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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그리고 그 후
작가 : 전Yeah
작품등록일 : 2019.10.7

2014년, 갑작스레 일어난 사태 이 후 인류는 멸망하였다. 그로부터 1년 후, 사태에서 살아남은 이설전은 변해버린 환경과 그것에 적응해가는 자신에게 회의감을 가지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괴리감을 느끼기 시작하다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이미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는 자들의 일상을 쓰는 아포칼립스 일상물.

 
11 - 동창회 (2)
작성일 : 19-10-23 23:40     조회 : 220     추천 : 0     분량 : 1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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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아득히 깊은 생각의 심연으로 들어 가본다.

  수많은 기억과 상상들이 별 가루처럼 반짝이더니

  홍수가 되어, 물줄기처럼 빠져나간다.

  휘몰아치는 생각의 바다를 헤엄치다

  여자의 기억 속에 하나의 인물을 찾아낸다.

  그 인물의 기억을 손에 잡자

  빛들이 밧줄모양으로 만들어지며 잡힌다.

  빛은 어두운 기억 가장 아래 쪽 까지 이어져 있다.

  여자는 밧줄을 잡고 점점 더 깊은 심연으로 내려간다.

  아득히 먼 기억.

  기억의 끝자락에서 동생에 대한 첫 기억은 감탄이었고

  동생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절규였다.

 

  처음 동생에 대한 기억은 감탄이었다.

  동생은 인형 같았다.

  살아있는 인형은 칭얼대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그렇게 그녀에게 첫 모습을 보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형.

  작고 조그맣고 연약한 인형.

  엄마와 아빠는 이 인형을 동생이라고 불렀다.

  여자도 그 인형이 동생이라고 불렀다.

 

  인형은 다른 인형들과는 달랐다.

  제때 먹여야 했고 언제나 칭얼거렸다.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댔으며

  그 시간만큼 부모님은 동생에게 그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그 시간만큼 여자의 시간도 사라졌다.

 

  여자는 인형을 위해 모든 것을 양보했다.

  사소한 장난감,

  사소한 기호품,

  사소한 용돈,

  사소한 잘못,

  사소한 배려,

  사소한 모든 것들.

  여자는 커가면서 그 양보가 불합리하다는 걸 깨닫지만

  그것이 불가항력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걸 이제 와서 청구할 수 없다는 걸

  먼저 태어난 자의 무게라는 걸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차릴 즈음

  인형은 이제 인형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여자는 점차 가족과 거리를 두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동생과도 거리를 두게 된다.

  더 이상 인형이 아니게 된 동생은

  이제 누나에게 양보 받지도 배려 받지도 못했다.

  그러나 동생은 그럼에도 누나를 따랐다.

  양보 받아왔고 배려 받아왔기 때문에.

 

 

  동생이 다가가는 만큼

  누나는 동생에게 멀어졌다.

  동생이 누나를 좋아하는 만큼

  누나는 동생과 벽을 쌓았다.

  동생이 벽을 두드리며 누나의 이름을 불렀지만

  누나는 동생의 목소리만 들을 뿐

  동생의 얼굴은 보지 않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남매 둘이 남았음에도

  남매의 거리는 지구와 달만큼 가깝고도 멀었다.

 

  누나를 보며 동생은 생각했다.

  누나가 변해버린 게 자기 탓이라고.

  누나를 귀찮게 한 자기 탓이라고.

  언제나 누나만 찾던 자기 때문이라고.

 

  동생을 보며 누나는 생각했다.

  내가 변해버린 건 가족 탓이라고.

  자신을 내버려 둔 자기 탓이라고.

  언제나 동생만 찾던 가족 탓이라고.

 

  그리고 사태는 일어났고

 

  여자는 동생의 손을 놓쳤다.

  동생은 여자의 손을 놓쳤다.

 

  그 후 여자는 생각했다.

  지울 수 없는 과거에 대해서.

  돌릴 수 없는 과거에 대해서.

  실수와 후회가 범벅이 된 기억의 끝자락에는

  동생의 웃는 얼굴과 동생의 절규가

  한 그릇 안에 흉물스레 섞여있었다.

 

  그리고 오욕의 세월.

  살아있음에도 살아있지 않는 시간.

  삶을 잃어버린 시간을 사는 동안

  여자는 그런 삶 속에서 삶을 찾아내었고

  동시에 자신 혼자 살아 있음을 느끼며 절망했다.

 

  절망과 희망은 하나의 단면

  때론 그 단면이 너무나 두꺼워 보이지만

  때론 너무나 쉽게 뒤집어 지는 것

 

 

 

  영혜의 손이 떨린다. 그것은 상대방, 영우도 마찬가지였다. 서로를 응시하는 눈은 사연이 많아 보인다. 의심과 반가움이 공존하는 두 사람의 거리가 점차 좁혀지기 시작한다. 영혜가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영우의 눈을 들여다본다.

 

  두려움과 기쁨, 그리고 의심과 혼란이 그의 눈 안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다. 그건 아마 영우를 바라보는 영혜의 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영혜는 천천히 손을 영우의 얼굴로 옮긴다. 그리움과 미안함, 그리고 후회가 가득 담긴 그녀의 손이 영우를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영우는 그런 영혜의 손을 거부하지 않는다. 정말 누나인가? 정말 누나인건가? 의심과 의혹, 당혹스러움이 교차했지만 왠지 그 손길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손길을 통해 영우는 누나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영우의 얼굴에 닿기 직전 멈칫 거리더니 이내 멈춘다.

 

  영혜는 설전의 말을 떠올린다. 화이트보드에 그려진 괴물그림과 사람그림이 스쳐지나간다. 쉽사리 손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 손은 의심과 망설임에 휘감겨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 갑자기 멈춘 손에 영우는 당황한다. 왜 멈춘 거지.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나? 부들부들 떨리는 영혜의 손이 그의 공포심을 더욱 높이고 있었다. 눈앞에 총을 들고 나타난 잃어버린 누나. 그 누나를 보면서, 그것도 손을 떠는 모습을 보이니 영우는 적잖이 당황하고 있다.

 

  허나 누나는 그런 영우를 달래주기는커녕 영우에게 다가가는 것을 망설이고 있다. 왜지? 왜 멈춘 거지? 영우는 당혹스러운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를 피해야 하는 건가? 누나는 나를 피하고 싶은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영우는 덜컥 겁이 났다. 설마 또 다시 누나를 잃어버리는 건가?

 

  그런 영우의 속사정을 당연히 영혜는 알 리 없었고 그녀는 침착하게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폭우 때문에 옷이 젖어있었지만 라이터는 다행스럽게도 젖지 않아 손쉽게 불을 켤 수 있었다. 그녀는 라이터에 불이 들어오자마자 영우의 팔에 갖다 대었다.

 

  영우의 팔에 뜨겁고 따가운 통증이 머리로 전달된다. 머리에선 이 통증에 반응하기 위해 몸에 명령을 보낸다. 영우의 비명이 어두운 산부인과 병원 내부를 울리는 동시에 그의 팔이 그녀를 밀친다. 갑작스런 영혜의 돌발 행동에 의해 깜짝 놀란 영우는 뒤로 물러선 다음 매섭게 영혜를 노려본다. 하지만 영혜는 그런 영우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라이터를 댄 영우의 팔에 쏠려 있었다.

 

  영우의 팔이 빨갛게 부풀어 오른다. 그는 쓰라린 듯 화상을 입은 부위를 어루만진다. 그의 몸은 아까보다 더욱 떨고 있었다. 영우의 공포로 일그러진 눈이 영혜를 바라본다. 영혜는 영우에게 다가간다. 잔뜩 움츠러든 영우를 영혜가 끌어안는다.

 

  놀라고 당혹스러워 하는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영혜는 영우를 안았다. 처음 영우는 발악했다. 자신을 공격했다고 생각한 사람이 갑자기 안는다. 아무리 만나고 싶었던 누나지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누나의 행동에 거부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런 영우의 거친 반항에도 영혜는 포옹을 풀지 않았다.

 

  그리고 길게 지나지 않아 영우는 반항을 멈춘다. 간만에 느껴보는 따뜻한 품. 익숙한 포근함이 영우의 몸에 퍼져나간다. 마지막으로 이 느낌을 받았던 것은 누나와 헤어지기 바로 직전. 무서워 떨고 있는 영우를 영혜가 안아주었을 때였다.

 

  영우는 그제야 누나를 부르며 영혜를 안는다. 눈물범벅, 콧물범벅이 된 소년의 입에서 서러움과 기쁨이 가득한 오열이 터져 나왔다. 그런 영우를 영혜는 말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두호와 설전은 말없이 차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빗소리가 더욱 거세지고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무거운 침묵을 깨기에는 힘들어 보였다. 비는 하염없이 차 천장을 내리치고 있었고 그 아래 두 사람은 묘한 정적 속에 서로를 경계하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설전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보람이랑 정제, 그리고 영우라는 아이랑 같이 이곳에 왔는데 너는 혹시나 모를 괴물에 대비해서 여기를 지키고 있었다는 거냐?”

 

  “그래.”

 

  “참... 살다보니 내가 괴물로 오인 받을 때도 다 있구만.”

 

  “당연한 거 아니냐? 뭐 이상한 게 꼼지락 꼼지락 거리고 있는데 혹시나 싶은 게 당연한 거지. 괴물치고는 잘 숨었다고 생각이 들긴 했지만. 뭐, 사람인 걸 눈치 챘을 때도 괴물보다 그게 더 무서웠지.”

 

  설전이 허탈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두호는 그런 설전을 보지 않은 채 정면을 응시했다. 두호와 설전. 두 사람은 오랜 친구사이였다.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사교성이 없던 설전의 몇 없는 친구 목록에서 두호와 정제는 당당히 그 목록 안에 이름이 있던 사람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친구였던 설전과 두호는 어른이 되면서 잠시 사이가 소원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가끔은 연락을 주고받는 그런 사이였다.

 

  반대로 지금 이 자리에 없지만 정제는 설전의 옆집에 살며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오던, 계속 끊임없이 연락 해온 절친 중에 한 명이었다. 사태 전까지 연락을 하고 지냈지만 사태 후로 만나는 그가 갑자기 오늘 애 아빠가 될지도 모른다니.

 

  거기다 그의 상대는 연보람. 두호의 친한 동생으로 만나 안면을 튼 아이였다.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어색한 정도는 아니어서 서로 안부를 묻고 밥도 몇 번 같이 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성격이 괄괄하고 어릴 적 침 좀 뱉으며 골목 정리 좀 하던 아이라 차분하고 지적인 정제와는 전혀 인연이 없을 거라 여겼는데.

 

  지금 두 사람의 사랑이 결실이 오늘 여기서 나올지 모른다고 한다. 처음 그말을 들었을 때 어이가 없었다. 두호가 만나자마자 개소리를 늘어놓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두호라도 이런 상황에서 살아있는지도 몰랐던 친구에게 헛소리를 할 놈은 아니다. 설전이 깨진 창문 너머로 산부인과 위쪽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정말로 연보람이랑 이정제 두 년놈이 눈이 맞아서 지금 저기에 있다, 이거지?”

 

  “그래.”

 

  “거 진짜 세상 살아볼 이유가 있네. 둘이 완전 거진 남 아니었냐? 그냥 연락이나 조금 하던 사이였잖아.”

 

  “뭐, 피난소에서 생활하다 보니 둘이 눈 맞아서 이리저리 된 거겠지.”

 

  “거참. 그 사태에서도 할 건 다 했나보네. 근데 넌 왜 둘 사이에 낑겨 있냐. 눈치 없게 시리.”

 

  “새끼야. 피난소 나올 때 내가 애들 데리고 나온 거거든? 내가 애들 대피 잘 못시켰음 여기 있지도 않았어.”

 

  “그래서 피난소 대피 4인조가 1여년 가까이 같이 생활을 해오다 보람이가 임신인 걸 알았고 출산일이 다가오자 황급히 산부인과를 찾으러 다녔다 이거네.”

 

  “그래. 그런 거다.”

 

  두호의 말에 의하면 피난소에서 보람과 정제를 만났다고 한다. 그러나 피난소에서 괴물이 발생하자 결국 대피할 수밖에 없었고 누나를 잃어버려 울고 있던 아이를 데리고 그대로 자동차를 타고 빠져나와 깊은 시골에 대피해 있었다는 것이다.

 

  피난소에서 대피할 때 죽은 병사의 총과 탄창 몇 개를 뺏은 덕에 지금까지 잘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때 보람과 정제, 연우까지 총과 탄창 등을 빼돌린 양이 상당해서 한 동안은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고. 다만 요 몇 개월 간 보람의 임신과 더불어 총알도 다 떨어진 상태라 이동이 불가피 하던 중, 출산이 임박하자 결국 보금자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여자 배가 점점 불러오면 미리 대비를 했어야지. 뭐하고 있었냐.”

 

  “X발. 어쩌라고. 밖엔 괴물들 드글거리지. 뭐 구하려고 해도 밖에 나갈 수가 있냐.”

 

  “근데 피난소라..”

 

  “피난소는 갑자기 왜?”

 

  두호의 질문에 설전은 그냥 이라고 대답한 뒤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피난소라면 보자. 어디지? 어디를 피난소로 사용했었냐?”

 

  “왁자 체육관.”

 

  “여기서 한 차로 20분 거리네. 하긴 이 근처에서 가장 크고 시설도 좋은 곳이니 거기가 최적이긴 하지. 근데 피난소를 나오고 어떻게 살았냐? 식량도 없을 텐데.”

 

  “뭐, 보람이랑 정제랑 그리고 영우 데리고 차로 이리저리 다니다가 왁자 근처 동네 있잖아. 지권리. 거기서 살았지. 거기서 자급자족을 했어. 비어있는 농가에 들어가서 가을엔 벼를 추수하고 과수원에 과일도 따고 소나 닭도 무사한데다가 근처 구멍가게의 물품도 우리가 잘 썼지.”

 

  “차는 어디서 났는데?”

 

  “내꺼야. 한 푼 두 푼 열심히 모아서 샀어. 근데 그게 오늘로 생명이 다했지만.”

 

  “용케도 피난소에서 네 차있는데 까지 갔네.”

 

  “도망칠 때 피난소까지 차끌고 주변에 주차시키고 들어왔거든. 만약 괴물들 사라지면 바로 타고 뜰 수 있게.”

 

  용의주도한 새끼라며 설전이 욕을 하더니 다시 두호에게 질문 했다.

 

  “지권리에서 살았는데 왜 여기까지 온 거냐.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걸리는 시간에.”

 

  “오고 싶어서 왔냐. 지권리에도 괴물 막는다고 바리게이트랑 이상한 벽들 엄청 쳐놨거든. 근데 사실 그 안에 산부인과가 있긴 있었어. 그래서 우리도 거기로 가면 되겠다 싶었지. 근데 시X, 그 안에 괴물들이 가득해. 그냥 아주 드글드글하다고. 그러니 어째. 가장 가까운 도시가 왁자시니 거기로 차를 모는데 시X. 여기도 병원 마다 괴물들은 엄청나지. 보람이 그 년은 진통이 심해진다고 그냥 난리지.”

 

  “그래서 괴물도 없고 한산한 여기에 멈춘 거군.”

 

  “그런 거야. 이 근처에는 의외로 괴물들 숫자가 적어서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설전은 두호에게 궁금한 것을 더 물어보려고 했지만 참았다. 생존하는 동안 어떻게 지내 왔는지, 그리고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증은 컸지만 설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호 쪽이 설전에게 먼저 질문을 했다.

 

  “근데 올라갔다던 네 동료. 괜찮냐? 잘못하다 보람이랑 정제한테 해코지라도 하는 거 아냐?”

 

  “그렇게 사리분별 없는 놈은 아니니까 걱정은 안하지만. 그래도 올라가 보는 게 좋겠지.”

 

  설전이 말하자 두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혜는 당혹스럽다. 영우에게 어떻게 지내왔는지 제대로 묻지 조차 못한 채 영우에게 끌려온 병실에는 몹시 지쳐 보이는 남자와 그보다 더 괴로워 보이는 만삭의 여자가 먼지구덩이인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영혜는 지금 상황이 단번에 이해가 갔지만 현실로 와닿지 않고 있었다.

 

  “누나! 어떻게 좀 해줘. 보람이 누나가 지금 당장 아이가 나올 거 같단 말이야.”

 

  “어..엉?”

 

  영우의 말에 영혜는 당황스럽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고 있었다. 그저 영우의 손에 끌려 온 거뿐인데 갑자기 난데없이 아이를 낳아야 한다니? 갑자기 펼쳐진 어이없는 현실에 영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한편 남자는 이 사람이 누구냐고 영우에게 물었고 영우는 자신의 누나를 남자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정말?! 이 사람이 네가 잃어버렸다던 그 누나?”

 

  “응! 정제형!”

 

  “하하.. 정말.. 이렇게 위급한 상황인데도 웃음이 다 나오네. 정말 다행이다.”

 

  정제가 진정으로 기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자 산통에 괴로워하던 보람도 영우를 향해 말했다.

 

  “후.. 다, 다행이네, 영우야. 그... 그렇게 보고 싶던 누나를... 여기서 다 만나고...”

 

  “누나 괜찮은 거야?”

 

  보람이 말을 걸자 영우는 다급하게 보람이 누워있는 침대 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안색은 매우 안 좋아 보였다. 산통이 심해져서인지 아니면 다른 심적 압박이라도 느끼고 있는 건지 보람의 호흡은 가빴고 식은땀은 사우나에 온 듯 줄줄 흘러내렸다.

 

  “괜찮..아.. 후우..후우.. 으으..”

 

  “전혀 안 괜찮아 보여.. 어떡해, 형? 어떡해.”

 

  “일단 보람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고 들이마셨다가 내쉬고..”

 

  정제가 심호흡을 하는 시늉을 하자 보람도 정제가 하는 대로 따라하며 호흡을 골랐다. 호흡이 어느 정도 돌아온 듯 숨소리는 조금 얌전해졌지만 고통은 여전한지 그녀는 계속 얼굴을 찡그리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영혜는 보람과 정제, 그리고 영우를 보았다. 영우를 도와줬다는 고마운 분들. 그런데 지금 그 고마운 분들이 매우 힘든 상황에 처해있다. 감사를 표하기도 전에 닥친 위기상황. 어떻게든 영혜는 저 분들을 도와줘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출산에 관한 지식을 갓 20살이 된 영혜가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그녀는 당혹스러웠다. 자신의 무지가 이렇게 한탄스러울 수 없었다. 영혜는 평소에 책 좀 읽으라고 타박하던 설전이 떠올랐다. 가끔 하는 오빠의 타박은 참 놀랍게도 바늘같이 자신을 찌를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영혜는 고개를 저으며 침대를 바라보았다. 먼지가 가득 쌓여 전혀 위생적이지 않았다. 산부인과라 하더라도 1년 동안 방치된 이곳은 전기도, 의사도, 시설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녀는 확실한 마지막 대안을 떠올렸지만 그것은 정말 너무 위험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영혜가 고민에 휩싸인 사이 복도 너머로 발소리가 들리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윤두호였다. 그는 오자마자 보람과 정제, 영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보람이는 좀 어때? 괜찮냐?”

 

  “숨이 가쁘지만 괜찮아. 하지만 산통이 심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정제가 보람의 땀을 닦아주며 대답했다.

 

  “젠장. 뭐 쓸만한 장비 같은 거 없어?”

 

  “없어. 그나마 사용 가능 한 게 이 침대 하나 뿐이야.”

 

  “젠장. 어떡하냐. 애 나오면 애를 씻기는 뭐라도 있어야 할 거 아냐. 장비도 없고. 물도 없고. X발.”

 

  두호가 성질이 난 듯 옆 침대를 발로 찼다. 영혜는 화들짝 놀라며 자기도 모르게 어머 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듣고 그제야 두호는 영혜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넌?”

 

  “아.. 안녕하세요. 영우 누나 이영혜라고 합니다.”

 

  영혜가 예의바르게 두 손까지 공손히 모아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했다. 두호는 그녀가 설전의 일행이란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렇군. 네가 설전이 보낸 뭐? 누구 누나? 영우?”

 

  두호가 영우를 바라보았다. 영우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응. 두호형! 내 누나야! 친누나! 누나가 살아 있었어!”

 

  “어...어? 정말이냐? 이 사람이 네 누나라고?”

 

  두호는 다시 영혜를 바라보았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 앳되고 귀여운 얼굴. 엄청난 가슴. 호리호리한 몸매. 자세히 보니 엄청난 미인이었다. 두호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영우와 꽤 닮아 있는 미소녀였다.

 

  “제..젠장. 영우 이 부러운 놈. 누나가 이렇게 예쁘다니! 그래도 진짜냐? 정말 누나를 찾은 거야, 너?!”

 

  “말했잖아! 우리 누나 엄청 착하고 예쁘다고!”

 

  영우의 말에 영혜가 볼을 발그레 붉힌다. 동생이 자신을 그리 말하고 생각하고 있었다니. 왠지 모를 죄책감과 창피함, 후회가 영혜의 가슴 속에서 일렁거렸다. 영우에게 부럽다며 장난을 치던 두호가 뒤늦게 어떤 사실을 알아차렸다. 잠깐, 설전이 보낸 사람이라면?

 

  “야. 미친놈아. 네 멋대로 올라가버리면 어떡하냐. 내가 애들이 몇 층에 있는 줄 알고? 나보고 혼자 찾아오라고 지 혼자 뛰어간 거냐?.”

 

  설전이 두호 일행이 있는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설전이 나타나자 정제와 보람은 놀랐고 영우는 갑작스런 낯선 사람의 등장에 당황했다. 두호는 영혜를 바라보았고 영혜는 기쁜 듯이 설전을 향해 말했다.

 

  “오빠! 괜찮아요?”

 

  “아, 응. 괜찮지. 그 차에 있던 놈이 이 놈이었어. 두호라고 내 친군데, 그나저나 너는 괜찮냐? 보아하니 여기 사람들과 같이 있는 거라면 서로 이야기가 끝난 건가?”

 

  “네, 괜찮아요.”

 

  “어어...?”

 

  “설전 오빠?”

 

  정제와 보람이 얼이 빠진 표정으로 설전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뜻밖의 남자. 거기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남자. 그 남자가 영우의 누나에게 아는 척을 한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설전이 어안이 벙벙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야, 정말이네. 진짜 너네 둘이 서로 눈 맞은 거냐? 와우, 신기하기도 해라.”

 

  “어라, 오빠 아시는 분들이세요? 설마 이쪽 분들도 친구?”

 

  영혜가 설전을 향해 질문하자 설전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호와 정제를 가리켰다.

 

  “아, 응. 저기 있는 두호놈이랑 저기 지 마누라 어찌 될까 안절부절 못하는 놈은 나랑 파이어에그 프랜드고 저기 있는 여자애는 어쩌다 보니 만나서 알게 된 애야.”

 

  “그랬군요...! 설마 이런 우연이 있을 줄은.”

 

  영혜가 박수를 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설전은 영혜가 입을 열기도 전에 정제를 향해 말했다. 덕분에 영혜의 이야기는 쏙 들어가 버리고 만다.

 

  “근데 정제야. 보람이는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냐? 두호한테 들었다만 지금 상태가 꽤 좋지 않아 보이는데.”

 

  “어..? 어.. 그게, 지금 위험해. 산통이 시작 된지 꽤 흘렀어. 그런데 지금 애를 낳을 적당한 곳이 없는데다 지금 여기 장비도 열악하고. 특히 출산 경험이나 출산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너무 난감해.”

 

  설전이 보람에게 다가갔다. 보람의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정제가 다급하게 닦아주고 있었다. 설전은 그런 그녀의 주변을 살폈다. 위생적이지 못한 환경. 그다지 좋지 않다. 설전이 미간을 찌푸리자 보람이 그를 향해 말을 걸었다.

 

  “설전 오빠... 후...우...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영우 누나랑 아는...사이야?”

 

  “엉? 영우누나? 걔는 누군데?”

 

  설전이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병실 창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짧게 혀 차는 소리를 내더니 영혜를 향해 다가갔다. 영혜와 설전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영혜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설전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런 두 사람의 행동을 바라보던 영우와 두호는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듯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설전이 두호를 불렀다.

 

  “너 예비 타이어 있지?”

 

  “뿐만 아니라 공구도 다 있다. 근데 그건 왜?”

 

  “그래. 얼른 타이어 교체할 준비해라.”

 

  “뭐?”

 

  “여기 있어 봤자, 아기나 산모나 다 안 좋아. 우리 집으로 가자.”

 

  “집? 집이라고.”

 

  “그래. 우리 부모님한테 가면 뭐가 수가 있겠지. 출산경험이랑 지식이 없는데서 멍하니 애 나올 때 까지 기다려봤자 위험할 뿐이야. 그럴 바엔 경험이 있는 분들한테 맡기는 게 좋잖아. 당장 이동할 준비하자.”

 

  “야 임마! 그래도!”

 

  “알아 새끼야. 밖에 비도 오고 겨우 괴물 피해서 왔는데 괴물 만나면 어떡하나 그 생각 중이지? 거기다 언제 애가 태어날지도 모르는 판국에. 걱정 마. 내가 죽어도 얘네들 우리 집까지 안전하게 에스코트할 테니까.”

 

  “무모해 새꺄. 다른 방법을..”

 

  두호가 화를 내며 말했지만 깔끔하게 무시한 설전은 영혜에게 다가가 말했다.

 

  “영혜는 혹시 모르니 여기를 좀 지키고 있어. 알았지.”

 

  “알고 있어요, 오빠. 비가 많이 오니 무리하지 마세요.”

 

  “그래. 총성이 울리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자리를 지켜. 위험하면 알아서 여기로 올라 올 테니까.”

 

  말을 마친 설전이 두호의 뒷목을 잡아채더니 그를 거칠게 끌며 병실을 나섰다. 갑자기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진 사내를 보며 영우가 영혜를 향해 물었다.

 

  “누나..? 방금 저 사람 누구야..?”

 

  영혜는 방긋 웃더니 영우를 향해 말했다.

 

  “응. 내 은인이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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