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일아트숍 문 앞에서니 숨이 트이는 상쾌함을 맛보았다. 산소호흡기를 찾았으니 본격적인 숨을 쉬어 보자 싶어 호흡기를 여는 찰나, 산소 대신 일산화탄소가 밀려와서 그나마 있던 숨통까지 막히는 기분이었다. 일산화탄소는 바로, 설날을 맞아서 집에 가려고 손톱 팁(손톱에 달아주는 장식)을 제거하러 왔느냐는 네일아티스트의 ‘솔’정도 음 높이의 목소리였다. 상냥한 톤이었지만 심히 거슬렸다. 내 산소인 손톱 팁을 뺏어가겠다는 일산화탄소같은 말에 뭐라고 앙칼진 독설을 쏟아놓고 탈출할까 고민되었다. 잠깐의 정적과 무채색의 내 표정에서 말실수를 느꼈는지 ‘솔’음 높이의 상냥함은 ‘라’를 넘어 ‘시’높이까지 분위기 수습용의 애교를 자랑하며 이어졌다. 어제 긴 네일 팁을 붙이고 갔는데 하루 만에 다시 방문했고, 손에는 명절 선물세트를 들고 들어왔기 때문에 본가에 가려고 손톱팁을 떼러 온줄 알았다는 말을 변명으로 내놓았다.듣는 순간 머리꼭지가 터지는 것만 같았다. 학원장이 명절이라고 준 선물을 들고 갔을 뿐이고 본가에 간다는 말 하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지껄이는 저 연탄 같은 여편네가 있는 한 일산화탄소를 마실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나 무채색 표정과 어울리는 건조한 목소리로 "너나 본가 가지고 가세요"라는 말을 뱉으며 선물세트를 줘버리고 나왔다. 문을 박차고 나와서도 화가 사그러지지 않았다. 먹고떨어지라는 저속한 말과 함께 욕을 한바가지 퍼부어줬어야했는데 못했던것을 억울해하며 발을 동동 굴려댔다. 그날은 뭐 하나 만족스러운 시간을 갖지 못했다 싶어서 목구멍과 눈이 심하게 따가웠다. 이와 잇몸 사이로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가는 것 같아 혀를 간헐적으로 굴려 윗니 아랫니를 닦아내고 있었다.매일 산소를 선물해주던 네일아트숍이었는데 그곳에 있는 내 전용 산소통을 누군가 훔쳐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뇌에 박혔다. 내 산소는 어디 있을까? 어디다 옮겨 놨을까? 생각을 하자니 이와 잇몸사이의 벌레가 뇌에까지 퍼져 스멀거리는 것 같았다. 뇌에는 혀가 없는데 무엇으로 닦아내야 하는지 물음표가 눈앞에 둥둥 떠다녔다.
파란 물음표가 시퍼레지더니 새하얗게 되어 눈앞에서 현란한 춤을 선보일 때 내 눈동자도 허옇게 질려 주위사람들까지 질리게 할 것만 같아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감은 눈 속에서 물음표들의 춤이 더 격렬해지자 내 몸도 외마디 비명과 함께 춤추듯 휘청거렸다. 일산화탄소를 마셨기 때문에 쓰러져야 한다는 생각이 거미줄처럼 엉켜 머릿속을 휘어 감는 것 같았다. 혼란스러움의 줄이 감기고 감겨 팽팽해지는 순간 119 구급차 소리가 들렸다. 길거리에서 쓰러진 나를 신고정신 투철한 누군가가 구급차에 태워 대구에서 제일 큰 병원으로 보낸 것이 여섯 번째 일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의사 P의 상판대기를 보게 된 순간 ‘오이디푸스’처럼 두 눈을 찌르고 눈 먼 자 노릇을 하고 싶었다. 내가 P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는 한결같이 지저분함을 유지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의사 가운을 입고 있지 않았다면 왜 내 앞에 있나 하고 치안취급을 했었을 만한 몰골이었다. 두상크기에 비해 빈약해 보이는 머리카락은 기름에 푹 재워진 오래된 잡채 당면처럼 떡 져 있었고 깎은 지 이틀은 넘었을 듯한 턱선의 수염들은 검푸르스름 하게 올라와서 두덕두덕한 그의 볼 살과 함께 오른쪽 귀에서 왼쪽 귀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U자를 그리고 있었다. 짧고 둥근 그의 코 위에 얹어진 금색 원형 안경이 그의 허여멀건한 얼굴을 더욱 찐빵처럼 보이게 했다. 안경너머 눈두덩은 벌에 쏘인 것처럼 부풀어 있어서 외꺼풀 눈이 더 작아보였다. 마시멜로 캐릭터 인형에 안경을 씌우고 머리와 턱을 검정털실로 장식한 후 기름에 한번 담갔다 꺼내면 P의사의 몰골과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며 아픈 중에도 쿡쿡 웃었을 정도로 그는 지저분함과 우스꽝스러움을 겸비한 외모였다. 호감과 신뢰감을 찾아볼 수 없는 몰골로 내가 쓰러진 병인을 발견 못한 P는 세 번째 실려 갔을 때부터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라고 권했다. 그 말을 듣고 P의 면상에 대고 고함지르며 항의 했었다. 그 병원에 발을 들이면 손에 장을 지진다는 말과 욕을 쏟아놓고 침까지 뱉고 왔었다. 그러나 호언장담이 무색하게, 쓰러진 내 번째, 다섯 번째 그리고 여섯 번째 바로 그날도 정신과 치료를 권하는 P의 상판대기를 보고야 말았다. 모욕을 당했음에도 P는 한결같이 듣기 싫은 정신과 치료를 권유 했다. 그는 욕 먹을 각오 한 것처럼, 칼날 같은 내 혀가 싸늘하게 쏟아놓는 욕이라는 한파에도 푸르름을 유지하며 견디는 소나무 같았다. 그날도 청송같이 정신과 치료를 권하는 P에게 욕을 퍼부었다. 설 연후 전날에도 병원근무하며 스트레슨 받는 당신이야말로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라는 말을 앙칼지게 하고는 링거속의 약도 반 이상이나 남겨둔 채 주사바늘을 뽑아버리고 탈출하듯 나와버렸다. 뛰어나온 후에도 보조를 늦추지 안고 걸었다. 통증을 이기려고 입술을 깨물며 앓는 소리를 삼켰다.
병원에서 돌아온 나는 건조대의 축축한 빨래처럼 보라색 소파에 축 늘어진 채 널려 있었다. 정신과 진료를 받아보라는 말 같지도 않은 언어를 내뱉던 P의 상판대기가 핑크빛 벽지로 꾸며진 내 방안을 둥둥 떠다녔다. 떠다니던 P의 상판대기가 벽걸이 TV 모서리에 찔려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보고 모처럼 시원하게 깔깔대고 웃었다. 시커먼 테두리가 싫어서 보라색 페인트로 덧칠한 42인치 LED TV에서는 몇 시간째 귀향길 교통상황 방송이, TV 모서리에 찔린 P의 피와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파에 길게 옆으로 누워 교통방송을 즐기다가 잠이 들었다. 그렇게 소파에서 자다가 팔이 저려 눈이 떠졌다. 틀어놓은 TV에서 설날이라는 멘트가 나오는 것을 듣고서야 누운 채 하루 반나절을 보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아래에 깔린 오른팔이 제 기능을 상실한 것만 같았다. 뻐근함을 넘어서서 저리는 이 팔을 어떻게 진정시킬까 궁리하며 팔을 펴기 위해 몸을 뒤척이자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이놈의 배꼽시계는 고향도 안 가나 보다고 푸념하며 몸을 일으켰다. 저리는 오른손을 대신해 왼손이 식당 연락처를 찾아 번호를 누르느라 분주했다. 신호만 갈 뿐 사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전화를 안 받는 것 보니 배달할 사람들이 없나 보다 싶어 귀찮지만 가서 먹고 오기로 결심했다. 꼬르륵 노래 부르는 배를 달래면서 일어났지만 외투를 챙겨 입기는 귀찮았다. 모자만 눌러 쓰고 분홍색 페인트로 덧칠한 신발장 위에 있던 분홍색 장지갑의 끄트머리를 왼쪽 손가락 끝으로 겨우 집어 들고 굼벵이 같이 꾸물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귀찮음과 맞바꾼 두꺼운 외투가 그리웠다. 언젠가 본 동화책 속의 외투처럼 내 것도 발을 달고 뛰어내려와 등을 안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투를 부르고 싶어 위를 쳐다보는 순간 나보다는 바람이 좋다고 모자마저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잘 가’와 ‘꺼져버려’ 둘 중 어떤 인사가 어울릴까? 모자가 날아가는 동선을 바라보았다. 그 동선은 거대한 환형동물처럼 구불거렸다. 그 끝은 하늘과 맞닿은 듯 보이는 허공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모자가 날아가면서 스치고 간 길가의 많은 가게들은 간판불이 꺼져 있었다. 명절연휴라도 문 열어둔 가게 많더니만 대부분 닫혀있고 거리가 썰렁한것을보니 역시 설날 당일이다 싶었다. 쓸쓸하다 못해 적막하리 만큼 조용한 거리를 본 순간 모자 떠난 자리가 더 시리게 느껴졌다. 불 꺼진 가게들로 인해 고독한 쓴맛의 풍경을 펼쳐 보이며 잠든 거리가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길가 드문드문 켜진 가로등만은 내 마음을 안다고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감상에 빠지려는 순간을 못 참고 추위와 배고픔이 아우성쳤다.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추위를 이기고 요동치는 배꼽시계를 잠재우기위해 뛰었다. 얇은 옷 차림 탓에 온몸으로 추위를 맞서며 걸어서인지 유일하게 열었을‘365일 식당’이 참 멀게 느껴졌다. 드디어 식당의 세로 간판이 보였다. 뜀박질을 멈춰도 되겠다 싶어 서서히 숨고르기를 하려는데 허한 빈속에서 나오는 입김에 쓴맛과 피 맛이 어우러진 알 수 없는 역겨움이 느껴졌다. 따뜻한 것이 속에 채워지면 허한 비린 맛도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식당 문을 힘차게 당겼다. 팔만 아플 뿐 문은 꿈쩍 하지 않았다. 문을 열려고 뻗은 손이 문고리에서 종이 한 장을 맞이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로 인사한 종이에는 손 글씨로 ‘설날 당일 휴업’이라고 써져있었다. ‘이씨! 그럼 간판이 364일 식당이어야지. 명절 당일에 갈 곳 없는 사람들은 굶어 죽으라는 거야 뭐야?’ 묘한 거절감에 울화가 치밀었다. 느껴지는 거절감만큼 힘껏 문을 걷어찼다. 뒤돌아서는 순간 춥고 배고픈 나에게 80미터 저쯤에서 희망의 빛이 손짓했다.
편의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