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두부와 첫만남
마치 문이라는 인형탈을 쓴 것 같이, 개구멍에 엄마의 얼굴이 동그랗게 보여지고 있다. 어떤 자세를 하고 계시 길래 저런 느낌이 나올 수 있을까 내심 궁금했지만, 갑자기 나타난 모습에 놀란 심장은,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어보였다.
“고..공포영화도 아니고!! 그냥 좋게 문 열고 주시면 되잖아요!”
“귀신인줄 알았..”
안도의 한숨을 쉬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허튼소리 그만하라며 엄마께서 구멍을 통해 손을 내밀었다.
“됐고, 돈이나 받아.”
주먹 쥔 손이 서서히 펼쳐지더니, 만원을 건네주었다.
평소라면 가격에 딱 맞춰 주셨을 금액이, 이번에는 거스름돈이 남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개 들며 두부 외에 더 시키실게 있냐고 바라보았는데, 갑작스런 엄포가 놓아졌다.
“잔돈 10원이라도 안 가져오면, 1원당 1대씩이야.”
“그리고 할인마트가서 사와. 세일하더라.”
“천원 당 한 대로 해주면 안될까요, 어머니.”
“다쓰고 집에 들어오지 마세요. 따님.”
개구멍을 통한 소통은, 엄마의 일방적인 구멍닫음으로 인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피부에 닿아오는 공기의 속삭임을 따라, 바로 옆 집을 바라보았다. 걸음만 이동하면 닿을 수 있는 편안한 거리. 그 모습이 날 안정시킨다.
잠시 자리를 이동한다고 해서 닫힐 문이 아니었기에, 마트를 먼저 다녀오자 다짐하고, 힘없이 풀려있는 운동화끈을 다시 매듭지은 뒤, 앞으로 나아갔다.
마트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반겨주는 플랜카드. 크고 빨간 문구를 이용해 소비욕을 자극시킨다. 허나, 나는 소비할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으므로, 아이쇼핑 겸 심부름을 하기 위해 옆에 있는 전단지 하나를 집어 들고 안으로 입성했다.
한 발짝 씩, 냉장코너의 습기를 맡으며 전단지의 내용들을 훌었다.
“와.. 여기 왜 이렇게 싸..?”
전단지를 잡고 있던 두 손이, 매우 저렴한 것 같다는 의미를 담아 조금 흔들렸다.
“세상에! 축구파이가 1500원? 미쳤다 가격파괴네.”
“식혀가 1개에 200원이라고? 게다가 쌀없는 식혀?!
“픽흐닉은.. 아니, 소풍은 왜 이렇게 싸? 4개에 천원?!”
잠시, 이 아이들을 집에 초대하는 상상을 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달콤함이 간접적으로 내 기분을 좋게 만들었지만, 현실속에 서있는 나는, 손에 투명한 무언가를 쥔 채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뭔가 민망해, 헛기침을 두어번 한 뒤,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민망함. 그것을 숨기고자 심부름 해야 할 물건을 반복해 외쳤다.
“큼..흠.. 두부..두부 두부~ 두부나 볼까~”
전단지 메인에 크게 박혀있는 두부의 증명사진. 그 밑에 적어진 가격을 살펴보았는데..
“하..한정수량 200..200원?! 세상에, 짱 싸잖아?!”
흔들리는 동공을 주체하지 못했다. 두부심부름 경력 18년...아니..1살에서 4살때까지는 심부름을 못했으니까 약 14년! 그렇기에, 두부 시세는 나름 알고 있었는데, 이정도 가격이면 정말 저렴 오브 저렴한 가격이었다.
역시 우리 엄마는 대단한 것 같다. 이 마트 전단지, 우리쪽 골목길에는 안 붙어있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아셔서 두부를 사오라고 하신 걸까.
감탄도 잠시, 이 정도 가격이라면 금새 사라질게 뻔하니, 당장 두부를 확보하는게 먼저였다.
“두부님.. 두부님!! 남아있어주세요..”
잠시 과자에 한 눈 팔고 있었던 스스로를 후회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일상모드에서 탐정모드로 스스로의 느낌을 바꾸었다. 나는 스텟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지금 상황에선, 민첩을 올리면 두부를 빠르게 발견하는 스킬이 가능할것이다!
온 힘다해 주변 투시능력을 사용했더니, 어묵이 눈에 들어왔다.
.. 이 주변이 분명하다.
두부라면, 네모네모한 플라스틱 통 바구니에 누워, 자신을 강조하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저깄다!!”
드디어 두부님과 만나게 되었다. 기쁜 마음으로 저벅저벅 걸어가, 나에게 다가올 두부님께 미소를 지어드렸다.
..하지만, 두부님은 한 모 뿐이었다.
“앗.. 근데 마지막에 남은건 왠지 모르게 좀 그렇긴 한데..”
부침개를 이용해 한 모씩 가져가다보니, 마지막 남은 두부님은 이리저리 치여 얼굴에 생채기가 나있었다. 심지어, 모서리도 약간 부서져 있다. 혹시라도 두부님의 새로운 친구들이 오지 않을까 싶어 잠시 머뭇거렸는데.. 고민하는 내 얼굴 옆에서 갑자기 손이 나타났다.
“안 살거면 비켜.”
위엄가득한 말투. 단호함에 잠시 위축되어, 아무 말없이 그 손을 지켜보았는데..
“뭐야, 내 두부 어디갔어.”
..잠시 사이, 두부가 사라져 있었다. 못 사가면 엄마의 어떤 말 이 나를 반길지 모르므로, 혼신을 다해 고개를 두리번 댔는데, 인상이 무서운 붉은머리 사람이 위생팩에 두부를 넣고 있었다.
이게 뭔가 싶어, 그 사람의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임에도 찰랑거리는 머리 끝, 어디선가 많이 본 하얀남방과 노란색 줄무늬의 검은 넥타이. 약간 마른체형이지만, 비율잡혀 위로 뻗어있는 골격과 키. 눈끝이 날렵하다보니, 화내고 있는것 같은 인상의 무표정.
..신기한건, 무서운 인상인 것 같으면서도.. 예쁜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그 사람 손에 들려있는 두부를 발견하고 정신을 차렸다.
‘아, 이럴때가 아니지!!!’
당장 다가가 두부님을 돌려달라고 주장했다.
“이봐요!! 그거 제 두부님이에요!!”
목소리를 높이며 가까이 다가갔더니, 무서운 느낌의 인상이 더욱 무섭게 구겨졌다.
..얼굴 표정으로 심리적 압박감을 줄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나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어깨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잔뜩 짙어진 붉은머리의 인상이, 그 모습과 어울리는 대사를 내 뱉었다.
“뭐래. 꺼져.”
움찔했지만, 두부님앞에선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다. 저사람도 두부를 원하고, 나도 두부를 원하기 때문에, 똑같은 입장이다.
내..내가 움츠릴 이유따위 없다!
“뭐..뭐요? 말투 정말 별로시네?!”
“그 두부는! 저한테 아까부터 윙크를 날렸다구요!”
두부와 했던 교감을 늘어놓았는데, 붉은머리는 짜증난다는 듯 목소리에 힘을 주더니, 상스러운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SIBAL. 좀 비키라고. 꺼져 제발.”
“아..아니 그게 왜 욕까지 하시고..음..어..”
거친 말투와 무서운 인상에 나도모르게 위축될 뻔 했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보다 무서운 인상을 알고 있었다. CG없이도 불타오르는 마력을 지닌 유일한 인간계 사람..
그래.
화난 엄마가 두배는 더 무섭다.
더 무서운 걸 떠올리니, 숨겨져 있던 용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달라고 해서 줄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럼 잠깐만 두부 좀 보여주세요.”
“안 사가면 부모님께 혼나니까.. 노력은 했다고 사진찍어서 보여드리려구요.”
“별 짓을 다하네.”
아예 못된 사람은 아니었던 걸까. 붉은머리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두부가 담긴 봉투를 건네주었다.
하지만 붉은머리씨는 알고 있어야 했다.
두부를 건네 받은 사람이 좋은 사람만은 아니란 걸.
검은 안개를 불러와, 내 주변에 가득하도록 만들었고, 소리를 죽이며 사악함을 담아 실실 웃어주었다.
훗, 순진한 사람 같으니라고.
“뭐냐, 그 표정..”
붉은머리가 내 표정의 의미를 발견했을때 즈음, 나는 이미 준비가 완료된 상태였다. 다시금 씨익하고 사악하게 웃은 뒤, 정중하게 구십도 인사를 하며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이제야 알아챈 붉은머리의 표정이 전체적으로 확장되었고, 이 분의 늦은 행동력은, 달려가는 내 뒷모습을 향해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야!!! MI친거 아니야?! 너 이리 안 와?”
나는 변태일지도 모른다.
나를 위협하던 저 인상이 무너지는 게 왜 이리 통쾌한지 모르겠다.
'바보'라는 뜻을 담아 쿡하고 비웃어 준 뒤, 붉은 머리의 손에서 채간 두부를 계산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인상을 봤을때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닌 것 같았으므로, 빈틈을 만들지 않고자 마트에서 나온 뒤에도 한 참을 뛰어갔다. 목 끝까지 차오르는 숨이 더이상 안된다며 나를 막을 때 쯤, 다리를 멈춰 세웠다.
헥..헤엑..
숨은 차올랐지만, 왠지모르게 스스로가 뿌듯했다. 이렇게나 순발력이 좋았구나 싶어, 나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러던 중, 그 분의 인상차림을 다시 떠올렸다. 어디선가 많이 본 셔츠, 목 주변에 자리잡고 있던.. 어디서 많이 본 노란 줄무늬 검은 넥타이.. 그러고보니 나랑 비슷한 나이 인 것 같기도..
생각할 수록 머리가 무거워 지는 것 같아, 만나지도 않을 사람 생각하지 말자로 결론을 지었다.
"그래! 뭔 상관이야, 다시 보지도 않을 사람."
..난 이때 왜 그랬을까. 아직도 후회한다.
***
이제서야 돌아본 주변 광경. 어느새 조금 어두워져 있는 하늘의 물감이, 주황색과 군청색을 혼합하고 있었다. 그 색이 아름다워, 다가오는 군주황색을 미소지으며 반겼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구나."
"빨리 녀석 집에 다녀와야 겠다!"
녀석의 집 앞.
한 손에 든 두부가 생각보다 무거웠는지, 초인종이 잘 눌러지질 않았다.
잘 눌러지지 않는 초인종과 씨름하던 중, 뭔가 떠올라 잠시 멈칫했다.
녀석에게 당당히 할 말을 건네고 나오긴 했지만, 문 뒤로 들려왔던 녀석의 다신 오지말란 말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천천히 무거워지는 생각들에 의해, 행동까지 점점 느려지고 있다.
"거..걸리긴 개뿔!!"
"하나도 안 섭섭해! 왜냐면 허스키는 원래 그랬거든!!"
"그리고 난 당당해!! 그릇 가지러 온거라고!!"
몸이 괜찮지 않은 것 같다면 괜찮다고 외쳐주면 된다. 이렇게 자신감을 불어주고 나니, 확실히 더 나아진 것 같다.
생각을 고개 저으며 마무리 지었고, 두부 쥔 손을 차렷한 뒤, 반대쪽 손을 이용해 초인종을 세번 딱 딱 딱 눌렀다.
딩동-
딩동-
"...?"
내 귀에도 초인종 소리의 울부짖음이 들려오는데..
왜 일까. 정작 안에선 반응이 없었다.
조금 더 있으면 반응이 있지 않을까 싶어 기다려봤음에도, 들려오는 건 바람이 내뱉는 정적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