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봉지 하나만큼 채워진 먹을거리가 손에 쥐어졌을 뿐인데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흐뭇했다. 봉지를 왼쪽 팔에 끼운 채 왼손엔 따뜻한 어묵 국물이 담긴 컵을, 오른손에는 핫바를 들고 집 쪽으로 걸었다. 핫바를 우물거리느라 불명확한 발음으로 허공에다 부스러기를 튀겨가며 외쳤다.
“편의점이 내 두 번째 산소통이네!”
편의점에서 사 온 것들을 냉장고에 넣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기 저 너머에는 엄마가 있었다. 엄마 목소리를 듣자마자 설날이라서 아빠가 집에 계실 텐데 왜 눈치 없이 전화하셨느냐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목소리의 퉁명스러움을 능가할 만큼 덜거덕대며 정리 중이던 식품들을 냉장고에 쑤셔 넣었다. 내가 아빠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을 아는 엄마는 아빠가 산책 중이라는 말로 안심시키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친정을 명절 마지막 날 다녀오라 했다고 엄마가 싫어하는 쫄바지를 입고 시위 중이라는 새언니 흉을 시작으로 결국에는 나에 대한 푸념으로 이어졌다. 시댁과 친정 모두 서울에 있어서 자주 왕래하고 사는 새언니도 설날 당일에 친정 보내달라고 시위 중인데 나는1년에 한 번뿐인 설날에도 집에 들를 생각 안 한다는 핀잔이었다. 건성으로 들으며 간편 조리 스파게티를 전자레인지에 넣느라 잠시 식탁위에 놓아둔 핸드폰에서는 기운 넘치는 엄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여전히 새어나왔다. 전자레인지 다이얼을 5분에 맞춘 후, 계속 엄마 얘기를 듣고 있었다는 듯 호응하는 목소리를 내며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대었다. 엄마가 여전히 새언니에 대한 섭섭함을 하소연하고 있었다. 불호령대장 아빠 옆에서 숨죽이며 살았는데 말년에까지 며느리 눈치 보고 살아야겠냐며 말년복도 없다는 말씀을 하시던 찰라 전자레인지에서 ‘땡!’하는 소리가 났다.
“또 인스턴트 먹니?”
“엄마 말년 아니네~ 귀 엄청 밝으셔~”
전자레인지 쪽으로 가면서 엄마 잔소리를 막아보려고 애교 섞인 목소리의 착한 딸 연기를 했다. 핸드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우고, 전자레인지에서 스파게티를 꺼내 식탁으로 가져올 때까지 밥을 해먹지 몸에 안 좋은 것만 먹는다는 엄마의 잔소리가 계속 됐다.
“귀찮아.”
“밥통이 알아서 하는 건데 쌀 씻어 넣는 것도 귀찮아?”
“공주의 피가 흘러서 무수리를 고용해야 할까봐~”
잔소리가 길어질 것 같아 멈춰달라는 뜻을 담아 장난기 있는 말투로 착한 딸 연기를 두 번이나 했다. 그러나 엄마는 멈추기는커녕 무수리 고용할 생각하지 말고 결혼하라고 언성을 높였다. 그만하시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입 안 가득 뜨거운 스파게티 면을 우물거리고 있던 탓에 그냥 들어드렸다. 하의 실종인가 뭔가 하는 패션이라면서 쫄바지 입고 시위하는 며느리 욕할게 아니라 시집가서 밥도 못한다고 소박맞을 딸 걱정해야겠다는 엄마에게 요즘이 어느 시대인데 그런 말씀하시냐고 음식을 우물거리며 대꾸했다. 엄마도 지지 않고 시대 변했다고 시집살이 변한다는 소리 있더냐고 반문했다. 반박의견을 억지로 삼켰다. ‘대한민국 며느리들의 공공의 적! 시집살이 무서워서라도 혼자 살 거니까 소박맞을 염려는 붙들어 놓으셔요.’ 속으로만 대답하느라 한 박자 침묵이 흘러간 사이를 엄마는 못 견디고 늘 하던 그 한마디를 더했다. 좋은 성적 포기하고 지방소재의 학원 강사로 가면서까지 아빠를 안보고 살려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엄마의 18번 질문이었다. 순간 굳은 표정으로 스파게티 먹던 포크를 탁자에 내려찍으며 건조한 말투로 무섭게 말했다.
“또!”
엄마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따로 살더라도 서울에서 일하면 자주 볼 수 있을 것을. 그 놈의 선생질은 서울에서도 할 수 있잖니. 서울에 널리고 널린 게 학원인데 쯧......”
1절에서 끝나지 않고 몇 절까지 계속 될지 모를 18번 노래였기 때문에 감정 최대한 절제하고 한마디만 했다.
“스파게티 면 불거든.”
“잔소리로 들린다는거지? 끊으마. 건강 챙기면서 일해.”
엄마가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통화가 끊긴 빈 핸드폰에 대고 참았던 감정을 다 실어서 고래고래 악을 질렀다. 여러 번 토해낸 악을 통해 조금은 속이 후련해진 틈을 타고 먹다만 황토색 미트소시 스파게티가 눈에 들어왔다.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쑥 아빠랑 연 끊은 건 내가 지방으로 오면서부터가 아니라 중학교 1학년 때였다는 말이 허공에 내뱉어졌다. 식탁에 앉아 왼손으로 턱을 고이고 오른손에 쥔 포크로 스파게티 그릇을 간헐적으로 찔렀다. 퍼져서 더 누렇게 보이는 스파게티를 초점 없는 시선으로 보고 있는데, 황토색 미트소를 담은 그릇이 끔찍한 그날의 황토색 라면국물을 담은 그릇으로 바뀌어 눈앞에 펼쳐졌다.
14년 전 그날은 하늘이 높고 맑은 가을이었다. 학교 앞 분식집이 늘 그렇듯이 가게 안은 교복 입은 학생들로 붐비고 아주머니의 손은 분주했다. 삼삼오오 앉아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친구 두 명과 라면을 먹었다. 내가 사려고 카운터로 가서 계산한 후 친구들을 향해 웃으며 손가락으로 브이를 지어 보였고 친구들은 각자의 엄지손가락을 세워 호응했다. 기분 좋게 자리로 돌아오고 있는데 누가 내 발을 걸었다. 넘어지면서 옆 테이블을 쓰러뜨려 라면이며 떡볶이가 내 위로 쏟아졌다. 눈에 날이 섰다. 발을 건 놈을 분노에 찬 표정으로 눈에 핏발이 서도록 노려봤다. 누렇게 탈색시킨 머리카락을 빳빳하게 세운 그 녀석은 교복 타이도 제대로 매지 않은 불량한 모습이었다. 같이 있던 낙지대가리처럼 삭발한 놈과 고추장 찍은 멸치처럼 까까머리에 빨간 염색을 한 녀석은 사복을 입고 있었다. 삭발한 놈은 담배 니코틴으로 범벅이 되었을 가래를 목젖 너머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끌어 모아 발 앞에 뱉었다. 까까머리에 빨간 염색을 덧입힌 녀석은 영역 표시하는 똥개처럼 벌어진 윗니 사이로 침을 찍찍 쏘아댔다.
“쳇! 지 오빠가 삥 뜯어서 동생 주나봐? 그러니 돈이 넘쳐 나겠네! 우리 것도 계산하시지!”
친구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일어났다. 불규칙적으로 찢어진 스타킹 사이에는 어느 것이 피인지 떡볶이 국물인지 알 수 없는 붉은색이 뒤엉켜 스며있었다. 친구들이 무릎에 손부채질을 해댔다. 입김을 불어 아픔을 덜어 주려 애쓸 정도로 무릎의 살갗도 찢어졌다. 그러나 갈기갈기 찢겨진 내 자존심에 비하면 외상(外傷)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학교 아이들이 꽉 차있는 그 분식집에서! 친구들 앞에서! 수치스러움으로 쥐구멍을 찾던 악몽 같았던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한다. 단지 윤식 오빠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수모 당하던 순간을!
절뚝거리며 분식집 문턱을 넘어서자 파란하늘이 펼쳐져 있었지만 제대로 올려다볼 여유 따윈 없었다. 철저하게 비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