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지혁이니?"
어머니의 목소리는 역시나 먼저 말을 열었다.
지혁은 목소리를 최대한 가다듬어 말을 건낸다.
"네 어머니....."
그 낯선이같은 목소리에 지혁의 어머니는 다시 맘이 아린다. 그래 이 목소리가
내게 그렇게 살갑게 굴던- 능글능글 장난을 쳐대던 그 둘째란 말이지.....
내 아이는 변했는데.. 다른 상황은 하나도 변하질 않았다.
그 사실을 어떻게 해 줄수 없는 어미의 심정은 바짝바짝 타 들어갈 뿐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그래선 안됬다. 담판지은 내용을 이야기 해야했다.
그게 이 아이에게 구원이 될까.
".... 서울에 올라 왔단다... 오늘-...
그리고 네 아버지와 담판도 지었어-..... 그 동안은 니가 집에 오기 싫어하는게 지견이 탓인줄만 알았단다.
늘 껄끄럽게 끝나니까.... 그게 아니라... 아버지 때문일 줄은... 아니.... 그렇게 너를 몰아붙이시는 줄은 몰랐단다..
그날 아버지와 너의 대화를.. 나도 몰래 좀 듣고 말았는데...."
어머니는 그까지 이야기 하시고 말을 잠시 멈추셨다.
지혁은 어머니가 또 우시는건 아닐까 겁이 더럭났다. 담판 내용은 뒤로 하고서라도 말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말을 이으셨다. 단정할려고 애를 쓰시면서.
"....미안하다 지혁아.. 알았다면 막아주고- ...아니 알았다면 이런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했을꺼야-"
어머니의 말미는 단정하던 어쩌던.... 벌써 고통에 물들어 있다. 지혁은 결국엔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쉰다.
".......어머니....."
지혁의 조용한 대답에, 어머니는 평소 같지 않으시게 말을 자르며 중간에 또 말씀을 이으셨다.
" 아니야, 이번엔 내가 먼저 말하마...
그래서 아버지께 화가 났었던 거란다... 난 적어도 지견인 몰라도 아버진 이해 할줄 알았다..
니가 왜 그런 상황까지 갔는지.. 내 맘도 다 알고 계실줄 믿었지..
이제껏 널 그렇게 감시하고- 밀어붙여 오신줄은 몰랐단다.
그래 알았대도- 아니 정확하겐 다는 몰랐단게 맞겠지.....
그래서 전화 오시기에 이번엔 받았단다. 그리고 대답도 들었단다.
이제 강비서 이야기도 내가 듣기로- 너에 대한건 다 어미인 내가 알고 내가 듣고-
아버지에겐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기로- 나와 이야기 끝내셨다."
어머니의 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반갑기보다, 지혁에게 그져 쇼크일 뿐이었다.
그래 아버지의 그런 밀어붙이는 불도저식 방법이 늘 버거웠다. 힘겨웠다.
아버지가 밀어 붙이실때마다 몰려오는 ptsd... 그리고 돌아오면 하루종일 되새김질하는 그날의 기억들
좋았던 기억들은 더 매섭게 다리를 쪼아오고.... 늘 고난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이 워낙 튼튼하시어 마음은 아플지언정 잘 견뎌내신다
어머닌.... 아니다.. 매번 한번 한번마다- 얼마나 쇼크를 받으실까.............
어머니의 상처- 그건 지혁에게 아킬레스건이었다.
도저히 어떻게 안되는 상처..
강비서는 또 중간에서 뭐라고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할 것이다.
지혁은 그저 얼었고- 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덧붙이듯 말했다.
".... 듣는다 해도 니가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난 강비서한테 강요할 생각도 들을 생각도 없단다.
니가 이야기할 준비가 되었을때.. 아니 이야기도 아냐- 나올 준비가 되든, 아님 영원히 그렇게 산대도
그저 ...... 힘을 주고 싶을 뿐이란다. 그게 다야.... 더 이상은 힘들게 하고 싶지 않구나. 그게 다란다.
그러니...."
"어머니... "
지혁은 그제야 대답을 하려 했지만 어머니는 이미 약간은 흐느끼고 계셨다.
"더 이상은 ... 너를 괴롭히지 말렴- ...우리도 안 그럴꺼야..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제 그러지 않을꺼란다."
지혁은 숨이 조여오는것만 같은 슬픔이 가슴 터질듯 차오를 뿐이다.
뭐라고 해야 할까. 감사하다고? 그런 관심에서 벗어나게 되어서?
...대신 어머니께 멍에를 지우면서?
지혁은 쓴 입을 다잡았다. 말은 드려야 했다.
어머닌 충분히 날 위해 희생할 만큼 하셨으니까.
"어머니....... 아버지께 그런 이야기 들을때도, 제가 잘못해서 그렇단 생각은 .. 변함 없었어요
그보다도.. 아버진 강한 분이잖아요- 그래도 아버지에게 약한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어머니에요.. 어머니..... 아버지의 유일하게 약한 점은.. 바로 어머니세요..
그 맘을 다치게 하고- 어머니도 제 말 , 제 이야기 귓전에 들릴때마다..
이렇게........... 우시고..... 슬프시고....."
지혁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저는 그게 더 고통스러워요..... 그렇게 , 가족을 망치는건 저에요 어머니....-"
지혁의 말에 어머니는 와락 더 슬퍼왔다. 이 아이는 가족을 망쳤다고 자책까지 하고 있었다.
지견이는 혼자 둬도 잘 크는 아이였다. 똑 부러져서 자신의 몫을 정확히 챙길 줄 아는 아이였다.
그래서 더 믿었다. 그게 이렇게 와서 이 아이에게 첫째가 모질게 굴 이유가 될줄은 나도 몰랐다.
아이는 목소리가 안나는듯 메어오는 듯 했는데....
그러고도 미련스레 또 말을 이었다.
"형은... 물론 아버지 뒤를 이을 사람이기도 하지만... 사랑이 고픈 거에요- 다른 것보다요...
어머니 사랑이요-..... 어머니... 저를 정말 도와 주시고 싶으시다면.. 전 이제 , 어쩔수가 없지만...
두 사람-..... 어머니 밖에 모르는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사랑이 간절한 형....
두 분 지켜주세요 어머니......... 제 바램은, 그게 다에요 어머니..."
지혁의 말은 평소보단 길었다. 그리고 그 말에 어린 슬픔은 더 지독하게 짙었다.
어머니는 말 없이 듣고 계실 뿐이었다. 전화기 너머의 약간의 새된 숨소리로
어머니의 눈물을 짐작만 할 뿐이었다.
"어머니.... 저를 아시잖아요-......
저는....... 어머니가 절 사랑하시는거 , 알지만
저때문에 고통 스러우신 그게..
절 정말.....고통스럽게 해요 어머니...
저를......... 도와주세요 어머니....."
내 아이의 입을 타고 나오는 정말 믿기 힘든 이야기..
내 고통때문에 자신이 더 고통스럽다는
세상 고통 혼자 짊어진듯, 완전히 다른 아이가 되어버린..... 내 아이가 뱉는 말...
어머니는 그저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은 뭐라 말해야 할까..
어떤게 배려일까..
이렇게 아픈 아이인데- 내 아픈 손가락인데-
가족이라고 달랑 네명인데 나머지 둘이 왜 이렇게 이 아이를 몰아 붙인단 말인가..
내가 자신들을 사랑 해 주지 않아서? 이 손가락만 챙겨서?
나를 닮아- 번뇌가 가득해- 생각만 많아
망설이고 살아온 이 아이를... 내가 챙겼다고 해서?
어머니는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터져나올것 같은 심정을 간신히 삼켰다.
".............건강 챙기렴 지혁아....
한번- 생각해 보렴....... 그게 다야 내가 바라는건...
그리고..."
어머니의 젖은 목소리를 타고 나오는 ,
자신은 쑥스럽고 죄스러 한 마디도 할수 없는말....
"사랑한다.. 내 아들-"
그 말을 끝으로 지혁은 그저 전화를 내려 놓았다. 심장이 터질듯이 조여왔다. 잊었던 아픔이 다시 되새겨졌다.
결국 가족을 박살낸건 나란 , 그런 사실이었다.
지혁은 한숨을 깊게 내쉬며 털썩 주저 앉듯이 의자에 앉았다.
다리의 아픔은 이제 후들거릴만큼 어느새 성큼 다가와 있었다.
지혁은 눈을 감고 그저 다리를 꽉 붙잡을 뿐이었다.
그게 자신이 할수 있는 전부였다. 그게 더 슬펐다.
-
지견은 오랫만의 빈 시간에 혼자서 멀리 골프를 치러 나갔다.
누구에게라도 연락을 할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다들 성가실 뿐이었다.
다들 뭔가 바랄 뿐이지-
그에게 자리란 곧 권력이고- 권력이란 외롭지만... 지켜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게 인생이었다.
한참을 혼자 치다. 그제야 앉아 멀리 너머의 경치를 바라본다.
그런 생각 하지 않는 성격인데- 가을이 되려나 자신도 모르게 약간 센치해져..
한참전의 기억을 떠올린다.
조그만한 아이- 작은 아이- 어머니가 배에서 품고 있다던 동생을 처음 만난 날-
지견은 그때- 자신에게 쏠렸던 관심이 그 아이에게 모조리 가는 것을
처음 질투했다.
"엄마- 나 오늘-"
"쉿- 동생 깰라"
어머니의 쉿 소리는 마음에 크나큰 파동을 일으키며
작았던 내 마음을 덮쳤다.
내 말이 무시당하는- 그런 시기가 오고 만 것이었다.
더 이상 어머니의 작은 아이는 자신이 아니었다.
아버진 처음부터 지견을 안아주시는 법조차 없었다. 자신은 장차 후계자가 될-
그런 리더가 될 아이였다. 아이였으니 아이답게.... 천진하게 그럴때도 있었다.
아버진 그런 나를 용납하시지 못했다. 모든 관심이 그 아이에게 쏠릴때-
난 아버지의 기대감에 부응하고 싶었다. 그러면 더 사랑받을꺼라-
저 아이를 이길수 있을꺼라- 그렇게 막연히 생각했다.
세월이 지나고- 내가 어떤 성과를 내도-..... 돌아오는 칭찬도 따스한 포옹도 없었다.
"너는 당연한 거다. 그렇게 하는게 당연한거야-"
그 말뿐이었다.
결국 - 그 조그마한 아이는 자랐고- 그 아이가 내게 처음 비행기를 내밀었던 날을 난 기억한다.
조그마한 입을 오물거리며 내게 말을 건냈던 날을.... 우린 그 사이에도- 전혀 형제랄게 없었는데
늘 어머니 치마폭에 싸인 듯 뒤에만 있던 그 아이가 내게 처음 말을 걸었다.
큰 눈을 하고서- 바싹 마른 주제에..
"형아.... 이거 가질래?.... 그리고 ... 나랑... 같이 놀자 형아-"
아이가 내민 비행기는 작고 나무로 된 모형 비행기였다.
나는 황망히 그것을 내려다 보곤 ,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그걸 발로 밟아서 부쉈다.
그때의 기분은 복수에 가까웠다. 내가 빼앗긴 사랑에 대한 복수- 내가 빼앗긴 모든 것들에 대한 복수..
너와 달리 내가 짊어져야 하는 것들에 대한 피곤함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뻔뻔스럽게 말을 붙여? 그 아인 여전히 어머니의 얼굴로 , 어머니를 쏙 뺴닮은 그 곱상한 얼굴로
내가 돌아선 뒤에도 그 비행기를.. 조용히 , 아이답게 왕왕 울어대는것도 아니고 기분 나쁠만큼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 조각들을 줍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마도 모르셨을 것이다.
그 뒤로도 나에게- 그 아이는 뭘 뺏은 아이일 뿐이었다.
혹은 뭔가를 뺏을 아이- 혹은 언젠간 내 것을 탐낼 아이..
그뒤 그 애가 자라면서 - 어머니를 닮은 곱상한 얼굴도- 별로 힘 안들이고도 주변에 사람이 가득한 웃기지도 않는
성미도- .... 늘 장난식으로 아버지의 사랑까지 가져가는 그 아이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래 , 회사에서 그러듯 난 이미 - 인정머리라곤 없는 형이었다.
나는 목표가 세워 져 있는 사람이었다.
사사로운 감정 따위- 어차피 다 버려질 쓰레기 같은 것일 뿐이었으니까..
그 아이가 크면 클 수록- 내 자리에 넘어 왔다는것이 더 화가 났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속삭임- 내가 못 들을꺼라 생각하신 말들..
"지혁이가 보면 참 재치가 있어요- 애가 밝고- 또 사람들도 곧잘 친해지고..."
"그러게 그놈이 참 서글서글하단 말야- 막내답지 뭐-"
"... 그 아이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그래- 사람은 그런 면이 좀 있어야지-"
내게.. 무뚝뚝하고 독선적으로 나아갈 - 목표를 주신건 아버지였는데-
아버지는 그 말로 나를 영원히 상처 주셨을 뿐이었다.
그 아이에게 힘이 될수밖에 없는 그 여자아이와의 원만한 관계조차- 난 거슬릴 뿐이었다.
이미 형제같지도 않았지만- 그저 의례적인 사이일 뿐이어도- 그 아이와의 결혼은
결국 내 자리에 위협을 가할것이었다. 난 초조했다.
그 즈음 일어난 사고-...
어머니 아버지는 내게 저런 일이 일어났대도 저러셨을까 싶을 만큼 송두리째 흔들리셨다.
아이는 완전히 망가졌다. 그 모습에 , 나는 기뻐할수도 없었지만..
안도했다.
안도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거짓이었다.
다신 못 일어 날것 같던 그 아이- 그 아이에게서
난 그제야 내 자리를 가리던 그 아이의 그늘을 치워버릴수 있었다.
그 녀석이 다시... 큰 숨을 들이쉴지도- 모른다.
지견은 피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끈다. 씁쓸한 입술을 괜히 물어 뜯으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제야 라운드에 나온 사람들이 반갑게 다가섰다. 성가셨지만
웃어야만 하는 자리-
이게 바로 그 자식은 영원히 모를- 내 자리의 무게였다.
"어- 심이사! 같이 한번 치지- ! 이렇게 반가울때가- 아버지는 출장 중 아니신가?"
"아.. 정회장님- 오랫만에 뵙습니다."
지견의 깍듯한 인사에 옆의 여자도 힐끔힐끔 지견을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아 여긴 내 딸이라네- 프랑스에서 피아노 유학하다- 잠깐 들어왔어- 자네와는 초면인가?"
지견은 그야말로 상투적인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아 네- 아마도 그런것 같군요- 어머니를 닮아 굉장히 미인이시네요-"
여자는 얼굴을 붉혔다.
정회장은 껄껄 웃는다
"이 사람 - 농담도 참- 같이 한번 치지!"
"네 , 좋습니다-"
그러곤 머리로 되뇌인다.
이 자린 내가 만든 자리야-...... 그토록 노력한 내가 얻은 자리-
니가 끼여들 자린 없어
오로지 나의 자리야-
지견은 다시 독기를 품는다- 그리곤 내키지 않는 골프를 - 다시
얼굴에 박힌듯한 그 미소를 지으며- 따라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