는 바이안의 폭주를 감상하면서 한명씩 돌아가며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후배들을 애도했고, 점심도 거의 먹지 못한 바이안이 끝내는 맛도 못보고 다른 이의 뱃속으로 보내야 했던 사과타르트에게도 애도했다.
하필 오늘 나온 사과타르트가 그 어떤 때 보다도 가장 맛이 있었기에 그 분통은 더 했을 것이다.
이번에 나온 그 디저트의 맛 감상을 동료들의 입으로 전해 들었다.
감상을 전해주던 자신들도 상당히 맛있어서 살짝 놀랐기에, 불쌍한 바이안을 위해서 이번에 디저트를 만든 시녀를 따로 불러서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하려고 시녀들에게 물어보니, 주방에서 잡일을 도맡아하는 히데아라는 시녀가 이번에 담당을 했다는 정보를 몇몇 동료들이 알아 둔 상태였다.
“확실히, 나 단 간식들 별로 잘 안 먹는데 오늘 건 나도 열 개는 먹겠더라. 단 것도 상당히 맛있다는 것을 깨달은 하루였지.”
론은 오늘로 자신의 입맛이 바뀔 듯싶어진다고 추가적으로 덧붙이고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서 오늘 바이안 몫으로 나온 사과타르트는 론이 날름 섭취했다.
버리면 아깝다며 바이안이 미련을 가득 담아 넘겨준 것이기도 했고, 처음엔 조금 미안해하면서 때는 이때다 하고 게 눈 감추듯, 제 입과 배를 채웠다.
일주일 뒤, 그 히데아라는 시녀가 새벽에 일어나 만들어 주었는지, 눈을 뜬 바이안의 앞에 대왕 사과타르트가 배달이 되었다.
평소에 거의 쉴 생각은 하지도 않는 바이안이 그날 쉰다며 숙소에 짱 박혀서 커다란 타르트를 담은 접시를 꼬옥 안고 하루 종일 아껴가며 뇸뇸 맛나게 먹었다는 것은 10사단인 자신들만 아는 웃픈 일화다.
어둠속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죽을 용기도 없이 숨만 쉬었던, 그리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나를 구해준 소녀.
나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와 밝은 세상을 알려주고, 행복할 때 웃는 다는 것을 알려준 소녀.
힘이 들 때마다 옆에서 함께 있어준, 어떤 일에도 자신의 편을 들어준 소녀.
꿈을 꿀 수 있게 등을 밀어주었고, 나의 세상이자 전부가 되어준 귀여운 요정님.
너와의 그 많은 약속들을 지킬 수 없게 된 매일이 힘이 들었다.
그래도 마지막 하나, 기사가 되겠다던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하지만 그 곳에 네가 없기에 나는 더 아팠었다.
네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록 나를 기억하지 못해 가슴이 메어도 너의 미소에 다시 한 번 나는 구원을 받았어.
대현자 하이론 세이아나. 지금의 너를 가리키는 호칭과 이름이지.
진짜 약속이 이루어 졌어.
다른 이의 기사가 아닌, 너의 기사로서 옆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이리도 행복한 것이었구나.
그리고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 했던 남은 약속들을 이룰 수 있게 되었어.
네가 내 편이 되 주겠다 하였을 때, 나는 네 편이 되 주겠다던 약속.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자라던 약속.
너의 생일을 축하 해 주겠다던 그 약속.
네가 우울할 때 또 꽃을 가져와 줄게라던 그 약속.
약속들을 하나하나 이루었고, 아직도 남은 약속들과 또 늘어나는 너와의 약속들이 좋다.
그런 지금의 내 꿈은 조금 바뀌었다.
네가 당당하게 어깨를 피고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나는 너의 옆에서, 뒤에서 지키고, 혹, 너를 위협하고 방해하려는 이들이 있으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막을 거야.
너의 꿈은 내 꿈이고, 네가 가고자 하는 길을 내가 닦아줄게.
나의 요정. 나의 여신. 나의 하나뿐이자 전부인 너를 위해서 나는 산다.
구속 되어서 행동의 제약이 생겼음에도 바이안에 대한 적의와 악의는 카이덴 그가 미쳤다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비이상적이었다.
“네놈, 네놈만 없었어도. 네놈만 태어나지 않았어도 되었어. 다 좋았어. 네가 다 망친거야. 네가 전부 망친 것이라고.”
중얼대던 말은 점차 커지며 끝에는 악에 받혀 외친다.
바닥에서 바르작대는 그를 내려다보는 이들은 그가 한없이 초라하고 불쌍해 연민이 일었다.
“네 탓이다. 모든 것은 전부 다 네 탓이란 말이다. 왜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느냔 말이다. 네 놈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카이덴의 외침이 일순간 멈추었다.
그가 어떤 말을 해도 미동도 없던 바이안이 카이덴의 앞으로 걸어갔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자신의 앞으로 걸어 나올 것이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던 카이덴은 흠칫 몸을 떨었다.
바이안은 한 손으로 그의 멱살을 쥔 채로 그대로 들어 올려 제 시선에 맞췄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카이덴의 뺨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쫘악 하는 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졌고, 제 뺨을 고스란히 내어준 꼴이 된 카이덴은 아픔을 느낄 세도 없이 바이안의 손에 맞아 빨갛게 올라온 자신의 뺨이 또 한 번 쫘악 하는 찰진 소리와 함께 고개가 크게 틀어져야했다.
짝 짝 쫘악 연달아 울리는 그 소리는 적막한 홀 안에 하나의 소음이 되어 쉬지 않고 울렸다.
바이안의 한 손에 들어 올려져 빨갛다 못해 보기 흉하게 부어오른 뺨과 코와 입에서 선명히 피가 흘러나올 때 즈음에 바이안은 때리는 것을 멈추었고,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인지를 하지 못할 정도로 몸을 벌벌 떨면서 넋이 나가 있는 카이덴을 그대로 놓아주자 털썩하고 바닥으로 볼품없이 무너져 내렸다.
“과거,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고, 가지려 하지 않았다. 네 놈은 많은 것을 가지고서도 더 나에게서 뺏어갔지.”
바이안에 대한 공포에서인지, 아니면 때리고 밟아 댔던 그가 설마 반대로 맞을 줄은 몰랐던 충격에서인지 몸을 떨어대며 멍하니 올려다보는 카이덴을 무심히 내려다보면서 마저 말을 이었다.
“현제, 아무것도 없을 나는 가졌고, 모든 것을 가진 너는 정작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구나.”
“......”
“불쌍한 놈.”
정적이 이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졌다.
바이안은 더는 볼일이 없다는 듯 세이나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작은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숙여 제 얼굴을 묻었다.
“그분이 또 왔어?”
“....응. 숨 참았었는데, 조금 맡았나봐. 머리가 무거워.”
아직 카이덴에게 남아있는 향수의 영향으로 조금 힘에 부친다고 세이나를 의지하니 작은 손이 제 등을 토닥이고 쓸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