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떠난 후, 은재는 잠시 멍해졌던 자신을 자책하며 다시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사무실에 도착했다. 시계는 이미 9시를 훌쩍 넘긴 9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빠끔히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은재에게 팀원들의 시선이 다다닥 꽂혀들었다.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네요. 하하하.”
괜스레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살포시 자리에 앉는데, 지각에 예민한 팀원들이 웬일인지 타박 한 마디 없었다. ‘요거 찜찜한데?’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 갈 무렵 막내인 주현이 냉큼 다가와 물었다.
“대리님. 문자 못 받으셨어요?”
“엥?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문자라니.”
주현을 말을 듣고 핸드폰을 꺼내보니 문자 메시지가 한 통 와있긴 했다.
시간을 보니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그 이상한 남자랑 실랑이를 벌이고 난 직후 인 듯 했다.
내용인즉…,
“이게 무슨 말이야? 이번 홍보모델 섭외를 나보고 하라고?!”
“그게…. 원래 업무를 맡기로 되어있었던 박과장님이 사정상 휴가를 쓸 상황이 생기셔서. 차장님이나 팀장님도 이번 F/W 홍보기획 프로젝트 때문에 정신이 없으세요.”
“표지촬영도 열흘정도 밖에 안 남았는데, 무슨 수로 모델을 구해?”
“아, 모델은 이미 정해져있어요!”
“모델이 정해져 있는데 나보고 섭외를 하라고? 이미 정해졌는데 굳이 무슨 섭외?”
의아하다는 내 물음에 주현이 머뭇머뭇 거리더니 울상을 지으며 얘기했다.
“이번 s기획사 신인모델인데, 한 달 전에 갓 데뷔했어요. 원래는 저희 경쟁회사인 u&c에서 모델로 쓰려고 기획사랑 손잡고 물밑작업 하고 있었대요. 그런데 며칠 전에 불발됐어요. 근데 불발이유가 모델 본인 측에서 거절했다고 하더라고요. 안하겠다고….”
“그래서?”
“그래서 저희 쪽에서 u&c보다 돈을 더 얹어주고서라도 낚아채오라는 팀장님의 명령이세요. 휴. 솔직히 기획사 쪽에서는 당연히 계약금액이 올라가니까 무조건 하자고 하는데…, 모델 본인이 그다지 원하고 있지 않대요.”
“갓 데뷔한 신인이, u&c나 우리나 둘 중 한 곳에서 계약서 쓰자고 하면 냉큼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자기 얼굴 알리고 하려면 이런 기회 놓치면 본인 손해 아닌가? 기획사에서 신인모델 하나가지고 쩔쩔매는 것도 웃기고.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안한다고 하면 다른 애 찾아보면 될 거 아니야? 그 신인 말고도 s기획사 괜찮은 애들 많잖아. 아님 c기획사도 괜찮고.”
“아, 부장님이 며칠 전에 론칭파티 가셨다가 점 찍어온 애래요. 마스크가 장난 아니라나? 딱 보고나서 우리 쪽으로 끌어오려고 했었는데, u&c에서 먼저 손을 써놓은 상태여서 아깝게 놓친 대어라며…. 근데 마침 저쪽이랑 계약 불발 돼서 부장님이 팀장님한테 압력을 좀 넣으신 모양이에요. 팀장님도 억지로 받아오신 모양이더라고요. 여하튼, 미팅은 오늘내로…, 시간은 대리님이랑 기획사에서 조정해서 정하면 된대요. 그럼, 부디 성공하세요. 대리님!”
주현이 자리로 돌아가고, 은재는 미간을 있는 끝까지 찌푸리며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아침부터 이마를 박은 것도 모자라서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신인모델까지 구해와라?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일이었다.
언뜻 앞을 보니 책상에는 이번 가을 표지촬영 콘셉트 시안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할 일이 태산인데! 진짜 아침부터 짜증나네.’
하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 할 일. 표지촬영이 열흘정도 밖에 남지 않았단 걸 생각하면 은재에게는 1분1초가 급했다. 총책임자가 자신인데 모델을 못 구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핸드폰을 열어 주현의 문자를 다시 확인하니 아까 했던 대화내용과 함께 맨 밑에 s기획사 팀장의 전화번호가 첨부 되어 있었다. 은재는 망설임 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 * * *
“야, 환아. 인마! 좀 천천히 가라 제발. 모든 사람들 다리길이가 다 너 만한 줄 알아?”
한산한 한강둔치 길을 따라 길쭉한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남자의 뒤로 한눈에 봐도 짜리몽땅한 남자 한명이 헉헉대며 쫒아가고 있었다. 남자는 숨이 차는지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앞서가는 남자를 향해 소리 없는 삿대질만 해댈 뿐 이었다.
환은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몇 발자국 더 가다, 쫒아오는 발걸음소리도 구시렁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자 슬쩍 뒤를 돌아봤다. 남자는 더 이상 쫓아 올 힘도 없는지 나무 벤치에 털썩 앉아 추욱 쳐져있었다.
“방망이 형, 저질체력.”
어느 새 다가 온 환이 남자의 옆에 앉으며 말하자, 방망이라 불린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야, 김 환. 죽고 싶냐. 오랜만에 원 펀치 쓰리강냉이 보여줘? 이 자식이, 봉망희 라는 좋은 이름 놔두고 방망이? 콱! 한강에 던져 버릴까보다.”
“에이. 왜 그래. 형이 나 캐스팅 해놓고 벌써 포기하기야? 그래서 나 안한다고 했잖아.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어휴, 됐다 됐어. 말을 말자. 너랑 있으면 내 기가 다 빨리는 느낌이야.”
망희의 말에 무언가 반박하려던 환은 한강에 울려 퍼지는 망희의 벨소리 때문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네, 봉망희입니다. 예, 팀장님. 네. 아 그래요? 네. 알겠습니다. 30분이면 됩니다. 네. 네.”
망희의 입에서 나온 팀장이란 단어에 환의 얼굴이 구겨졌다.
“뭐야, 회사야? 안 가.”
환이 내뺄 줄 알았다는 듯 망희가 환의 옷깃을 꾹 잡더니 말했다.
“안 가? 안가면 내가 죽어 인마.”
“아, 방망이. 아니 봉망희! 봉 매니저 살려줘요.”
* * * *
은재는 s기획사 회의실에 앉아서 팀장이 타다 준 녹차를 홀짝이며 의문의 신인모델을 기다리는 중 이었다.
시계를 보니 팀장이 약속한 30분이 막 넘어서고 있을 무렵이었다. 복도 끝에서부터 요란스런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회의실 문이 쿠당탕하고 열리며 웬 짜리몽땅한 남자와 멀끔하게 생긴 남자가 들어섰다.
깜짝 놀란 은재가 마시던 녹차를 내려놓고 앞을 바라봄과 동시에, 망희에게 떠밀려 회의실에 들어 온 환은 잽싸게 등을 돌려 문 밖으로 탈출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런 환을 뜯어 말리며 망희는 은재에게 연신 사과를 해대고 있었다.
“아, 아이고!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 자식이 워낙 통통 튀는 놈이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게 이 자식 매력이에요. 하하하…. 잠, 잠시 만요!”
망희가 환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던 은재는 환의 뒤태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계속 받고 있었다.
‘어디서 봤지? 어디서….’
생각이 날 듯 말 듯 한 뒷모습의 근원을 억지로 쥐어짜내던 은재에게, 남자와의 실랑이가 드디어 끝났는지 망희의 목소리가 툭 끼어들어왔다.
“아, 죄송합니다. 실례했네요. 이 자식이 워낙 말썽쟁이라. 뭐해? 인사드려.”
망희가 남자의 옆구리를 쿡 하고 찌르자 남자가 겨우겨우 입을 떼어 자신을 소개했다.
“s기획 신인모델, 김 환.”
“아 그리고 저는 이 녀석 매니저인 봉망희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풉. 네. 봉 매니저님. 안녕하세요, 저는 m&m 마케팅홍보팀 대리 이은재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망희의 이름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고개를 숙여 가까스로 조절한 은재가 시계를 한번 흘깃 쳐다보고서는, 가방에서 들고 온 갈색 서류봉투를 들고 뚜벅뚜벅 걸어가 환의 앞에 섰다. 그리곤 갈색봉투에서 무언가를 꺼내 환의 얼굴로 디밀었다.
“뜸들이지 않고 본론만 말할게요. 이거 계약서에요. 우리 회사랑 계약하죠.”
“안 해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대답. 환의 손길에 의해 팔랑이며 날리던 계약서들은 몇초 후 바닥과 책상에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어쭈. 쪼그만 게 당돌하네. 니가 m&m을 깔 볼 만큼 그렇게 잘생겼어?’
은재는 무시당한 기분에 한껏 찌푸린 인상을 풀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서서히 드러나는 환의 얼굴.
“oh my god…. 그 남자? 당신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