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공기가 나른하게 흐르며 모든게 멈춘듯 한 순간이었다.
그런 여름 밤이었다.
적어도 하임한테는 그랬다.
그의 눈이 생각 보다 흔들림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발끝부터 천천히 그 사람의 색으로 그렇게 물드는거 같은 느낌이었다.
도하에게 내가 풍덩 빠졌었다면..
.....
이 사람은 천천히 나를 물들이고 있었다.
지혁의 손이 닿았고 그 손에 내 눈물이 닿았다.
지혁은 다소 놀란듯 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낮게 났다. 마치 그가 화 났을때 처럼
하지만 화 난것 같진 않았다.
놀란것 같았다.
"왜... 울지? ... 울라고 한 말 아냐....
고맙단 말,... 하려고 한건데.. 거창해 졌군"
...
내가 왜 우는지 이사람한테 어떻게 설명할수 있을까 설명한다 해서 내 이 맘이 이해 할수 있는
그런 감정이기는 할까.
자신의 감정은 자신도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벅참. 그런 것이었다.
하임은 손을 들어 자신의 눈물을 닦았다.
바보같은 감정의 범람이 , 창피하고 부끄럽다기 보다.. 미안했다. 그게 솔직한 감정이었다.
자꾸- 나를 미안하게 만든다.
자꾸... 나를 훔쳐보는 사람으로... 그렇게 만든다.
하임은 그제야 좀 새치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참 이상한 사람이에요-.. 알죠?"
하임의 목소리가 촉촉히 젖어있다. 어린애들이 간혹 울고나면 그러하듯이.
지혁은 늘 웃듯- 한쪽입을 올리며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비웃는거 같다고 할 , 그 미소로 웃는다.
".... 특별한 사실도 아닌걸, 그보다 당신이 더 놀랍군
돌직구를 훅훅 날리는 강한 여자인줄 알았는데...... 왜 울지?"
하임은 또 새치름 하게 .. 대답했다.
".....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곤 속으로만.. 속삭인다.
말한다고 당신한테 내가 그 무슨 도움이 될수 있을까요..
"그럼 이제-.. 돌아갈까?"
지혁이 말했다.
하임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지혁은 놀란 듯 한 눈이다.
"아무리 여름이래도 해가 졌는걸.. 꽤나 늦었어- 거의 8시가 다 된걸-"
"두시간만 더 있으면 .. 불꽃놀이 한데요- 광장 가서- 그거 보고 가요-"
하임의 말은 의외였다. 또한 조금은 의아했지만 지혁은 순순히 수긍하기로 한다.
이까지 왔다. 하루만. 오늘 하루만이라면.
하임은 천천히 휠체어를 펴서 지혁에게 내밀고 지혁은 .. 이제는 걸어도 될 것 같았지만 순순히 앉았다.
마음이 이상했다. 이 여자랑 있으면-... 곧잘 그러듯 가슴께가 간질대는 거 같은 기분.
뒤에서 휠체어를 밀며.. 하임이 뜬금없는.... 소리를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에.... 여 주인공이 둘 나와요-..
그 중 한명은 어떤 남자를 정말 죽을만큼... 사랑했어요-.. 남자가 자신과 계속- 만나고 이어나갈 자신이 없어서
심지어 유부남이라고 거짓말 까지 했었는데 말이죠..."
하임의 뜬금없는 말에 지혁은 영문을 모르지만 그냥 듣고만 있다.
"그래서 잔인한 결별을 했는데도-.. 그녀는 그를 나쁜사람이라곤 생각치 않는거 같아요- 그리고 그와의 생활을
물속 생활.. 이라고 해요- 사랑으로 가득찬 물속 생활이라고요.. 가끔은 숨을 쉬러 올라와야 하지만-
그만큼- 그 기억속에 살아요 - 그를 많이 사랑해서요-"
"......."
물속이라.
...
하임의 의중을 알수는 없으나. 그 말에....왜 이리도 가슴께가 콱 잡힌듯 목이 메였을까.
" 당신이 안고 있는 기억이 어떤지.. 들어도 다 알지 못해도-..
아마 당신도 물속에 있는거 같아요- 가끔은 숨을 쉬고 싶어지는데도
계속 그 안에 있었겠죠..
이유가 있을꺼라 생각해요...... 당신한테 억지로
묻지 않아도...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는.... 알거 같아요-"
"........"
"누구나 가끔은 숨을 쉬어야 살아요 , 당연한 사실이니까 아무도 말 하지 않죠-
누구나 그렇게 사니까요-
당신은 이제껏 물 속에서 살았어요.. 누군가는 알려 줘야죠-
당신 스스로 그 물에서 걸어나오진 않을거 같으니- 가끔은 숨을 쉬라고..
누군가는 알려 줘야지 않겠어요?"
아무도 몰랐던 사실- 내가 숨을 죽이고
그저 이렇게 사는게 , 내 선택이라 믿어
나를 끊임없이 흔들어 놓기만 했던 사람들.
선택이 아니었다. 그 여자를 사랑함으로 인해.
당연한 것이었다.
"....."
"그러니까 - 내가 당신의 숨쉴 시간이 되어 줄게요-
다른것 , 당신이 가진 아픔- 슬픔 다 알려주지 않아도 상관 없어요-
물속에 있다가... 숨이 쉬고 싶어지면 - 나랑 이렇게 숨을 쉬었다가
다시 물속으로 돌아가면 되요- "
하임은 그까지 말하고 지혁의 앞으로 가 한쪽 다리를 굽히고 앉았다.
지혁의 눈에는 고통도, 슬픔도 아닌 알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하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친구해요-
친구가 되요- 그래서 당신이 가끔-... 숨을 크게 쉬고 싶을때
그럴때 내가 당신을 도와줄게요-
어때요."
하임은 자신의 적극성에도 놀라고- 이정도 말에 동요하는 지혁에게도 놀랐다.
그래 이 사람의 그런 고통을 덜어줄수 있다면야.
친구가 아니라.. 뭐라도 해도
지혁이 목소리는 희미했다.
희미했으나 , 그리고 운것 같지도 않았으나.. 목소리는 촉촉했다.
"난 물속에서 떠오르지 않으려 애썼지..
숨을 다 뱉어서 숨을 쉬지 않아도 .. 물속에 있으면 내 자신이 안전한것처럼 그렇게 느껴졌어.
내가 숨만 쉬지 않으면 될 이야기였지. 몸에 공기가 없으면... 그러면...
그렇게 하면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내가 당신을 친구로 삼아 - 숨을 쉬면..
그러면... 아니.. 내가 그래도 될까?
나한테 그럴 자격이 있을까?
아주 가끔이라도.. 아주 가끔이라해도 말야."
빛은 그의 뒤에서 살짝 비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읽을수 없어 나는 더 용감해졌다.
"그럴 자격은 본인이 만드는거죠-... 그럼 우리 , 친구할까요?"
"........."
".... 친구해요 우리-
아주 가끔- 아주가끔만
물에서 나와요-
그래야 당신이 살고- 당신이 지키고 싶은 물속의 어떠한 것도 다 안전할거에요
어때요?"
하임은 씩 웃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지혁은 말없이 망설이다. 하임의 손을 잡았다.
차갑고 가느다란, 손이었다.
하임은 다시 웃고는 뒤로 돌아가서 천천히 휠체어를 민다.
지혁은 죄책감이 느껴지는것 같으면서도... 이만큼만.. 이만큼만..
그러면 내가 더 , 더 너를 위해 물 속으로 돌아가기가 쉬울꺼야 그럴꺼야
그리고 더 너를 외롭지 않게....... 그렇게 돌볼수 있을거야..
혼자서 조용히 되뇌인다.
하임은 언제 눈물 흘렸냐는듯 다시 목소리가 밝아졌다.
"우리 친구 된 기념으로 술이나 한잔 할까요?"
"난 술 안마신다니까-"
"술 안마시는 사람이랑은 친구 된거 첨이네요"
"술술- 무슨 잘 마시지도 못하더만........."
둘은 아까의 그 민망함을 잊으려는듯 더 티격 태격 한다.
마치 정말 친구처럼.
"에-? 나랑 마셔본적도 없으면서 그걸 어떻게 알아요?"
"당신 다음날 숙취로 고생하잖아- 그럼 술 먹을 자격이 없는거 아닌가?"
하임은 고민하듯 끙... 하곤 명쾌한 답을 내린다.
"술에 딸려오는 원치않는 부록이죠- .... 뭐 그래도 마실때의 즐거움은 남달라요-"
".... 어떻길래 그래?"
"해방감이죠-"
지혁은 하임의 말에 이상한 적적함을 느낀다. 이상하지..
당신에겐 말 못하겠지만 당신은 나한테 술인가봐
당신이랑 있으면-.... 당신 말대로 숨을 쉬나봐-
해방감이 느껴져- 숨을 편하게 쉬게 되... 아픈 기억들이 잠시 나를 놓는것 처럼
잔인한 현실이나 달라지지않는것들에서 도망친 것 처럼..
그리고 나서 당신이 사라지면
....
그제서야 마치 숙취처럼- 죄책감이 밀려와-.. 아무리 강비서 말한 마냥
내 맘이 하민이에게 있다는걸...... 하민이가 안다고 해도 말야.
죄책감이 밀려와....
하민인 나 때문에 기계없이는 한 줌도 제 힘으로는 못 들이는 그 숨을
나만 쉬고 있다는 그 슬픔. 그리고 미안함....
.......
그런데도 이상하지
당신이 숙취를 겪으면서도 계속 술을 먹는 것 처럼
나도 죄책감을 겪으면서도... 당신이 쉬게 해 주는 이 숨이... 이렇게 간절해.
그냥.. 낯설 정도로 신기한 해방감이야.
처음엔 불쾌할 정도였지.......
안 쉬어 왔으면 계속 안 쉬었어야 했나봐,
그랬나봐.......
지혁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 놀이기구들을 바라본다.
이제야 진입한 동물원의 옆인 놀이동산을 눈부신듯 바라본다.
그제야 또 현실로 돌아온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듯. 묻는다.
"당신은 저런거 안타나?"
"... 저도 원래 저런거 안 좋아해요- 겁이 많아서-"
거짓말이다.
하임은 오면 롤러코스터만 4번 5번을 타는 강심장이다. 세진이랑 왔을때도 세진이가 제발
그만 좀 하라고 할때까지도 바이킹을 타댔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런거 싫다잖아-
톡.... 토톡...
물감이 떨어지는것 처럼 물들고 있다.
색이 있다면 이 사람은 한없이 블루에 가까운 블랙일 것이다.
그 색이 번져서-... 내 가슴 밑까지 와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여기만 넘지 않으면.. 그렇지만 않으면... 나도 이 사람도 , 다치지 않고 서로 더 행복할 것이다.
하임은 천천히 휠체어를 밀며.. 그 가벼움 무게감에... 마음 아픔을 느낀다
광장에는 벌써 사람들이 조금 모이기 시작한다. 불꽃놀이.... 한 여름에 보는 불꽃놀이는
어쨌든 아리게 아름다울 것이다.
한 삼십분쯤 지났을까- 하임과 지혁은 별 다른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때 방송 안내와 함께- 첫 폭죽이 뛰어 올랐다.
불꽃놀이는 기대한 거 보다도 대단했다. 펑펑 하는 소리와 함께
갖가지 불꽃들은 하늘을 수 놓았다. 사람들은 모두 와 하며- 불빛아래
행복해 보였다.
온갖 불빛이 아름답게 하늘을 빛 낼때... 하임은 옆에 앉아 있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텅 비어있던 그 눈에 빛이 담겼다. 색색깔의 빛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느껴졌다.
나이때문에 현실을 느껴야 된다.
그렇게 되 뇌었던 하임은 벌써 그런걸 다 놓아버린지 오래였다.
그냥 가끔 숨 쉴수 있게하는 그런것이면 충분했다... 바보같이 또 나는 내 것을 못챙기겠지만
또 세진이가 말한거 처럼 결국엔 바보 같이 나만 남는다고 해도 결국엔 그렇게 될 것이겠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그러다 이렇게 이 사람과는 이렇게 -... 그냥 헤어질수도 사라질수도 아무것도 아닌 지금처럼
혹은..
그저 친구로 남겠지만.
그래도 이 사람의 눈에 불꽃이 이렇게 아름답게 담기는 순간.
이 순간.
이 순간을 생각하면 지나도- 더 오래 지나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하임은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는 마지막 방어의 끈을..
그렇게 자의로 자신의 손으로 놓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