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호는 한참을 걸었다. 자신의 모든 표현을 바닥에다가 하듯이, 걸음이 느려졌다가 빨라졌다가 그렇게 종잡을 수 없이 걸었다. 은호도 숨이 차는지 호흡이 커졌다. 그제서야 은호는 자신이 걷는 길을 한 번 둘러보았다. 나는 은호의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은호의 모든 감정이 잠잠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갑자기 길 위에 섰다. 나는 은호의 앞으로 가서 섰다. 은호는 나를 볼 수 없다. 아니 존재 자체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은호의 얼굴 앞으로 갔다. 그러면 무언가를 더 잘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사실은 정말 필요 없는 기대감이지만.
은호와 마주보았다. 은호는 또 자기만의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마 위에 손을 얹었다. 눈을 감았다. 무언가를 위해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미간에 살짝 주름이 생겼다. 그러나 답을 찾지 못했는지 얼굴 표정이 답답함으로 바뀌었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떴다. 은호가 나를 보았다. 아니 보진 못했지만, 나와 또 눈이 마주쳤다. 아니, 나 혼자 은호의 눈과 마주쳤다. 은호는 갑자기 입을 삐죽거리더니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나는 은호를 궁금해 할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다. 그런데, 이 어린 은호의 모습에서 추측 가능한 감정들이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랬다. 그냥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궁금했다. 은호가 궁금했다.
은호는 집으로 향했다. 더 이상 길에서 방황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은호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현관 입구에 놓인 신발들을 정리했다. 여러 사람이 사는지 신발이 많았다. 은호는 자신의 신발을 그 옆에 가지런히 벗어 놓았다.
나는 흔적도 없는데, 그냥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나도 신발을 벗어야 될 것 같았다. 그냥 웃었다. 그런 내가 웃겼다.
은호는 배가 고픈지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에는 이것저것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은호는 둘러보기만 하고는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냄비에 물을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라면이었다.
‘아프다는 아이가 라면을 먹어도 되나?’
나는 은호가 다른 것을 먹게 하고 싶었지만, 굳이 이런 상황에서 변수를 쓸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그냥 놔두기로 했다.
은호는 한결 나아진 모습이었다. 집이라는 장소의 편안함이 은호에게도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 나도 나의 공간에 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나는 은호를 좀 더 지켜봐야 했다. 은호에게 분명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지만, 은호를 보호해야 하는 게 나의 임무였다. 모든 게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은호가 라면을 먹는 동안 나는 거리를 두고 옆에 서서 기다렸다. 은호네 집을 자주 왔을 것인데, 오늘은 유난히 낯설었다. 은호네 집은 있을 것 빼고 하나도 없는 느낌이라고 할까. 큰 물건들 몇 개 빼고는 온 집안이 비어 있었다. 현관 입구에 신발이 많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썰렁했다.
적막한 공간에서 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은호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정민아, 아직 학교 아니야?”
“학교지. 너 병원 갔다 왔지?”
은호는 살짝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지, 이제 괜찮데. 오늘만 쉬면 내일은 학교 갈 수 있어.”
은호는 거짓말을 정말 어색하게 하고 있었다.
“은호야, 내가 있잖아. 엄마한테 너 아프다고 말했거든. 그랬더니 엄마가...”
“안 그래도 아까 전화 왔었어. 괜찮아.”
“너 싫어할 것 같지만...그런데, 아니야... 그냥 그랬다구.”
은호는 듣고만 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별일 아닌 듯 정민이에게 말했다.
“정민아, 주영이 이모가 왜 엄마한테 전화했는지 알아. 그러니까 나 괜찮아. 신경 쓰지마. 알았지?”
“은호야, 그럼 내일 봐. 밥 잘 챙겨 먹고.”
“응. 주영이 이모가 해 준 반찬 많아. 걱정마. 내일 학교에서 보자.”
은호는 정민이의 전화를 끊고는 다시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집안의 커튼을 다 치고 소파에 누웠다.
‘이 낮부터 자려고?’
나는 은호의 모습이 살짝 부럽기도 했다. 세상 제일 편한 모습이었다. 지금 이 순간, 이 공간에서 그 어느 것도 은호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은호는 다시 일어나 앉았다. 습관처럼 은호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 살짝 잠을 자려는 것을 참는 것 같기도 하고, 망설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이 웃겼다. 심오한 표정이 재미있었다. 은호는 아마 곧 잠들 것이다. 그냥 그런 확신이 들었다.
은호가 잠이 들었다. 나 혼자였다. 이상하고 신기한 느낌이었다. 나의 공간이 아닌데, 은호가 있어서인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살짝 불편하고 불안했지만,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익숙했다.
나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은호의 집에서 나왔다. 내가 아무 방해가 되지 않을 걸 알면서, 은호가 자고 있다는 사실에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은호에게 오늘은 그렇게 아무 일 없이 지나갈 것이었다. 그것은 확실했다.
나는 이곳의 거리를 걸었다. 아까 은호를 따라 걸을 때는 몰랐던 모습들이 보였다. 하늘은 어두운 빛을 머금은 파란색과 서서히 시작되는 어둠이 경계를 지우고 있었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공기는 손만 대면 깨질 듯이 팽팽해 보였다. 티끌하나 없이 어둑해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하고 뚜렷해 보이는 건물의 불빛들이 다른 세계로 보이게 했다.
‘겨울이라는 게 어떤 느낌일까?’
나는 손을 뻗어 보았다. 분명 이 곳의 공기가 손 위에 있는데 느낌은 없었다. 나는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게 확실했다. 섭섭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늘 감탄하는 나의 공간이 있으니까, 정말 섭섭하지 않았다. 그냥 살짝 아쉽다고나 할까. 그냥 궁금했다. 나는 오늘 내가 이렇게나 궁금한 게 많다는 것에 놀라웠다. 이 세계가 나를 점점 물들이는 게 확실했다. 얼른 여기를 벗어나 나의 공간으로 가야했다. 문이 보였다. 반가웠다. 나는 힘껏 그 문을 열었다. 따뜻한 공기가 얼굴에 와 닿았다.
‘드디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