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까지 어떻게 도착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던 세이나는 힘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 의자에 앉아서 자신을 맞이해주고 있는 할아범의 무릎위에 두 팔을 올리고 머리를 묻었다.
“할아범....”
“끌끌 왜 이리 힘이 없을꼬.”
할아범의 다독이는 손의 온기를 느끼며 세이나는 고개를 살짝 틀었다.
“나. 할아범 아이지?”
“그럼~ 내 새끼지.”
평소에 거의 볼 수 없는 세이나의 의기소침함에 할아범은 무슨 일이 있었나, 걱정이 들었다.
“어렸을 때의 나는 어떤 애였을까?”
“끌끌끌 왜 그려?”
“내가 뭐하던 사람이었을까.. 해서...”
할아범은 굳이 물어보지 않고, 가만히 세이나의 뒷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난... 뭘까..”
중얼거리며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 모를 물음을 반복적으로 되뇌는 손녀에게 심경 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음을 확신했다.
“기억.. 찾고 싶어진 게야?”
세이나는 할아범의 무릎에 거칠게 얼굴을 부비부비하며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기억은 찾아도 그만, 안 찾아도 그만이야. 관심 없어. 그냥 물어 본거야. 근데, 할아범....”
“오냐~”
세이나는 몸에 힘을 완전히 뺀 듯 추욱 늘어졌다.
“나 어지러..”
그 말과 동시에 할아범은 세이나의 이마를 손으로 짚어보자마자 그대로 번쩍 안아들었다.
“아이고 이늠아. 아프면 아프다고 진즉 말해야 할 것 아니여. 불덩이네 불덩이야.”
“히잉...”
세이나는 어리광이 극에 치달은 듯 칭얼거리며 침대에 누워 할아범의 간호를 받아 그날 일찍 잠이 들었다.
오매불망 그토록 찾아 헤맸던 주군을 자신들의 대에서 찾아 기뻐해야 할 이 순간에 론과 바이안은 완전히 반대의 분위기를 연출하며, 방의 소파에 앉아있었다.
“후...하아... 상황이야 어쨌든, 상부에 보고해야지.”
“아니. 보고는 하지 않는다.”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오는 바이안의 대답에 론은 인상을 잔뜩 구겼다.
“장난해? 뭐, 그녀가 싫은 것은 하지 않고 싶어. 라며 말 할 상황이냐?”
세이나를 찾고 난 후에 그가 했었던 말을 흉내 내며 바이안을 질책했다.
“아예, 보고를 올리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야. 지금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다.”
“난 네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표정이 거의 없는 바이안의 얼굴로는 그의 감정이나 생각을 전혀 읽을 수 없는 것이 특징이라도 여태까지 답답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던 론이지만 오늘은 그 표정이 무척 답답하게 다가왔다.
“500년 만에 나타난 대현자야. 이 것은 우리들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모를 네가 아니잖아. 이 세상의 균형을 지탱하는 중대한 일이다. 일단은 상부에 보고하는 것이 순서야. 게다가 아가.. 제수씨..아씨~ 주군이 싫다고 하는데, 우리가 억지로 모시고 가지 못해.”
심각하게 말을 꺼내다가 세이나를 부를 호칭의 정리가 되지 못해 짜증 섞인 분을 머리카락을 헤집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 500년.”
론의 혼란이 어쨌든, 바이안은 론의 말에 포인트를 짚어내며 말을 잘랐다.
“세나가 살아있었다는 것에 그저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것은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세나가 대현자라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그동안의 의문의 조각들이 맞춰지더라. 특히, 9년 전의 일도.”
“무슨 말이냐?”
“눈치 챌 수도 있는 부분이었는데, 내가 눈이 어두웠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바이안은 세이나의 할아범이 세이나를 거두었을 때의 이야기와 자신의 추론을 풀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마력의 영향으로 대 사막화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1초도 안 되는 한 순간이다.”
검지를 세워 올려 1초를 강조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카카리아 마을이 있었고, 어떤 생명도, 잔해도 남지 않은 장소에서 할아버님께서 세나를 발견했다. 그건, 단순한 기적이 아니야. 그렇다면 어째서 발견했을 당시의 세나의 온몸이 피범벅이었을까?”
“....진짜냐? 그거... 그렇다는 것은, 누군가가.. 아니. 단체일 수도 있겠지. 아무튼, 일부러 대현자를 찾아 살해하는 존재가 있다는 뜻이잖아.”
바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사막화가 일어나기 전, 마을 사람들을 잔인하게 도륙했을지도 모르지. 그것도 세나의 눈앞에서... 세나는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고 하니까. 게다가, 처음 눈을 떴을 때, 무언가에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고 하더라.”
말을 이어가면 이어갈수록 바이안에게서 살기가 피어오르며, 방안을 가득 메웠다.
마력이 담겨진 살기가 버거워지기 시작하자, 론은 자신의 마력을 운용해 온몸에 돌려 보호하며 물었다.
“그 곳에서 어떻게 무사히 살아남은 지도 의문이지만, 더 큰 의문은 500년이다. 사람의 평균 수명은 70년에서 80년이야. 우리 같은 마력을 쓰는 사람들은 그 정도에 따라서 늘어나지만. 그렇다 해도, 최대 150년이다. 그런데, 그 500년의 공백동안?”
커진 목소리로 묻듯 대꾸하는 말에 바이안은 그저 고개만 끄덕인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대현자의 탄생이야. 대현자의 탄생을 아는 방법은 단 하나야. 현자의 돌의 반응.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우리들 보다 먼저 대현자를 알아보고 살해를 한다는 거야?”
질린 표정으로 의문을 던지던 론은 눈을 크게 떴다.
“너! 보고하지 않겠다는 뜻이.. 설마...”
“맞아. 내부에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알게 된 것이 적기 때문에, 아무도 믿을 수 없어.”
“하...하하....하아~ 미치겠네.”
론은 고개를 푹 숙여 양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으며 혼란과 짜증을 표현하다가 하던 행동을 모두 멈추고 무겁게 입을 뗐다.
“내부에 적이 있다고 가정하면, 아주 깊게 뿌리박고 있겠네.”
“......”
바이안의 대답이 들리지 않아도 론은 알 것 같았다.
“기억상실. 그리고 오늘 본 심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의 격한 거부반응... 그래. 나도 네 의견에 동의한다. 보고를 올리는 것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미뤄야지.”
혼란스러움을 가라앉히며 납득 하고, 다시 입을 뗀다.
“주군이 살아 계시다는 것은, 적은 그녀가 생존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볼 수 있으니까, 최대한 숨기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결론을 내리고 앞으로의 방향이 잡혀 조금 표정이 좋아져 자세를 편히 하니, 친구로서의 걱정이 올라왔다.
“넌... 괜찮겠냐?”
“뭐가?”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녀가 너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아니잖아. 예전에 네 약혼녀였을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의미가 없어지는 거야.”
론이 무엇을 걱정해 주고 있는지 알기에 바이안은 작게 입 꼬리를 올려 웃었다.
“주제파악은 하고 있다. 모시고 지켜야할 주인에게 감히 이뤄지기를 바라지는 않아.”
“안 아프냐?”
“안 아프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래도 지금 이 관계엔 매우 만족해.”
바이안이 일부러 괜찮은 척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정말로 만족해하고 있었다.
“당당하게 옆에 있을 수 있는 명분이 생긴 거야. 헤어지지 않고 쭉 옆에 있을 수 있어. 그리고, 기사가 되어서 지켜주겠다는 그때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이 난 제일 좋다.”
친구의 더 없이 환한 표정을 9년 만에 보게 되었는데, 왜 기쁘지 않을까.
“론... 고맙다.”
“이야~ 오래 붙어있고 봐야겠네. 네 입에서 처음으로 듣는다. 그거.”
론은 평소의 자신의 모습으로 애써 돌아가며 챙겨뒀던 술을 꺼내 기운차게 술 마시자라고 외치며 일부러 더 분위기를 띄웠다.
할아범의 잔소리가 없이 오랜만에 늦잠이라는 꿀잠을 자던 세이나는 밑의 층에서 떠드는 소리에 일어나야했다.
“시끄러...”
크게 하품을 했지만 잠이 깨지 않는지, 잠에 취해 비몽사몽으로 방에서 나와 계단을 타고 내려가던 세이나는 1층의 풍경에 남아있던 잠이 순식간에 싸악 달아나버렸다.
아침에 세이나의 집에 찾아온 바이안에게 할아범은 어제 세이나가 아팠다는 것과 우울해 하던 부분을 지적하면서 설교를 해댔다.
그 덕분에 바이안은 죄인마냥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듣고 있는 상황이 재밌어 죽겠다며 론은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서 그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뭐....”
“여~~ 좋은 아침.”
세이나의 인기척에 론은 손을 흔들어 주며 반갑게 인사를 건냈다.
이미 해가 중천에 뜬 한 낮이었지만, 론의 환한 아침 인사에 세이나도 마주 손을 흔들어주며 예쁘게 웃었다.
“이야~~ 좋은 아침.”
하지만 그것이 훼이크인 듯 언제 밝게 인사를 했냐면서 급 정색을 하고 쏘아 댔다.
“내가 이렇게 반겨줄 줄 알아? 어제 내가 뭐라고 안든?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있어?”
세이나의 등장과 함께 할아범과 바이안은 하던 대화를 멈추고 후다닥 다가왔다.
“아이고 이늠아. 더 자지 왜 일어났어?”
할아범은 거칠고 두터운 손으로 세이나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내렸구먼~ 끌끌”
할아범의 따뜻함을 만끽하다가 세이나는 옆에 다가온 바이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할아범은 이것들이 뭐하는 놈들인 줄 알고 집에 들여놔?”
대놓고 세이나에게 까이자 추욱 쳐졌다.
‘아... 또 꼬리가 보인다.. 귀가 보인다..’
모르는 척 하면서 귀와 꼬리를 내리고 끼잉 하는 듯한, 바이안을 애써 외면하는 세이나와 바이안을 흐뭇하게 보며 할아범은 끌끌끌 웃었다.
“잘 알고 들였지. 아암~”
“허..”
“손주사위랑 손주사위 친구자녀.”
너무 당당하게 대답하는 할아범의 말에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태클을 걸 기운이 없는지, 대신 한 숨을 내쉬었다.
“언제는 케리프씨한테 시집보낸다고 허구헌날 잔소리 하더니, 언제 갈아탄 거야.”
“끌끌끌”
그때 조용히 있던 바이안은 케리프와 시집이라는 단어에 꿈틀했지만, 다행히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뒤에서 능글맞게 웃으며 보고 있었던 론만 배 잡고 큭큭거릴 뿐이었다.
“배고프지? 오늘은 할애비가 밥 할 테니까. 어여 앉아 있어.”
세이나를 빈자리에 앉히고 할아범은 바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셋만 남은 공간에 세이나는 아직도 능글거리며 생글생글 웃는 론을 째려보아 주며, 할아범에게 들릴세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안한다고 했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라서 론은 여유로운 태도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 걱정하지 마. 싫다는데 어쩌겠어. 억지로 강요 안 해. 그냥 우리들이 멋대로 붙어 있을 거니까, 그 부분 잘 부탁해~”
어쩜 저렇게 때리고 싶은 충동이 쉽게 느껴지는 놈일까 하며 주먹을 스윽 말아 쥐었다가 바로 풀어 한손은 턱을 괴고 다른 손으로 식탁을 톡톡 쳤다.
“내가 아무리 난리를 쳐도 소용없겠지. 안 돼는 것에 힘 빼는 것도 싫기도 하고,후~ 난 귀찮은 건 딱 질색이니까, 귀찮게 굴지 마. 그리고 그거 꺼내기만 해봐. 꺼내는 즉시 얄짤 없을 줄 알아.”
세이나가 론의 품속에 있는 물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지칭하자 옆에 서있던 바이안이 고개를 숙여 세이나의 시선과 맞춰 안심시켰다.
“괜찮아.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아. 걱정 하지 않아도 돼.”
론은 세이나가 더 길길이 날 뛸 거라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바로 선을 그으며, 자리를 정리하는 세이나의 모습에 그 것이 그녀만의 허락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피식 웃고는 자리에 일어난 론은 세이나의 어깨를 짚었다.
“너한테 해가 되는 것은, 어떤 것도 하지 않을 거다. 잘 지내보자고 아가씨.”
그리고는 그대로 세이나를 지나쳐 쪼로록 주방으로 사라졌다.
“아이고~ 할아버님. 저도 돕겠습니다. 뭐 할까요?”
“끌끌끌끌”
주방에서 들리는 대화 소리를 들으며 세이나는 표정을 스르륵 풀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어제 갑자기 찾아온 목소리와 두통에 시달리며 순간적으로 둘에게 심하게 대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둘의 탓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처음 만남이 어땠든, 둘이 싫지만은 않기도 했었고, 오히려 지금은 왜인지, 그 둘의 존재가 몹시도 든든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원인의 불안과 가끔씩 찾아오는 보이지 않는 공포가 자연스레 사라지는 것 같다.
‘잃어버린 내 과거의 기억과 동시에 남겨진 악몽. 한 번씩 나를 괴롭혀대는 목소리와 나를 찾아온 기사. 그리고 내 과거에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 남자.’
가만히 곱씹던 세이나는 모든 것을 알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고, 귀찮다며 피해도 부딪혀야만 할 일은 언젠가는 찾아올 것이 멀지 않음이 느껴진다.
그래도 될수록 늦게 찾아오기를 조금은 바래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