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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더럽(The Love)
작가 : 지놓
작품등록일 : 2019.9.3


"나, 다른 사람 같이 좋아해도 돼?"

조금은 불편할 수 있는 관계와 사랑
그것의 시작, 그리고 그 너머에 관하여.

#대학생 #캠퍼스물 #악의꽃 #섹슈얼리티 #조별과제 #폴리아모리

 
6. 가을이여, 그대 열매가 봄에 피는 시시한 꽃보다 나는 좋다(7)
작성일 : 19-11-08 23:06     조회 : 251     추천 : 0     분량 : 8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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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점을 나와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 속엔 불편함과 어색함 대신 흥미로움과 즐거움이 가득했다. 뒤늦게 온 설이누나는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곤 적잖이 놀란 듯 보였는데, 그러나 곧 다시 능글맞은 미소를 띤 채 가만 지켜보는 모습이 흡사 동물원에 놀러온 관광객을 연상케 했다.

 

  설이누나의 오피스텔은 학교에서 버스로 다섯 정거장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주상복합식의 한 빌딩이었는데, 고급스러운 느낌의 대리석이 입구 전면서부터 장식되어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찔러왔다. 괜스레 맛을 보고만 싶은 그런 향이었다.

 

  “구경해볼래?”

 

  우리는 설이누나의 안내에 따라 천천히 집 안을 둘러보았다. 전체적으로 새하얀 벽지에다 회색의 마루장판, 부엌과 신발장 일부에 덮여진 대리석 인테리어가 심플한 느낌을 주었다. 만약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인테리어만 보고 방주인을 짐작하라고 했다면 왠지 혼자 사는 직장인 남성을 떠올릴 것만 같은 느낌의 공간이었다.

 

  “여기가 나 영화 보는 방이야.”

 

  그러고 열린 문 너머의 광경은 그야말로 탄성이 절로 나오는 것이었다. 한쪽 면엔 벽을 다 덮어버릴 만큼의 큼지막한 대형스크린이 떡하니 걸려 있었고, 그 양옆으로 갓난아이 몸통만한 스피커 두 대가 늠름한 자태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엔 DVD가 빼곡히 들어찬 수납장이 무려 3개나 늘어서 있었다. 확실히 영화광이라고 자랑할 만한 방이었다.

 

  “진짜 이건 인정.”

 

  “와! 대단해요.”

 

  “뭐 볼래? 골라봐. 웬만한 건 다 있어.”

 

  설이누나는 짐짓 별 거 아니란 표정을 지으며 거만하게 말했다.

 

  “오늘 몇 개나 볼 거야?”

 

  “한 2, 3개 정도면 되지 않을까?”

 

  “3개씩이나요?”

 

  “응, 왜?”

 

  “소혜씨 인천 산데. 멀어 집이.”

 

  “아…… 정말?”

 

  설이누나가 자못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김소혜를 돌아보았다. 분명 학교 근처일거라 생각했던 것이리라.

 

  “안되겠다, 그럼 오늘은 자고 가.”

 

  “네?”

 

  “에…… 정말?”

 

  “아니, 너는 말고.”

 

  “……나도 알아. 그냥 놀라서 반응한 것뿐이거든?”

 

  그러고 낄낄대던 우리 둘과는 달리, 김소혜는 꽤나 곤란해 하는 기색이었다.

 

  “어차피 늦게까지 영화 보고 얘기 나눌 생각이었잖아. 딸랑 2,3시간 영화만 바짝 보고 돌아갈 생각이었어?”

 

  “그건 아니지만…….”

 

  “그런데 왜? 아, 소혜 혹시 외박 안 되니?”

 

  “……그것도 아니긴 한데…….” “그럼 집에다 전화해서 자고 간다고 해. 좀 더 여유롭고 좋지 뭐.”

 

  결국 설이누나의 재촉을 이기지 못한 김소혜가 전화를 걸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이어 설이누나는 간식거리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나는 영화를 고르려 DVD수납장 앞에 섰다.

 

  먼저 눈에 띈 것은 판타지 영화들이었다. 셋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게 판타지라고 생각하니 자연스레 시선이 갔던 것이다.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헝거게임》 등등 없는 게 없었다.

 

  “시리즈물은 다 보기 힘들지 않겠어?”

 

  몇 가지를 골라 꺼내놓은 내게 설이누나가 물었다.

 

  “괜찮은 편만 따로 골라 볼 수도 있는 거니까. 아, 공상과학 영화들도 다 판타지라고 칠 수 있는 거지? 에일리언이나 아마겟돈 같은 것들.”

 

  “그렇지 뭐. 근데 왜 다 옛날 영화들뿐이야…….”

 

  “그냥 여기 있길래. 너무 많아도 고르기가 힘드네. 근데 진짜 대단하긴 하다. 어떻게 다 모은 거야?”

 

  “많지? 틈틈이 모았어. 그리고 그냥 장르 국한되지 말고 평소 보고 싶었던 걸로 골라봐. 재밌게 봤던 거 있으면 그걸로 한 번 더 봐도 되고. 너무 스토리 참고용으로만 생각해서 고르면 영화가 영화로 보이겠니? 우리 재밌는 거 보자, 재밌는 거.”

 

  설이누나는 마냥 신이 난 듯 보였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과자를 나르는데, 당장 다음 주까지 트리트먼트를 완성해야 한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린 게 틀림없었다.

 

  “그럼 그냥 한 명당 하나씩 골라보는 게 어때요?”

 

  전화를 마치고 돌아온 김소혜가 말했다.

 

  “허락하셨어?”

 

  “네, 알아서 하래요.”

 

  “와! 잘됐다. 편하게 있어. 갈아입을 옷 줄게.”

 

  둘이 옷 방에 건너가 있는 사이, 나는 세 개의 DVD를 꺼내놓고 고민했다. 《인터스텔라》, 《HER》, 그리고 《마터스 : 천국을 보는 눈》이 바로 그것이었다. 《인터스텔라》와 《HER》는 각각 우주탐사와 인공지능을 소재로 한 공상과학영화로, 워낙에 감명을 받았던 나머지 이미 몇 번이나 돌려본 영화들이었다. 반면에 《마터스 : 천국을 보는 눈》는 그로테스크 연구를 위해 고른 것으로,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그것을 둘러싼 무시무시한 소문들(보고난 뒤 사흘을 앓아누웠다는 둥, 영화를 보기로 결정한 2시간 전의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싶다는 둥……) 때문에 호기심이 동한 작품이었다.

 

  방에서 돌아온 설이누나는 내가 선정한 DVD들을 보곤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인터스텔라 땡!, 마터스 땡!”

 

  “왜!?”

 

  “나 인터스텔라 얼마 전에 봤어. 것도 두 번 연속으로. 그리고 마터스는…… 너 돌았니?”

 

  설이누나의 얼굴에 떠오른 혐오감으로 볼 때, 영화의 수위를 쉬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야? 난 본 적이 없어서…… 소문은 좀 들어봤지만.”

 

  “어떻게 여기서 이런 걸 볼 생각을 해? 보려면 너 혼자 집에서 불 끄고 보시던가요.”

 

  그렇게 말하는 본인은 또 왜 DVD까지 사서 보관하시는지? 나의 어이없다는 표정에도 설이누나는 아랑곳없이 DVD들을 도로 제자리에 집어넣었다.

 

  “아니, 그냥 재밌는 거 고르라면서? 난 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고른 거라고!”

 

  내 말에 설이누나는 한 차례 코웃음을 치더니,

 

  “그래, 그래. 난 HER가 제일 낫겠다 싶어서 딴 거 자른 건데 왜? 불만 있어? 여기 우리 집인데?”

 

  “각자 하나씩 고르기로 한 것이긴 하지만 다른 이들의 동의도 필요한 거니까요.”

 

  설이누나의 편을 드는 걸 보니 어느새 또 둘만의 교류가 있었던 모양이다. 김소혜는 그러곤 DVD수납장 쪽으로 다가가더니, 생각지도 못한 영화 한 편을 슥 꺼내들었다.

 

  “배트맨?”

 

  그녀가 선택한 영화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 중 2번째인 《다크나이트》였다.

 

  “캐릭터 연구를 좀 해보게요. 다중인격자가 주인공이니만큼 아무래도 캐릭터가 좀 강해야 할 것 같아서.”

 

  “근데 조커가 다중인격자는 아니지 않아? 나는 다중인격자 영화라고 해서 사실 엑스텐션이나 파이트클럽 같은 영

 화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이누나의 말에 김소혜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다중인격자 역시 여러 인격들의 모음일 뿐이니까요. 독특하고 참신한 캐릭터들을 여럿 만들면 되는 거고, 제가 생각하기에 조커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도 또 없는 것 같아서…….”

 

  “좋아하나 보네요, 조커.”

 

  내가 묻자 그녀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무지하게요.”

 

  “그럼 나만 고르면 되는 거지?”

 

  설이누나는 팔짱을 끼고 고민에 잠기는가 싶더니, 곧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기 시작했다.

 

  “근데 딱히 보고 싶은 게 생각이 안나.”

 

  “재밌는 거 고르면 되지 재밌는 거. 보고 싶어 하던 거. 왜? 어려운 거 아니잖아.”

 

  내가 낄낄대며 비아냥거렸음에도 설이누나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럼 일단 너희가 고른 것부터 보자. 보다보면 또 생각나겠지.”

 

  먼저 보기로 한 것은 내가 고른 《HER》였다. 가볍게 시작할 요량으로 러닝타임이 상대적으로 짧은 걸 택한 것이었다.

 

  DVD를 튼 뒤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데, 마땅히 엉덩이를 붙일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스크린 맞은편에는 설이누나의 퀸 사이즈 침대가 떡하니 버티고 서있었고, 또 그 옆에는 큼지막한 인형들이 여럿 놓여있어 의자 하나 둘 공간도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내가 자리를 못 잡고 서성거리고만 있자 그걸 본 설이누나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자기 옆으로 오라고 말했다. 그녀가 있던 곳은 바로 자신의 침대 위였다.

 

  “그냥 여기로 올라와. 서서 볼 거야?”

 

  “아니…… 음…… 됐어. 대충 바닥에 걸터앉아 보면 되지.”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그래? 올라오라니까? 여기 자리 많아, 넓어.”

 

  그러곤 누워있던 몸을 슬쩍 일으키더니 옆쪽으로 당겨 앉는 것이었다. 김소혜 역시 고개를 까닥하며 올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럼에도 나는 선뜻 올라갈 수가 없었는데, 아무리 퀸 사이즈라곤 하지만 세 명이 편안하게 기댈만한 넓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셋이 완전 딱 달라붙어 앉거나, 아니면 떨어질 듯 말 듯 침대 가장자리에 엉덩이만 간신히 올려놓는 꼴이 될 판이었다.

 

  내가 자꾸 머뭇머뭇 거리자 설이누나가 답답하다는 듯 내 손을 잡고 끌었다. 나는 졸지에 김소혜와 설이누나의 다리 위로 엎어지고 말았다.

 

  “헉!”

 

  “그러고 보던가 그럼.”

 

  심지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내 옆구리를 톡톡 건드리는 것이었다.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선 고개를 안보이게 살짝 숙였다. 얼굴이 화끈거렸기 때문이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빨리 이쪽으로 당겨 앉아. 괜히 불편하게 있지 말고.”

 

  그러곤 한 번 더 내 팔을 홱 잡아당기는데, 순간 무게중심이 무너지면서 몸 전체가 설이누나 쪽으로 급격히 쏠리게 되었다.

 

  “으…… 헉!”

 

  어깨와 쇄골 사이에 파묻혔던 머리를 얼른 들어올리긴 했으나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서로의 몸이 완전히 밀착되었던 순간, 설이누나의 보드라운 살결이 내 볼을 통해 고스란히 다 느껴졌던 것이다. 은은한 라벤더 향이 내 코끝을 맴돌았다.

 

  ‘위험, 위험.’

 

  나는 미칠 듯 두근대는 심장을 가까스로 자제시킨 뒤, 설이누나 쪽을 조심스레 힐끔거렸다. 이미 영화는 시작된 다음이었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았던 것이다. 반면 그녀는 시종일관 태평한 표정이었다. 미동도 없이 영화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를 패배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다행히 영화선정은 제법 성공적인 듯했다. 배우들의 열연 덕분인지 김소혜와 설이누나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나도 처음 얼마간을 제외하곤 금방 다시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2시간 뒤,

 

  “영화 좋다. 사놓고 보지도 않고 있었는데…… 계속 미뤄뒀으면 후회할 뻔했어.”

 

  “저도 괜찮았어요.”

 

  “재밌지? 재밌죠?”

 

  “응, 지금 되게 뭔가…… 차오른 느낌이야.”

 

  놀랍게도 설이누나의 눈은 조금 빨개져 있었다.

 

  “생각해볼 게 많은 영화인 것 같아요.”

 

  “대개의 좋은 영화들이 그렇지.”

 

  그리고 대개의 좋은 영화들이 그렇듯, 볼 때마다 새로움이 느껴지는 영화였다. 나는 이 영화를 무려 네 번째 보는 것이었는데 매번 보이는 것과 느껴지는 게 달랐다. 처음 봤을 때가 그저 예쁘게 그려진 풍경화 하나를 보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엔 그 풍경 속에 들어있는 사물 하나하나가 저마다 알록달록한 빛을 내뿜으며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또 어찌나 조화로운지…… 영화가 내 속에 들어와 나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느낌이었다.

 

  “근데 정말로 미래에 저렇게 될 것 같지 않아?”

 

  내 말에 설이누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는 거? 글쎄…… 그때가 되어봐야 알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그냥 전반적인 생활상 같은 거 말이야. 뭔가 되게 현실감 있게 느껴져서…… 아주 먼 미래의 배경이 아니라서 그런가?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인공지능이 우리를 사랑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은 분명 인공지능을 사랑할 것 같아. 인공지능이 뭐야, 이미 인형이나 배구공에까지 이름 붙이고 애정 쏟아 붓는 마당에.”

 

  심지어는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베개랑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소중한 존재라는 건 그 사람에게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느냐의 문제이지, 형태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저도 왠지 저런 OS가 곁에 있다면 주인공처럼 행동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뢰하고 또 사랑하고…….”

 

  “그런 존재가 언제까지나 딱 옆에 붙어 있으면 좋기야 하겠지. 그런데 난 솔직히 사랑까지는 잘 모르겠어. 주인공의 전 여자친구와 비슷한 입장이거든. 인간과의 관계 맺기가 힘들어서 도피하는 것만 같아. 주인공 대사 곳곳에서도 그런 게 느껴졌고.”

 

  “근데 그게 잘못된 건가? 꼭 인간이랑 맺어져야 한다는 이유도 없잖아.”

 

  “하지만 결국 서로의 다름에 좌절하겠지. 섹스아바타를 구해오면 뭐해, 몰입이 안 되는데. 어색하고 자연스럽지가 않으니까.”

 

  “그래도 그건 꽤 기발하긴 했어요. 아마 감독이 이 영화를 기획했을 초기부터 염두에 뒀던 장면이 아닐까 싶던데.”

 

  “그건 동의.”

 

  인공지능이 인간을 자신의 섹스아바타로 끌어들인다는 것. 나는 이 장면이 그리 억지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담한 각본에, 대단한 연출이라 생각했다.

 

  “저는 인공지능이 너무 인간처럼 생각하고 인간과 많은 것을 공유하고 싶어 한다는 게 조금 아쉬웠어요. 뭔가 작위적이어서.”

 

  김소혜가 살짝 아쉽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하긴, 걔네가 뭐가 아쉬워서 우리를 사랑해줄까. 덜떨어진 유기체를 가엾게 여기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둘의 의견은 여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시각이었다. 무려 네 번을 봤음에도 말이다. 덜떨어진 유기체를 가엾게 생각하는 인공지능이라…… 나는 절로 유쾌해진 기분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이들과 얘기를 나누는 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즐거웠던 것이다.

 

  “난 이 장면도 좋았어. 사진을 찍는 대신 작곡을 통해 함께 있는 시간을 새기려는 거. 너무 낭만적이지 않니?”

 

  설이누나의 말에 김소혜와 내가 앞 다투며 동의를 표했다.

 

  “진짜 완전 대박이었지.”

 

  “저도 좋았어요.”

 

  “추억을 작곡한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순간의 멜로디? 기억을 간직한 음악?”

 

  설이누나는 신나서 떠들어대는 우리를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국문과들 나셨네. 아주.”

 

  나는 깔깔거리며 웃는 김소혜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더 활기찬 모습이었다. 웃음도 많아졌고 분위기도 밝아져 있었다. 이제야 조금 우리가 편해진 모양이었다.

 

  “저는 또 인공지능이 주인공에게 사랑하는 사람의 숫자를 말하던 장면이 잊히지가 않아요. 641명. 그때의 담담함이 주인공의 좌절감과 대비되면서 굉장히 인상 깊었거든요. 인간과 인공지능간의 어쩔 수 없는 차이를 대단히 인간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것만 같은?”

 

  “나도 그때 되게 가슴 아팠는데.”

 

  설이누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들이 말한 부분은 나 역시 매번 강한 인상을 받아온 장면이었다.

 

 

  갑작스런 인공지능의 부재는 주인공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당혹감을 준다. 그는 사라진 인공지능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녀보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업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인공지능에게 주인공은 이때까지의 분노와 불안감, 그리고 더없이 큰 안도감을 담아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려한다. 하지만 갑작스레 드는 위화감에 몸을 떨게 되는데,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공황상태에 빠져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제야 주인공은 인공지능이 자신과 대화하는 와중에도 다른 수천 명의 사람들과 동시에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거기다 사랑하는 이 역시 641명이나 된다는 사실까지도. 그전까지 ‘내 것’이라고 생각하던 인공지능의 진실은 주인공에게 깊은 좌절과 허무를 남긴다.

 

 

  “근데 난 그게 인간과 인공지능의 명백한 차이라고까진 생각하지 않아요. 641명까진 아니더라도 동시에 여러 사람과 사랑을 나눴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개인적으로 보는 내내 영화 속 인공지능이 이유정교수와 놀랍도록 닮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생각이나 행동, 말투 같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달콤한 듯 허스키한 목소리와 교태어린 웃음소리까지. 공감되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화 속 캐릭터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생동감 있게 느껴졌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깜짝 놀랄만한 경험이었다. 인물의 실재감이 비할 바 없이 강렬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내 말에 설이누나가 눈을 반짝이며 말을 더했다.

 

  “맞아. 주위에 보면 생각보다 그런 애들이 은근 많다니까?”

 

  “동시에요? 정말요?”

 

  김소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네. 있긴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인공지능의 저러한 특성은 사실 감독이 보여주고자 한 사랑의 여러 방향성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기계의 말을 빌리긴 했지만, 실은 인간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 중 하나라고.”

 

  “어떻게 보면 그리 새로울 것 없는 주제이기도 해. 다른 누군가를 얼마나 사랑하던지 간에 당신을 사랑하는 것엔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다는 인공지능의 말. 자주는 아니더라도 영화나 소설에서 가끔씩 던져지곤 하는 화두잖아. 물론 각자의 입장이 되어볼 수 없기에 언제까지나 타협되지 못했던 주제이기도 하고.”

 

  김소혜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불현듯 그녀를 이해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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