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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르륵. 드르르륵.
10년도 넘어 보이는 2G 폴더 전화기의 진동이 울리자 국정원 작전명 오구라파티를 수행하는 블랙 중 코드네임 청크가 전화를 집어들었다.
수신 확인을 하자마자 그의 표정은 환하게 밝아졌다.
곧바로 그가 수신 버튼을 누르고는 귀에다 전화기를 가져다 댔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 아무리 아빠가 좋아도 근무시간에 전화하면 안 된다고 했지?”
그의 사랑스러운 딸의 전화.
그러나 지금 그는 감시 화면 모니터링 중.
전화를 받으려면 잠시 눈을 떼야 한다.
혹시 전화를 받다 그가 놓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침대에 걸터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요원 찹스를 부르기 위해 책상을 주먹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부르는 소리에 찹스를 청크가 쳐다보자 청크는 자기 대신 모니터를 봐달라며 손짓을 했다.
알아들은 찹스는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청크와 교대를 했다.
이제 딸과 마음껏 통화할 수 있게 된 청크.
“뭐? 사과 폰을 사 달라고? 스마트 폰은 작년에 사줬잖아. 뭐?
에스 폰은 너무 구려서 싫다고?
사과 폰에서 새로운 모델이 나와서 갖고 싶은데 엄마가 안된다고 했다고?
그럼 엄마가 안 된다고 하지 이 녀석아. 그냥 써.
내년에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사줄 게. 폰을 사주면 2년은 써야 할 거 아냐?
뭐? 액정이 깨져서 어차피 바꿔야 한다고?
애들이 놀린다고? 그럼 액정을 바꾸면 되잖아. 뭐? 바꾸는 가격이면 새 폰을 사는 게 낫다고?
아이고 얼만데? 뭐? 배.. 백이십 만원?”
청크가 놀란 눈으로 그도 모르게 챱스를 쳐다봤다.
챱스와 눈이 마주치자 챱스는 손 날로 자신의 목을 쳐대기 시작했다.
청크의 딸에게 사과 폰을 사주지 말라는 뜻.
청크는 챱스의 말을 알아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그의 사랑스러운 딸고 통화를 시작하는데..
“알았어. 사줄 게. 하이고, 우리 강아지 때문에 아빠 등골이 휘겠네. 하하. 아니야. 아니야. 농담이야. 농담.”
그렇게 주절대던 청크가 허망한 얼굴로 전화기를 귀에서 때고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냥 끊어 버렸네. 우리 딸.”
“사 주지 말라고 하는 신호를 사 주라는 신호로 알아들은 거야?”
찹스가 말하자 청크가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신호는 제대로 받았어.”
“그럼. 왜? 사준다고 한 거지?”
“아니, 그게.. 작년 겨울에 패딩을 사줬는데 중저가 브랜드로 사줬더니 애들이 놀렸던 모양이야.
집에 와서 하루 종일 울고 불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는데 다시 사 주지 못해서 미안했거든.”
“그래서 이번에 보상 차원으로 사과 폰을 사주려고?”
“100만 원짜리 패딩보다 이게 더 나을 거 같아서.”
갑자기 찹스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한 참 애들 사이에 유행했던 그 시커먼 애벌레 같은 패딩 점퍼가 100만 원이나 한다고?”
“그래. 그렇게 비싸다. 애벌레 같은 패딩이. 아이고, 자식이라곤 딸 하나밖에 없는데 등골이 휜다. 내가.”
“야, 등골이 휘다가 못해 부러지겠네. 이런 거 보면 내가 결혼을 안 한 게 아주 잘한 거 같다.”
“그래. 잘했다. 잘했어.”
청크의 말에 챱스는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그리고 둘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갑자기 청크가 몸이 찌뿌둥했는지 두 팔을 펴 위로 쭉 올려 기지개를 폈다.
그런 그를 흘깃 본 찹스가 그에게 물었다.
“휘어버린 등골 피고 있는 건가? 청크.”
요원 찹스의 싱거운 농담에 청크가 배시시 웃으며 답을 했다.
“내 자식 기 죽어 다니는 것보단 내 등골이 휘는 게 나아.
이번 겨울엔 갖고 싶은 고가 패딩도 사주려고. 기 살면서 학교 다녀야지.”
“요즘 애들은 왜 그래? 우린 땐 안 그랬는데. 그냥 따뜻하고 깔끔하게 입고 다니면 장땡이지. 뭔 브랜드 타령인지.”
“급식들 패션이 뭐 별거 있겠어?
다 똑같은 거 입으니까 가격으로 차별화를 두고 싶은 거겠지. 뭐 그것도 다 한 때야.“
띵똥!
갑자기 책상 끝에 있는 노트북에서 메신저 알람이 울렸다.
“정보팀에서 메시지가 왔어. 청크. 나는 감시 모니터를 봐야 되니까 자네가 확인 해.”
찹스가 말에 청크가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책상으로 와 앉아 메시지를 클릭했다.
“뭔 지시냐?”
가볍게 혼잣말로 중얼거린 청크가 비밀번호를 쳤다.
그러자 은비칼의 정보에 관한 문서가 열렸다.
“무슨 자료야?”
궁금했던 찹스가 묻자 청크가 재빨리 문서를 짧게 훑어본 후 대답했다.
“은비사의 동생 은비칼에 대한 정보야. 지금 알앤디 센터에 있다는 데? 집중 감시 대상에 포함하래.”
“어이고. 한 명 또 늘어난 거야?”
“어.”
“까라면 까고 하라면 해야지~”
찹스의 말에 청크는 배시시 웃고는 다시 문서를 살폈다.
그런 그가 깜짝 놀라며 말을 뱉었다.
“이야. 이 친구 26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오성 통신 아이디시 시스템 관리실 실장이야.”
“그래?”
“그뿐이 아니야. 병역도 면제야. 아주 그냥 집안 빽이 상당한가 봐.”
청크의 말에 순간 찹스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청크를 돌아보는데..
그걸 본 청크가 화들짝 놀라 다시 모니터링을 하라며 손짓을 했다.
절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면 안 되는데 떼서 그런 것.
그걸 알아챈 찹스가 다시 모니터를 후다닥 쳐다보며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보고 싶네. 어떻게 생겼는지..”
청크가 노트북을 들고 가 찹스가 모니터링 하는 모니터 위에 올렸다.
노트북을 흘낏 본 챱스의 얼굴이 놀란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야. 완전 꽃미남이네. 저렇게 잘 생겼으면 배우나 아이돌을 하지 왜 서버룸 관리를 맡았을까?”
“그쪽 집 사람들 완전 엘리트야.
형은 오성 알앤디 센터 총책임자고 동생은 그 나이에 오성 통신 데이터 룸 실장이잖아.
엘리트 집안에서 우아하고 고상한 걸 하길 바라지 왜 딴따라를 시키겠나? 가오가 있지.”
청크의 말에 찹스가 착잡한 듯 입을 열었다.
“집의 배경이 좋으니까 자식들이 엘리트가 되는 거겠지? 출발선부터 다른데 뭐.”
청크가 찹스에게 보여 주던 노트북을 기분 나쁘다는 듯 책상에 툭 내려놓으며 투덜거렸다.
“무슨 소리야? 꼭 집이 좋아야 엘리트라는 소리잖아? 우리도 집안 빽은 없지만 엘리트라면 엘리트야.”
찹스가 청크의 말에 피식 웃었다.
“어이구. 꿈보다 해몽이 좋네. 진짜 한 번 엘리트처럼 일해보고 싶네.
여기서 이렇게 하루 종일 죽치고 않아 있는 데 무슨 엘리트야.”
“이름 없이 그림자처럼 일하지만 우린 누가 봐도 엘리트야.
국정원 직원은 아무나 하는 줄 알아? 그리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니까 당연히 엘리트지.”
“그렇지. 일반인들 눈으로 보면 엘리트지.
하지만 엘리트면 뭐하나. 누가 알아 주지도 않는데..
가끔 이 직업을 가진 걸 후회한 적도 있지.
아주 가끔.
특히 국민들한테 비하를 받으면 말이야 더 그런 생각이 들지.”
찹스의 말에 몇 년 전 국정원 댓글 조작 사건으로 떠들썩했던 일을 떠올린 청크는 풀이 죽었다.
나름 자부하는 직업을 가졌지만 국민들한테 개 정원이니 조작 정원이니 조롱이나 받아 왔었다.
자부심과 자존심에 금이 간 시간들.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다 위에 몇 놈 때문에 그렇지 뭐.
예전보다 위상도 꺾이고 조롱이나 받게 됐지만 그래도 난 사명을 가지고 일하고 있어. 찹스는 아니야?”
찹스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모든 조직에서 필요 없는 사람은 없어.
하다 못해 기업의 청소부 아줌마도 꼭 필요한 존재야.
사람들이 그런 걸 알아주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특히 위에 사람들..”
“이하 동감.”
청크는 정보 분석실에서 온 은비칼의 문서를 마저 살펴보았다.
그러다 무언가 발견한 듯 두 눈이 커진 청크.
“허허. 야. 이 은비칼이라는 사람 좀 별나네?”
“왜?”
“여기 책상받이가 보낸 자료에 의하면 이 사람 낮에는 외출을 거의 안 한다는 군.
한 달에 한 번 지병 때문에 알앤디 센터로 검사를 받았지만 모두 밤이었다네?”
청크의 말이 끝나자 찹스가 갑자기 한숨을 쉬듯 휘파람을 불었다.
청크가 쳐다보자 찹스가 입을 열었다.
“밤에 검사를 받는다고? 특혜가 대단하네.”
“그러네.. 쩝.”
***
“언제 끝나?”
“응. 조금만 더 하고.”
“언제까지?”
“어휴, 조금만 더.”
지금 맘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몸 때문에 짜증이 잔뜩 나 있는 은비칼.
대체 이 검사는 언제 끝나는 건지 한서리에게 물어봐도 돌아오는 답은 퉁명스러운 말뿐이었다.
더 물어 봐도 소용 없다.
자꾸 조금만 더 검사해야 된다는 말만 되돌아올 게 뻔했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으로 제 할 일만 할 뿐이다.
은비칼은 그녀 바라보기를 멈추고 자신의 몸을 쳐다보았다.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무선 생체 전극 신호 밴드들.
이번 검사는 좀 특이했다.
다른 때는 장비가 마련 된 검사실에 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한서리의 개인 연구실에서 하고 있다.
대체 무슨 검사인지..
은비칼은 그 밴드들을 붙인 상태로 이렇게 그녀의 방에서 의자에 앉아 30분이나 꼼짝 못하고 있었다.
정말 인내심이 바닥나 버릴 것 같은 은비칼.
그가 아주 아주 지쳐 죽겠다는 듯 한서리에게 다시 투덜거렸다.
“어휴. 누나. 이건 무슨 검사야?
갑자기 새로운 검사가 생긴 거야?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지? 지겨워 죽겠어. 진짜.”
“알 거 없어. 얘기해도 모를 거고. 그냥 시키는 대로 얌전히 검사 받아.”
“궁금한 데 말해 줘. 누나. 무슨 검산데?”
은비사의 물음에 그제야 한서리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표정이 심상치 않다.
역시나 은비칼에게 버럭 성질부터 냈다.
“어우 씨. 나 바쁜 거 안 보여? 며칠 째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그렇게 성질을 부린 한서리가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 뜯었다.
너무 괴로워 죽겠다는 듯.
그 바람에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틀어 올려, 비녀 대신 꼽은 볼펜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볼펜을 본 한서리가 다시 투덜거렸다.
“으이 씨. 이건 또 왜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