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멸 ]
시꺼먼 파도가 힘차게 몰려와서는 길다란 회색 방파제 둑에다 포효
하듯이 부딪히고는 뿌연 물보라를 파편처럼 튀기면서 사라져갔다.
벌써 한시간을 넘게 보고 또 보고 있는 똑같은 광경의 반복이었다.
차 오디오 박스안의 액정시계는 어느새 5시 40분인가를 가르키고
있었고 주위도 희미하게나마 밝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아침에 차에 시동을 걸고서는 곧장 영동고속도로를 타고서 쉬지도
않고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이곳 영덕 근처에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저만치 어슴프레하게 보이는 외딴 등대가 을씨년스럽게 동공속을
파고들었다.
10월의 밤바다는 아직은 춥게만 느껴진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서 줄담배만 피워댄탓인지 위장 저아래
구석에서 불편함을 넘어서서 욱신거리는 통증까지 치밀어 오르고 있
었다.
그러고보면 요 며칠째 나천석은 미니지게임의 혈전에 빠져서 거의
식사를 제대로 한적이 없었는데,
엊그제 은행측의 마지막통보를 받고서는 그나마 식욕마저 완전히
사라져서 그의 위장안은 텅비다시피 한 상태였으니......
사업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불편한 가정생활로 인한 괴로움에서 탈출
하고 싶은 충동으로 술이나 도박대신에 빠져들었던 것이 미니지 게임
이었는데 이제 그 게임마저도 모두 다 끝나버린 것이었다.
혈전의 깨끗한 패배...... 더 이상 미련도 아쉬움도 남지 않은채
미니지는 그렇게 끝나갔다.
그만큼 심하게 혹사당한 심신의 피로감과 패배의 충격위로 덮쳐 들어
온 것이 사업에서의 파산이었다.
정말 맨주먹으로 시작하다시피해서 황량한 사막의 모래판을 손톱으로
박박 긁어대는 고생을 해가며 남들의 부러움과 질시를 살만큼 전성기를
구가하던 학원사업이 결국에는 강동 제2학원의 만성적인 부실에 본원의
수익악화까지 겹쳐져서는 그동안의 과도한 은행차입과 카드돌려막기에서
발생한 눈덩이같은 부채와 이자규모를 더이상은 막을수가 없는 형국에까지
다다르고 말았던것이다.
정말 이제는 모든게 끝나버린 것이다.
'......'
나천석의 까만 그랜져 바로 앞쪽에는 불과 20여미터 폭의 모래사장이 황량
하게 펼쳐져있고 그 앞은 시꺼먼 동해바다였다.
조수석 대쉬보드위에 여섯살난 정남이와 두살터울의 유정이 사진이 동그란
스프링 장식대에 앙증맞게 달려있는 것이 눈동자 안을 아프게 헤집고 들어
왔다.
더이상 어찌 갈곳도 안보이는 깜깜한 종점앞에 서 있는 듯한
이 시점에 와서 골치아플정도로 잔소리만 해대던 와이프한테마저 일말의
미안함과 죄의식 같은 것이 들었지만, 무엇보다도 피붙이 자식들에 대한
가슴아픔은 형언할수 없는 쓰라림으로 마음속을 파고 들고 있는 것이었다.
언제나 바쁜 사업을 핑계로 그 흔한 놀이동산이나 피자집에도 자주 같이
가주지 못한 못난 아빠로서의 후회스런 기억들이 지금 이순간 양심의
뼈아픈 가책이 되어 비수처럼 마구 내리꽂는 것이었다.
"아...... 아......"
와이셔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담배갑을 쥐어보았지만 어느새 텅 비어
있음을 느끼면서 빈 담배갑을 쭈깃쭈깃 접어버렸다.
그러고는 옆자리에 걸쳐둔 상의 포켓을 뒤져서는 어제 밤에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면서 수중에 있던 돈 전부를 모조리 털어서 사두었던
즉석복권 20 장을 꺼내보았다.
우습지만 이것은 정말 마지막 시도였다.
부질없는 짓, 하릴없는 바램이라고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나천석은
운명처럼 그 복권들을 차례대로 긁어내려갔다.
총 당첨상금이 무려 10억...... 만일 만일에 이루어질수만 있다면
그 무시무시한 빚들도 거진 탕감할 수가 있는 것인데......
그렇게만 된다면 다시 한번 일어서볼 수도 있을텐데, 10년 전 처음
그때처럼......
핸들위의 복권들이 동전사이로 한꺼풀 한꺼풀씩 천천히 벗겨져 내려갔지만,
그 10억의 행운은 모질게도 끝끝내 나천석을 거부하고 있었다.
다만 똑같이 500원짜리 원금만 덩그러이 당첨된 몇장의 종이들만이 비웃듯이
허탈하게 흘러내릴뿐......
"여보 미안...... 정남아! 유정아! 다음 생에서는 이런 아빠-사업같은
바보짓하는 아빠말고 착하고 평범한 좋은 아빠만나서 행복하게 살기를.
....."
남자는 색바랜 다이어리 용지위에 휘갈기듯 써놓은 마지막 편지를 움켜
잡고서는 이제서야 결심한 듯 시동을 걸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어내렸다.
까만색 그랜져가 비틀거리듯이 검은 바다속을 향해 천천히 돌진해들어가고
있었다.
퉁명스런 밤바다 해안 모래바닥위로는 굵다란 타이어 자국만을 고집스레
남겨둔 채로.....
집채만한 파도가 포효하듯이 덤벼들더니 이름모를 서울번호판의 자동차
한대를 순식간에 삼켜버리고는
이내 아무일도 없다는 듯 어둠속으로 다시 사라져버렸고
그 위로 희뿌연 밤안개만이 어지러이 춤추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