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말로 사람의 영혼을 가진 식물이라는 뜻의
미프라친카치아'는 결벽증이 강한 식물로 알려져 있었지만
알고 보면 한없이 고독해서
누군가의 지속적인 관심을 갈망하는 음지식물이래요.
이 식물이 바로 제 모습이 아닌가 싶어요.
저뿐만 아니라 현대인의 모습이기도 하지 않을까 생각돼요.
군중속의 고독. 너무나 외로워서 스스로 아름다워졌는데
정작 사람들이 와서 닿으면 기겁하는 현대인들이 많지요.
저 역시 스스로 강한 척, 고귀한척,
많은 사람들에게 미소 지어 주면서도 제 자신은 항상
외롭게 했더라구요.
저는 미프라친카치아처럼 누군가 와서 저를 지속적으로
살펴봐 주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 찬
외로운 현대인이라는 것을 발견 하게 되더군요.”
이상하게 그 순간 J씨가 의사가 아닌 내 친구가 맞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혹적인 비음이 섞이지 않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사람을 몰입시킬 수 있는 매력, 아니 마력을 가진 J씨가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녀를 향해 나도 모르게 뻗었던 손을 엉거주춤 무릎 위에 내려놓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J씨의 반응을 계산하지 않은 내 마음과 행동에 다소 거북한 긴장감이 일었다. 잠깐 침묵이 흐르는 것을 기다렸다. 내가 기다려 준 것인지 J씨가 기다려 준 것인지 모를 그 시간이 짧지는 않았다. J씨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치켜뜬 눈에서 조바심이 번뜩였다. 내가 뭔가 반응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굳게 닫으리라 생각했던 입이 뭐에 홀린 듯 열렸다.
“선생님, 그래도 가시 때문에 아무도 안아주지 않고
스스로도 모든 것에서 거리를 두어야만 하는
고슴도치보다는 희망적이네요.
적어도 계속 관심을 가져줄 한 사람을 바라는 희망은
언젠가는 실현될거라고 믿을 수 있을테니까요."
어디서 그런 말이 생각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심을 담아서 얘기했더니 J씨가 선홍색의 잇못을 드러내고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윤주씨가 저를 위로해 주네요. 고마워요.”
“저 들으라고 그 이야기 하신 것 알 것 같아요.
저도 미프라친카치아군요.
자, 윤주 미프라친카치아에게 물 좀 주시겠어요?”
순간 긴장이 풀렸는지 타들어가던 목을 적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J씨는 그녀 특유의 광대뼈와 눈 가의 잔주름이 더 깊게 새겨지도록 짙은 미소와 함께 물을 따라 주었다. 차갑고 밍밍한 맛이 아닌 따뜻하고 들큼한 맛이 났다. 무엇에 홀렸는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엄마 앞의 귀여운 아이처럼 똘망한 눈으로 J씨를 바라보았다. 병원을 들어서면서, 그동안 치료가 소용없었던 것 같아서 앞으로 상담 받지 않겠다고 했던 감정의 폭발이 수년전의 일처럼 멀게 느껴지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J씨가 이제 못 보는 거냐고 장난기 있는 목소리로 놀리듯 말했으나 기분 나쁘지 않은 것도 놀라웠다. 장난을 장난 자체로 받아들였다는 점을 칭찬한다고 하면서 J씨는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감정의 기복이 이토록 심하게 나타나는 것에 아직 나는 심각한 환자구나를 짐작할 수 있을 만한 일이 또 일어났다. 같은 대상이 금방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하는 감정선이 경악스러웠다. J씨의 칭찬에 나는 반사적으로 뭔가 화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명랑한 어조로 이번 주 숙제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알아 맞춰보라는 말에 잠시 생각했다. 답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 머릿속에만 있는 숙제를 내가 어찌 알 것이라고 맞춰보라고 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좋다 좋다 하니까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구나 싶었으나, 침묵을 길게 유지할 수 없어서 무슨 말이든 해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힌트를 좀 달라는 말이 간신히 입을 따라 어기적거리며 나왔다. 그러자 J씨는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말해주었다.
"움직이지 못한 채 지속적으로 만져 줄 사람이
다가와 주기만을 기다려야만 하는
미프라친카치아보다 우리는 희망적이지 않아요?
스스로 먼저 다가갈 두 발이 있으니까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힌트를 듣고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산조인 차’를 너무 많이 마셔서 신경이 너무 안정되다 못해 신경세포가 잠자게 된 것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생각의 곤란함으로 얼굴근육을 움츠리고 삐죽거리는 모양을 J씨가 봤는지, 이번 주 숙제는 ‘걸어다니는 미프라친카치아 되어보기’라고 말해 주었다. 본래의 미프라친카치아처럼 가만히 있지 말고 먼저 다가가서 생명력을 연장해 보는 것이라고 했다. 진지하게 말하는 J씨와는 달리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 웃음의 정확한 의미를 나 역시 알지 못했고 지금도 알지 못하겠다. 그저 무안했을 수도 있는 의사 J씨에게 서둘러 긍정의 반응이라는 뜻을 전달하려 말을 했다.
“선생님 앞에서는 늘 어린애가 되는 것 같아요.”
“흥미롭지 않나요? 아무도 모르게 어린애가 되어 보는 것.”
“상처받기 전의 행복했던 어린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드니까
흥미롭다는 말이 적격인 것 같네요.”
우리는 이렇게 웃으며 예의적으로 길어졌던 여섯 번째 데이트를 즐겼다. 나는 동심에 빠져 마냥 웃고 있었는데 예리한 J씨가 숙제를 다시 한 번 짚어 주었다.
“숙제가 너무 추상적이죠? 실천하기 편하도록
영화한편 소개할게요.
‘프린세스 다이어리’ 영화를 감상하길 바래요.”
“그 영화 예전에 극장에서 봤어요.
그냥 공주얘기 아니었나요?
그냥 시시했다는 인상밖에는 생각나는 게 없는데요.”
“지금 다시 보면 느낌이 다를 거예요.
오늘 가지 않고 제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J씨의 말에 상담의사로써의 친절함을 넘어서는 다정함이 담겨있다는 것을 느낀 그날, 싱그럽게 빛나는 미프라친카치아 실물 사신을 한 장 얻어서 병원을 나왔다. 내 마음속의 어둠이 숨을 조여오기 전에 마음에 불을 켜는 작업이 드디어 그날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 같았다. 소박한 그 건물을 빠져나오는 길이 을씨년스럽다고 툴툴거리던 내 중얼거림도 그날 이후로는 하지 않게 되었다. 환형동물처럼 구불구불한 그 좁은 골목길이 탁 트여진 8차선 도로보다 더 럽게 느껴졌다. 허밍으로 콧노래까지 저절로 나왔다. 학원으로 출근하기 전에 네일아트숍에 들러서 미프라친카치아 사진을 보여주고 손톱 장식으로 올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후로도 계속 내 손톱 끝에는 트레이드마크처럼 '미프라친카치아' 모형이 장식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