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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이제는 지나간 것들에게
작가 : 은호
작품등록일 : 2017.10.28

"엄마의 새 남편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이름과
이제는 식어버린 이름
가까이 있어도 이해하지 못 했던 이름들에게 보내는 이야기

 
1부_9회
작성일 : 17-11-11 16:45     조회 : 236     추천 : 0     분량 : 8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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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두리는 이제 좀 적응 됐나 봐? 요즘은 너답잖게 불평 한마디도 없니.”

  “너답잖게라니, 불평을 하면 얼마나 했다고.”

  “그것도 그렇네?”

  오늘처럼 엄마와 언니, 나 셋이 거실에 앉아서 TV를 보는 저녁은 정말 오랜만이다. 그 남자 때문이 아니라, 원래도 우리는 좀체 모이지를 못 하는 가족이었다. 엄마는 기분 좋은 일이 있는지 TV를 보면서 웃기도 했고 우리에게 과일까지 깎아 주었다. 그 사람은 무슨 문예 계간지에 인터뷰가 있다며 외출했고. 그런 중에 엄마가 물은 것이다. 내가 적응이 되었느냐고. 그 사람과 사는 것에.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무튼…그냥 그럭저럭.”

 어물쩍 넘어가며 나를 타이른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그렇게 내 가슴에 얼룩을 남긴 죄책감을 찢어보려 했지만, 그것은 순식간에 다시 원래 모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날 이후로 그는 다시 돌부처가 되어 침묵했다. 가족들 다 함께 있을 때에도 우리가 언제 무슨 죄라도 지었느냐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말을 걸고, 엄마의 남편으로 살아간다. 그런 침묵이 나를 다시 혼란에 빠뜨렸다. 얼마 전에는 집에 언니가 있는데도 그 사람 작업실에 들어가서 물어보기도 했지만…

  “어떻게 하시려고요?”

  “뭐를?”

  “되묻는 거 안 하면 안 돼요?”

  “불안해?”

  “작가님처럼 태평할 순 없죠.”

  “괜찮아.”

  “뭐가요?”

  “없던 일로 해도.”

 이 사람이 살아온 세계는 어땠는지, 그런 사고방식이 자연스러운 세계였는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작가쯤이면, 나름 지식인이라는 사람이 하는 소리가 그런 거라면 이 세상 수준도 알만 하네요.”

 별 소득 없이 그 말만 던지고 나왔다. 그가 밉고, 내가 미워. 그의 마음도 내 마음도 모르겠다. 지옥이다.

  “네 언니는 참 무던한데, 넌 애가 예민해서 걱정했더니. 다행이다 얘.”

  엄마의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불러들인다. 그렇지만, 다행이라니. 다행이라니.

  “아, 두리 너 이번 주 금요일에 뭐 없지?”

  “응.”

  “잘됐다. 그 사람 신작 때문에 취재 나가는데, 네가 따라가면 되겠다.”

  “어?”

 이런 걸 동공지진이라고 하는 건가. “누가 꼭 따라가야 되는 거야?”

  “기왕이면? 말동무나 있으면 심심하진 않을 테니까.”

  “어디로?”

  “별로 안 멀어. 을왕리 한 번 돌고 오는 건데. 내가 가자니 회사 지켜야 되고. 담당자는 일 있고. 너희 언니는 그날도 출근하니까. 집에서 노느니 네가 같이 갔다 오렴. 이런 것도 경험이잖아? 어차피 운전도 그 사람이 할 텐데….”

 그 뒤에 엄마가 하는 말들은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양심이 있다면 거절해야 했지만, 아무 말도 못 했다. 아니, 안 했다. 그렇게 하면 엄마는 내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일 테고 당연히 내가 따라가는 걸로 될 테니까. 내가 간 것이 아니라 엄마가 보낸 것이다. 이런 나도 대단하지, 하지만….

  차라리 내가 뼛속까지 되바라진 년이었다면 하고 생각했다. 그랬으면 죄책감일랑 없이 무엇이든 내 마음을 따라 갔을 텐데. 그렇지만 나는 항상 애매하게 나쁜 아이였고. 그런 애매함이 나와 타인을 갉아먹기 일쑤였다.

  목요일 저녁에 그는 내 방문을 노크했다.

  “내일 추울 테니까, 든든히 입어.”

  “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몸을 씻고, 겨우 말린 긴 머리를 평소같이 올려 묶고서 기모안감이 대진 검은색 면바지에 진녹색 스웨터를 입었다. 베이지색 울 재킷을 걸치고 목도리는 손에 들었다. 1층으로 내려오니 언니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출근 준비를 하던 엄마가 잘 다녀오라고 새침하게 웃으며 배웅해 주었다.

  대문 밖에 그 사람 차가 서 있었다. 시동이 걸려 있는 검은색 승용차는 먼지 없이 깨끗했다. 운전석 문에 기대 있던 그 사람은 담배를 피우다가 나를 보고는 장초를 바닥에 던져 껐다. 전혀 몰랐는데. 향수 때문이었을까. 심장이 점토 반죽을 하는 것처럼 짜부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도자기를 만들 때 점토를 짓이겨야 공기가 빠지고, 가마 속에서도 터지지 않는다. 그렇게 만들어 놓은 흙은 묵직하다. 그래서 내 심장도 이렇게 무거워진 걸까.

  조수석 문을 열고 들어갔다. 히터를 틀어 놓아서 공기는 따뜻하고 답답했다. 곧 운전석 문이 열리고 냉기와, 약간의 연기 냄새를 끌고 그가 차에 탔다. 검은색 코트를 벗어서 차 뒷좌석에 던지고 나에게도 목도리랑 가방은 뒤에 놓으라고 했다. 무릎에 놔두는 게 편하다고 대답했다.

  “원래 담배 폈어요?”

  “가끔.”

 차가 출발한다. 뭔가 익숙한 기분이 들어 한참 생각해보니, 지난번 꿈에서 느꼈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차가 없는 도로 위엔 먹구름이 가득 껴있었다. 차갑고, 어둡고, 눅눅한 공기. 비가 올 것이다. 한 시간 반 정도 걸릴 거라고 그는 출발하면서 말해주었다. 졸리면 자라고 한다. 졸리겠어요? 내가 한참 돌려 말한 것에, 그는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남자친구가 출근하면서 보내온 문자에 답장을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지 못하고 있을 이 해맑은 남자는, 오늘도 푹 쉬고 내일 어디 놀러가고 싶은 덴 없는지 생각해 두라 한다. 나는 지금 인천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것도 말하지 못하고 그저 알았다 한다. 그때 갑자기 고요한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걸까 옆에서 상투적인 질문을 던졌다.

  “나중에 뭐 하고 싶어?”

 별로 내키는 주제는 아니었지만.

  “모르겠어요.”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는 건가. 한심해 보이진 않으려나. 그래서 잠시 생각하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어쨌든 먹고 살 길은 있어야 하니까, 도자기를 계속 하겠다든가, 그래픽 디자인을 따로 배워서 그 쪽으로 가겠다든가 했었죠. 해서 학원도 다녀보고 했는데 여전히 모르겠어요.”

  “왜?”

  “그것들도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건 아닌가 봐요.”

  “응.”

 하고 싶은 게 생길 거야-라든가 하는 말을 하지 않아서 좋았다.

  침묵 속에, 이 남자와 나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인터넷에 이름을 치면 나오는 기본 프로필 정도의 정보. 딱 그 정도. 문득 마음의 실타래들이 이리저리 엉켜버린다. 운전대를 잡은 그의 옆모습을 살짝 쳐다봤다. 회색 셔츠에 정장바지. 코트 밑에 받쳐 입는 남색 집업 가디건. 흐트러짐 없이 넘긴 머리카락과 이제 무표정하다고 하기도 의미 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 복잡한 마음이 가시가 되어. 가슴을 아릿하게 찌른다. 엔진 소리뿐인 이 공간에, 이 사람의 존재감을 흐리게 해줄 다른 것이 필요했다.

  “라디오라도 틀면 안 돼요?”

  그러면서 내가 오디오로 손을 뻗는 순간 그의 손이 다가왔다. 오디오 버튼에? 아니, 그가 운전대 한쪽을 놓고 내 손을 잡았다.

  그것이 세상이 멈춰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다정한 손길도 로맨틱한 스킨십도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심장이 쿵 내려앉은 것은, 다소 거칠고 따뜻했던 맨 손의 촉감 때문이었을까. 결혼식 날 나를 잡아 일으키던 그것과 전혀 다른 기분이 나를 감싼다. 회청색 바다 위, 아무 것도 없는 영종대교를 따라 저만치에 피어나는 시커먼 먹구름 속으로 달려가는 내내 그는 기어 핸들 위에서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내가 다른 쪽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에 진동이 느껴지고, 남자친구의 메시지가 검은 화면 위로 떠오르자 나는 시선을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사랑해’ 라 적혀 있었다.

 처음에 그토록 설레던 말이 서서히 향기를 잃어 마음 없이 건네는 인사가 되더니만, 오늘 결국 칼날같이 아프게 되어버렸다.

 

  취재라는 것은 특별한 건 아니었다. 섬에 들어와서 고속도로를 벗어나 해안가 1차선 도로를 달리면서 이따금씩 그는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기도 했지만 대부분 달리기만 했다. 펜스가 쳐진 방풍림을 사이에 두고 왼쪽으로는 줄곧 바다가 있었다. 녹지 않은 눈이 하얗게 덮인 검은 나뭇가지들 틈으로, 거품도 일지 않는 거대한 물결이 정지한 듯 보였다. 이윽고 펜스가 사라지고 나무들도 점점 줄어, 황량한 바다가 그대로 보이는 곳에 다다랐다. 조금만 더 가면 선녀바위란 게 있는데, 보고 싶으면 봐도 되고-그가 말했다. 작품에 쓸 건 아닌가 봐요? 내가 물었더니 그는 그렇다고 했다. 그럼 그냥 지나가요. 안 보고 싶어? 추워서요. 정말 스물세 살 답지 않네. 엄마가 나는 아빠를 닮아서 어릴 때부터 시니컬하고 애늙은이였대요. 아빠 닮았어? 기억은 안 나는데 그런가 봐요.

  중간에 살짝 창문을 내려 봤더니, 깨질 듯이 차갑고, 비릿한 냄새가 섞인 바람이 차 안으로 들어왔다.

  “근데, 별로 취재할 게 없나 봐요?”

  “딱히 장소가 중요한 장면이 아니라서.”

  “그럼 뭐가 중요한데요?”

 잠시 생각하는 듯, 말이 없다. 그냥 늘 그렇듯 대답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 길을 누군가와 함께 가는 기분.”

 그 말을 할 때 어떤 표정이었을까. 궁금했지만 그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도로 옆으로 횟집이나 민박집 간판을 단 건물들이 하나 둘씩 나타났다. 조금 더 가서 점심을 먹자 한다. 그리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알았다고 했다.

 

  “점점 어두워지는 것 같아요.”

  “그러네.”

  자갈 바닥에 비닐로 천막이 쳐진 조개구이집 안에서, 화로가 달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우리는 비닐 너머만 바라봤다. 손님이라곤 우리뿐이어서 고요했지만 한두 달 전처럼 마냥 불편하고 어색하던 그런 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불안정한, 두려움을 닮은 것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반투명한 비닐 너머에서 흐릿하게 움직이는 파도를 멍하니 구경한다. 발치에 놓인 난로의 열기를 느끼며 차가운 겨울 바다를 보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이었다. 겨울에 바닷가도 나쁘지 않네요-내가 말하자 그는 좀 전에 식당 주인이 가져다준 조개들을 불판에 올리다가 눈썹을 약간 치켜 올리고 나를 봤다. “처음 와봐?”

  “언니도 엄마도 바쁘니까요. 예전에….”

 순간 말을 끊은 것은, 내가 하려던 이야기가 이 사람 직전의 엄마 애인과 살 때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아저씨가 있을 때엔 종종 가족 여행을 간 적도 있어서 그때 빼곤 이렇게 멀리 나온 것도 오랜만이라는 이야기였는데, 그래도 엄연히 이 사람이 지금 엄마의 남편이라면 그런 걸 말하면 안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예전에?”

  “아니에요. 어쨌든 어릴 때부터 가족들이랑 놀러 다닌 기억은 거의 없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에게 쟁반에 같이 나온 목장갑 한 켤레를 줬다.

 

 

 

  식당을 나온 우리는 차를 그대로 세워두고 조금 걷기로 했다. 그 전에 따뜻한 걸 들고 가려고 근처에 있는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나는 유자차, 그는 캐모마일 차. 커피를 시킬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차 좋아하세요?”

  “커피를 못 마셔서.”

  “저번에 제가…?”

 그때 커피 드시냐고 물었더니 응이라고 했었는데. 내가 빤히 바라보자 그는 대답과 시선을 피하다가 결국 나랑 눈이 마주치고 피식 웃었다.

 

  손에 뜨거운 컵을 들고 천천히 모래밭을 걸었다. 고운 모래 위에 미끄러지듯 발자욱을 내며 우리는 말없이 물을 향해 다가갔다. 흐릿하게 뭉글거리는 회색 하늘의 끄트머리는 청회색 바다에 닿아 있었고. 파도 거품이 모래를 쓸어내리는 앞에 우리는 걸음을 멈췄다.

  “집필하는 거는 잘 되세요?”

  “그냥 그래.”

  “무슨 내용인데요?”

  “늘 쓰던 그런 거.”

  “안 읽어봐서 모르겠어요.”

 그는 나를 돌아본다.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혀 있다. 이번에는 내가 웃음이 나왔다.

  “장난이에요. 읽었어요. 엄마 회사에서 나온 책들인데 모르겠어요?”

 파도가, 커다랗게 뭉쳐져서 우리 앞에 온 몸을 내던지고 있었다. 차갑고 아파보였다.

  “신우진이라는 소설가랑 지금 제 앞에 있는 사람이 같은 사람인지 모르겠어요.”

  “무슨 뜻이야?”

  “그것도 모르겠네요.”

  “어느 쪽을 좋아하는데?”

 아무 감정도 표정도 없는 질문으로 나를 멍하게 만들어 놓는다. 왜일까. 저만치서 또 다른 파도가 다가오는 소리. 그리고 더 커다란 비명처럼 모래 위에 부서지는 소리.

  가만히 마주보고 서 있을 때에 굵은 빗방울이 뺨에 떨어졌다. 하나, 둘, 더 많이. 그리고 결국 무겁게 쏟아 붓기 시작했다. 파도소리는 빗소리에 집어삼켜졌다. 서둘러 차로 달렸다.

 

  그리 멀리 나온 게 아니었는데도 차를 세워둔 식당가 근처의 방풍림까지 오는 동안 꽤 많이 젖어버렸다. 거센 빗줄기 속에 뛰어오느라 정신이 없어 뒷좌석 문을 연 지도 몰랐다. 쾅-문이 닫히는 소리에 깨달은 것이다.

  “생각보다 많이 오네요.”

  “소나기 같네.”

 그는 내 옆에 타 있었다. 머리카락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가까이서 보였다.

  “외투, 앞자리에 걸어. 비 그치면 천천히 가자.”

 시키는 대로 하고서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숨을 골랐다. 그도 마찬가지. 숨소리가 잦아들자 사위를 둘러싼 빗소리. 차 루프에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 그 중 고요함이 점점 크게 들려와 그가 앞좌석으로 몸을 숙여 히터와 오디오를 틀었다. 라디오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들어있던 CD가 재생된다. 조금씩 따뜻해지는 공기와 작은 노랫소리에 몸의 긴장이 조금씩, 조금씩 풀어진다.

  “언제 알았어요?”

  “뭐를?”

  “제가….” 무서운 말이라 차마 한 번에 다 못 하고 하염없이 끝을 늘였다. “…그냥 모른 척 해주지.” 무서운 말은 생략되었다.

  “괜찮아.”

 당신을 좋아하게 된 것을. 생략된 채 허공을 맴도는 그 말을 그는 알아차린 걸까. 회색빛 파도와 빗줄기로 마지막 양심까지 지워버린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여태 외면해 놓고, 왜 끝까지 외면하진 못 했을까.

  젖은 옷 밑으로 체온이 느껴졌다. 늘 차가워 보였던 그에게서 느껴지는 열기가 익숙지 않아, 차라리 빗속으로 다시 뛰어들고 싶었다. 혹 그 열감에 취하게 된다면 그 불길이 나를 태울지도 모른다. 아니, 무슨 말이야. 나는 머리를 식혀야 할 것 같다.

  그가 먼저 내게 키스했다. 예전보다 훨씬 길고 깊게. 열기가 현실을 태워버렸다. 두려움은 여전히 감시자처럼 뒤에 자리 잡아 지켜보고 있었다. 차에서는 처음이었다.

  약간 기울어진 시트 위에 누운 나에게 그는 자기 가디건을 말아서 문과 좌석 사이에 받쳐주고 기대게 했다. 맨살에 닿는 가죽 시트는 차갑고 뻣뻣했고. 거기 누워서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이 어색해 눈을 창문으로 돌렸다. 살에 스치는 손과 입술을 따라서 몸을 뒤틀 때마다, 유리창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또르르-떨어지고. 입을 꾹 다물어 봐도 새어나오던 내 목소리도 밑으로, 밑으로 떨어져 내리는 듯 했다.

  이 날의 기억은 조금씩 흔들리는 차체와. 히터 바람과 습기로 답답했던 공기. 내 안에 그가 들어온 느낌을 견딜 수 없어 뻗었던 손에 닿았던 차가운 문손잡이와, 작게 영어 가사를 웅얼거리던 남자의 노랫소리. 그리고 조금씩 그치는 빗방울 틈을 헤치고 들려오던 파도소리로 흉터처럼 내 몸에 남았다. 그 흉터 사이의 미세한 틈으로 죄의식이 스몄다.

  비도, 우리의 행위도 그친 후. 내가 차 안에 팽개쳐진 옷들을 주워 입는 동안 먹구름 사이로 햇빛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그는 차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머리가 아프다. 유리창 너머에 기대 선 그의 검은 색 코트 자락을 보자 더욱.

  차에 콘돔을 두고 다니는 남자와 뭔가를 시작해도 되는 걸까.

  담뱃불을 끈 그는 뒷좌석 문을 열고 허리를 숙여 나를 들여다봤다. “괜찮아?” 그렇게 묻는다. 뭐가 괜찮냐는 걸까.

  “네. 근데 머리끈이 없어졌어요.”

 중간에 머리가 풀려, 옷을 입고 나서 찾아봤는데 보이지 않았다. 문과 시트 사이로 기어들어갔을까. 그래서 묶었던 자국이 남지 않게만 대충 빗어 내린 채였다.

  “풀은 게 더 예뻐.”

 그렇게 말하곤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가서 올라탄다. 벨트를 내려 매면서 백미러로 나를 흘끗 쳐다본다.

  “거기 있을 건가?”

  “머리 아파요.” 시선을 피하고 유리창에 기댄다.

  “히터 때문에?”

  “아뇨. 향수 냄새 때문에요.”

  CD가 다 돌아갔는지 끼릭-소리를 내며 멈췄고 조용해졌다. 차가 출발한다. 그냥 조수석에 앉을 걸 후회했다. 달리는 동안 백미러에 그의 시선이 계속 비쳤기 때문이다. 이게 뭐람.

  “머리 많이 아파?”

 조금쯤 온기가 섞인 목소리였던 것도 같다. 채 깨닫지 못 한 사이 내가 인상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조금쯤 아픈 것도 사실이었지만 통증에 찌푸린 게 아니었다.

  왜 간절한 바람은 현실이 되는 순간 빛을 잃어버릴까.

  “처음이었으면 어떡하려고 그랬어요?”

  “그래도 후회는 안 했을 거야.” 한참 뒤에 그가 한 말이다.

  “혹시 이것도 취재예요?”

  “진심은 아니지?”

  “작가님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내가 그렇게 쓰레기로 보였어?”

 갑자기 코가 시큰해졌다.

  “항상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아서,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어요. 작가님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겠지.”

 그렇게 쉬운 문제구나.

  “후회돼?”

 이제 와서? 별 소용이 없을 질문을 받고 숨이 막혔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다만,

  “시작하지 말아야 될 이유가 더 많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데요?”

 그의 답은 기다릴 새도 없이 눈가가 뜨거워졌고, 더 참아보라고 나를 타박했지만 이미 흘러버린 눈물이 쉽게 멈춰주질 않았다. 터져버린 마음을 다시 모으려 했지만 이미 여기저기 흩어져 버린 뒤였다.

  그가 갓길에 차를 세우고 뒷자리로 왔다.

  “제가 미쳤나 봐요.”

  “아니.”

  “작가님, 저 좋아해요?”

  “그래.”

 그래. 좋아하는구나 나를. 그렇다고 눈물이 그치진 않는다.

  “미안해.”

 한숨 같던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다.

  “네가 날 싫어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나는 그저 나 하나만 참아내면 될 거라 안도했고. 그랬는데, 거실에서 자다가 눈을 떴을 때 너를 봤을 때.”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어-그는 그리 중얼거렸다.

  “오늘은 내가 잘못한 거야. 아마 오늘 만은 아니겠지만.”

 그 후에 그는 나를 끌어안았고. 코끝에 느껴지는 향수 냄새가 옅어질 때까지. 그렇게 기대있었다. 걱정도 생각도 끊어낸다. 다시 자라나고 다시 자라나도 뚝뚝 끊어내면서, 그에게 안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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