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주현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온 것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니 시계는 벌써 퇴근시간인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퇴근길임을 고려한다면 파티장소에 자신의 차로 7시까지 맞춰가기엔 무리였다. 은재는 서둘러 클러치를 챙겨 일어섰다.
“여러분. 저 먼저 일어날게요. 다들 주말 잘 보내시고 월요일 날 뵙겠습니다.”
팀원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온 은재가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곧 도착하는 지하철에 무사히 탄다면 아마도 아슬아슬하게 시간 맞춰 도착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은재는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오십분 여를 미어터지는 사람들 속에 껴서 온 은재는 신사동을 알리는 안내방송과 함께 문이 열리자마자 지하철 안에서 튕겨져 나왔다. 발 디딜 틈 없이 꽉 찬 지하철 칸 안에서 사람들과 이리저리 부대끼다보니 열이 오른 은재가 아트센터 방향의 출구로 향하며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역을 빠져나오자 평소보다 많은 인파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은재는 길거리에 주차되어 있는 차창으로 자신의 얼굴을 슬쩍 확인한 후 클러치에서 립스틱을 꺼내 재빨리 덧발랐다. 저 멀리서 수많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은재는 초행길이라 헤맬까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 너무 쉽게 발견한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5분정도를 걷자 팀장이 이야기한 H아트센터가 눈에 들어왔다. 시간은 막 7시를 지나고 있었고, 론칭 파티 때문에 설치한 포토존에서는 유명한 톱스타들이 기자들을 향해 자신들만의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플래시가 터지는 포토존을 지나 내부로 들어가자 브랜드 탄생비화와 함께 소개 글들이 벽면에 부착되어 있었다. 은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 명의 사람들이 눈에 띄긴 했으나 환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직 도착 전인 듯 했다.
은재는 팀원들이 그렇게 엮고 싶어 했던 환도 보이지 않고 이왕여기까지 온 것, 눈요기나 하다가자라는 마음으로 테이블위에 놓여있던 무알콜 와인 한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생각보다 괜찮은 맛에 두 잔째 손을 가져가려는 그 때 누군가 옆에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이 은재? 너 은재 맞니?”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것 같았기에 잠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은재가 와인 잔에서 손을 거두며 빙글 돌아 옆을 바라보았다. 역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은재의 옆에서 샴페인 잔을 든 나미가 얄밉게 웃고 있었다.
“어, 혹시나 했는데. 너 맞구나 이 은재.”
“오랜만이네, 윤 나미.”
“그래, 오랜만이네. m&m도 참석할거란 예상은 했지만 네가 올 줄 몰랐는데. 일 년 만인가?”
“작년 공동 프로젝트 때문에 봤었으니 일 년쯤 된 것 같네. 나도 오고 싶어 온 자리 아니고, 네 얼굴 마주치는 거 썩 좋진 않아. 분명히 말해두는데 사람 신경 긁어 댈 거면 그냥 모른 척 하는 게 어때?”
“뭐?”
은재의 톡 쏘는 말투에 기분이 나빠진 나미가 입술 한 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좋은 의도로 대화를 건 건 아니었지만 대놓고 공격적으로 나오는 은재가 재수 없어져 한 마디 덧붙이려는데, 자신과 은재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는 환의 모습을 캐치한 나미가 슬며시 웃었다. 안 그래도 m&m에게 모델 뺏겼다고 회사에서 눈치를 주는 통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그녀였다. 나미는 모델은 뺏겼지만 은재에게 환과의 친분을 과시 할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래. 네 말대로 우리 유치한 싸움은 여기서 그만하자. 괜히 공석에서 만나 추태부리면 곤란하잖아? 풋. 아무쪼록 구경 잘 하고 가. 그럼 이만.”
은재는 절대 자신에게 지지 않으려는 나미의 근성을 알기에 갑자기 꼬리 내리고 자신을 지나쳐 사라지는 나미가 찝찝했다. 또 자신을 비웃는 듯 한 그녀의 마지막 말에 궁금증이 일어 나미의 발걸음을 향한 곳을 바라보려 몸을 틀었다.
시선이 향한 곳에는 자신과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김 환과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환에게 다가가는 윤 나미의 뒷모습이 있었다. 그녀가 무어라 말을 걸었는지 깔끔한 네이비 슈트에 세련 된 보타이를 맨 환이 나미와 마주보며 웃고 있었다.
환을 기다린 건 아니었지만 막상 그가 나미와 함께 웃고 있는 것을 보니 짜증이 치민 은재가 아까 집으려다 만 와인 잔을 들어 올려 단숨에 비워냈다. 둘은 여전히 만면에 미소를 띠며 대화중이었다. 은재는 발걸음을 옮겨 몸을 벽 쪽으로 기대 둘을 삐딱하게 지켜보았다.
환은 아직 은재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포토존에서 들어오자마자 나미를 마주치는 바람에 그녀의 말을 받아주느라 내부를 둘러 볼 시간조차 갖지 못했던 탓이었다.
저번 표지모델 계약 때 잠시 보았던 여자가 u&c담당자인데 기억 나냐고 말을 걸며 더 멋있어졌다고 식상한 대화를 건네는 바람에 웃으며 장단을 맞춰준다고 환의 입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환은 지금 매우 피곤한 상태였다.
은재의 문자를 기다리다 밤을 꼴딱 새버리고 최소한의 수면시간으로 행사에 참석한 탓에 메이크업으로 겨우 가리고 있던 다크서클이 다시금 슬슬 살아나고 있었다. 자꾸만 감겨오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환이 나미에게 말했다.
“대화 즐거웠어요, 담당자님. 계약 건으로 너무 서운해 하지 마세요. 다음에 더 좋은 계약으로 다시 만나죠.”
“그럼요, 호호. 근데 누구 찾으시는 분 계신가봐요? 아까부터 자꾸 둘러보시던데.”
“아, 네. 만날 사람이 있어서.”
나미는 환이 찾는 사람이 은재임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은재의 시선은 아직도 자신과 환을 향해 머물러 있었고 그런 은재의 시선을 즐기던 나미는 끝나가는 대화를 붙잡기 위해 은근슬쩍 발을 헛디디며 환의 어깨에 샴페인을 쏟았다.
“어머! 죄송해요. 워낙 사람이 많아서 방금 누가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괜찮으세요?”
연한 레몬색의 샴페인이 환의 네이비 색 슈트를 타고 흘러내렸다. 나미는 호들갑을 떨며 자신의 백에서 손수건을 건네 환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환은 나미의 손수건을 정중히 사양하며 어깨를 툭툭 털어냈다.
“괜찮습니다. 실수 할 수도 있는 거죠. 그럼, 다음에 또 뵙기를.”
환이 나미에게 등을 보이며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고, 나미는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입술을 꾹 깨물며 손수건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다 지켜보던 은재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쯧쯧. 일부러 김 환 어깨에 샴페인까지 들이부을 정도로 나한테 자랑하고 싶었던 거였어? 김 환하고 친하다고? 근데 왜 난 너만 친한 거 같냐 윤 나미.”
그때, 누군가 은재의 등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걸어왔다.
“이런데 와서 혼자 뭘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습니까, 이 은재씨.”
“억!”
은재가 도둑질을 하다 들킨 것처럼 놀란 가슴을 움켜쥐고 돌아섰다. 그녀의 뒤에는 그녀가 꿈속에서 그토록 바라던 남자가 웃으며 서 있었다.
“놀랬다면 죄송합니다. 그때 식당에서 잠시 봤었죠? 강 욱입니다.”
“대표님?”
“기억하시네요. 혼자 계시기에 온 건데. 일행….”
“아뇨! 없어요. 괜찮아요, 하하. 대표님이 참석하실 줄은 몰랐네요. 김 환씨 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아 환이요. 그 녀석도 아마 지금쯤 도착했을 겁니다. 일행 없으시다면 같이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가, 같이요? 아. 그럼 저야 좋죠! 한 잔 하실래요?”
갑작스런 욱의 출현에 당황한 은재가 자신이 들고 있던 와인 잔을 욱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그런 은재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욱이 살짝 웃었다.
“한 잔 하기엔 너무 가벼운 잔이네요. 와인이라면 아까 마셨으니 빈 잔은 여기 내려놓고. 갈까요?”
욱의 말에 잔을 쳐다보던 은재가 자신이 내민 잔이 아까 자신이 원샷으로 날려버린 빈 잔이란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욱은 은재의 볼이 빨개지는 모습을 못 본척 하며 은재에게서 잔을 받아들어 테이블 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런 욱의 모습을 바라보던 은재는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이 남자를 꼬시기도 전에 된장찌개 머리카락 사건에 이어서 오늘 또 한 번 실수를 해댔으니. 지적이고 우아한 커리어우먼의 모습 보다는 푼수에 칠칠맞은 여자로 낙인찍힐 것이 뻔했다.
그런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급 울상이 된 은재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옆에서 이런 은재의 변화무쌍한 얼굴 표정을 관찰하던 욱이 몇 초간 은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을 뻗어 은재의 입술에 살짝 갖다 대었다 뗐다.
“립스틱 다 번지겠네요. 입술 그만 깨물고 구경하러 갑시다, 이 은재씨.”
“아…?”
갑작스런 욱의 스킨십에 놀란 은재가 말문이 막혀 어버버 거리자 욱이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이어가며 은재의 손을 잡아챘다.
“곧 모델들의 런웨이 무대가 시작 될 겁니다.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수야 없죠. 갑시다.”
말을 마치자 욱은 은재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잡은 손도 놓지 않은 채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욱이 갑자기 걷자 뒤를 따라 은재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하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때문에 둘은 몇 걸음 못가 멈춰서고 말았다.
“이 은재씨, 거기서 뭐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