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7  8  9  10  >  >>
 1  2  3  4  5  6  7  8  9  10  >  >>
 
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저는 어느 로판에 빙의한 거죠?
작가 : 김김쓰
작품등록일 : 2022.1.16

이름부터 완벽한 평범의 길을 걷던 김지혜, 빙의조차 평범한 백작영애에게 했다?
특징조차 없는 주근깨투성이 이 영애는 도대체 누군데요?
남들은 빙의하면 악녀도 되고, 부자도 되고, 성녀도 된다는데 나는 여기서도 흔한 사람 1 역할을 맡고 있다.

빙의한 책을 찾기를 포기하고 돈 많은 난봉꾼의 삶을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그제야 풀리는 빙의의 실마리들.
난봉꾼은커녕 세상이 망하는 걸 막기 위해 철벽 미남 2명을 모두 꼬셔야 한다?!

썸의 여신, 베스의 훌륭한 조언은 어려워서 성질대로 했더니.

"사업에 관련된 계약만 해야하나요?
제 영혼이나 당신의 지능과 같은 것과는 계약을 맺을 생각이 없나요?"

나사가 풀린 마법사와,

"다, 다음에 한 번 가가같,이 한 번 가보는게 어떨지 네 생각이 궁금하다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 있는 편이었어."

생각보다 더 쑥맥인 검사가 다가오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구해야하는 빙의녀의 삶을 제대로 살아보기로 했다.

"거사 좀 치뤄보자 우리?
응? 100년을 기다렸잖아?"

빌런이 100년간 계획한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엘리온의 이야기.


#동생바보 #딸바보 #평범 #빙의 #멸망 #먼치킨 #흔녀의_2회차_삶 #힐링

 
1
작성일 : 22-01-16 12:28     조회 : 244     추천 : 0     분량 : 10932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내 이름은 엘리온 챔버. 낭랑 18세. 줄여서 엘리. 챔버 백작가의 1남 1녀중 장녀이다.

 한국에서는 지혜였다. 김지혜. 한국의 존 스미스 같은 흔하디 흔한 이름.

 남들은 빙의하면 악녀도 되고, 부자도 되고, 성녀도 된다는데 나는 여기서도 흔한 사람 1 역할을 맡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귀족 중에 흔한 사람이라는 것 정도?

 

 13세에 빙의 후 한 1년 정도는 그 의미를 찾기 위해 온갖 단서를 찾아다녔다.

 내가 읽었던 로판들을 써내려 가봤고 주위 사람들 이름을 적어두고 명상도 해보았으며, 괜시리 최면술사도 찾아가서 기억을 더듬어 보기도 했다.

 결론은 낫띵.

 이 세계는 특이점이 없었다.

 

 척박한 북방의 섹시하고 느른한 대공이 있는지 찾아보았으나, 북방의 공작은 어린 자식이 5명인 다복한 아저씨였다.

 내가 사는 자드밀 왕국은 워낙 따뜻한 기후라 북방도 풍요로웠다.

 탈락.

 

 냉미남 재질의 마탑주는 있는지 알아보았으나 마법의 쇠락으로 마탑은 요양병원이라고 했다.

 탈락.

 

 후계자 구도에서 치열한 암투가 있지는 않을까 했으나,

 왕의 자녀는 아들 하나 딸 둘. 모두 아직 10살도 되지 않았으며 왕은 건재했다.

 왕자와의 로맨스도 탈락.

 

 1년쯤 흔적을 파다가 아마도 내가 너무 많은 로판을 읽은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게 아니면 다른 차원의 후생을 살고 있는 것일수도.

 반쯤은 포기하며 일단 살아보기로 했다.

 실은 그것 말고는 할 수 없는 일이 달리 없기도 했다.

 

 그닥 상관은 없었다.

 원래 한국에서도 나름 행복했지만, 아쉬울 것도 없었으니까.

 적당히 힘들었고 적당히 좋은 삶이었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은 적당한 공기업에 들어가서 이제 젊음을 불살라 보려는데 이 곳으로 떨어진 것?

 그 정도였다.

 한국에서도 중도의 길을 걷는 완벽한 평범녀였는데, 여기서도 그 삶을 또 살아내려고 하니 지루하긴 했다.

 

 

 엘리의 방에서 처음 눈을 뜬 날, 꿈이라고 생각했다.

 발간 빛이 도는 갈색머리에 약간의 주근깨가 있는 작은 얼굴, 머리카락보다 옅게 빛나는 브라운 눈동자까지.

 이건 누굴까 한참을 보다가 하녀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와서 시중을 들어주길래 가만히 있었다.

 방에서 이것저것 뒤적여 보다가 그냥 꿈에서 깨기 위해 잠을 다시 잤다.

 깨고 그 다음 날이 지나도 나는 그 갈색의 소녀였고,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기억은 내 안에 남아있었지만 남의 인생을 훔쳐보는 느낌일 뿐, 나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신께 기도도 해 보았고, 주위 사람들을 떠보기도 했고, 책도 읽어봤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으며, 다들 날 이상하게 쳐다보기 시작했고, 책은 책일 뿐이었다.

 

 내 기억 속의 그녀는 조용했고, 책임감 있었으며, 적당히 머리가 좋은 평범한 백작 영애였다.

 나중에 결혼해서 남편의 가정을 꾸릴 수업을 받았으며, 큰 야망도 없고 가진 것에 감사했다.

 엄마 아빠의 잔소리에 가끔 화도 내고, 동생인 카엘과 부모님 흉도 보는 정말 평범 그 자체인 영애였다.

 아마 나도 그렇게 쭉 적응하고 살아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에서의 억울함만 아니었다면.

 

 한국에서 누군가 나에게 다음 생에 뭐로 태어나고 싶냐고 물었을때마다 조선시대 남자라고 답했던 나였다.

 그런데 귀족 시대의 영애라니... 최악의 빙의였다.

 여중 여고 여대를 보낸 부모님에게서 벗어나, 내가 번 돈으로 화끈한 젊음을 보내리라 마음먹으며 얼마나 설렜던가!

 

 차라리 기억을 잃었으면 모를까.. 한국의 90년대 생, 김지혜로 태어난 나에게 로판 속 영애는 너무나 가혹한 빙의였다.

 

 나의 빙의는 혹시 특별하지 않을까 열심히 연구해보았지만, 역시나. 전혀.

 그렇다면 혹시나 엄청나게 멋진 남편감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봤지만, 또 역시나. 전혀.

 나의 정혼자는 이미 어릴 때 부모님의 약속으로 정해져 있었다.

 친구처럼 자라온 루터 프란츠. 프란츠 백작가의 영식.

 꽤나 똘망하게 생긴 눈빛을 가지고 초딩같은 유치함을 아직 벗어나지 못한 동갑내기 친구.

 흙묻히며 함께 정원을 파헤치던 사이였기에 좋지도 싫지도 않았지만, 가끔 나를 빡치게 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나는 유치한 말장난을 제일 싫어했다.

 '그래서? 그래서? 에붸붸붸' 같은 말장난을 하는 순간 내 주먹은 무조건 반사처럼 나가는 편이었다.

 불행히도 루터는 그 쪽에 자질이 뛰어난 친구였다.

 

 5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한국의 고등학교 남학생이나 다름 없었다.

 정확히는 몸만 자란 초등학생이었지만.

 그리고 같이 산책을 하던 그는 울타리 위에서 '엘리뿡 엘리뿡뿡'을 시전하다가

 그대로 내게 명치를 맞았고 떨어져서 모래로 배를 채우는 사건이 일어났다.

 루터가 말랐긴 했지만 그 정도로 나가떨어질 줄은 몰랐기에 당황했고, 우리는 화해했지만 문제는 커졌다.

 삼대독자인 루터가 내게 맞아서 모래를 먹었다는 소문은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고, 우린 그 발없는 말을 막을수가 없었다.

 당장 정혼을 파기하라며 길길이 날뛰는 루터 할아버지 소식이 곧 들려왔고, 나름 잘 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얼빠였고, 백옥같이 하얀 피부를 매우 중시했다.

 내 스타일의 지적미를 풍기는 안경의 냉미남을 위해 내 마음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단 말이다.

 

 그런 내가 보기에 루터는 유치한 맹돌이었다.

 사람 인상을 잘 보는 내가 보기에도 눈빛은 살아있었으나, 가장 빛날 때는 역시 날 놀릴 때였다.

 연애 감정이 도저히 생길 것 같지 않다는 말로는 부모님을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알아서 파혼이라니, 내심 기뻤다.

 물론 엄마가 내 손을 이끌고 사과를 하러 가기 전까지.

 

 꼬장꼬장한 프란츠 백작가 사람들 앞에서 영애답지 못한 나의 행실을 사과했고, 돌아오는 길에 '여자애가~'로 시작하는 온갖 잔소리를 들을 때 나는 결심했다.

 파혼과 독립을.

 한국에서도 들었던 온갖 잔소리들이 더해져 나의 역린을 건드린 느낌이었다.

 

 ESFJ였던 나는 엘리가 되어서도 계획적이었다.

 무엇을 해야할까.

 역시 돈이 필요했다.

 돈 없이는 아무것도 안되는 건 어디서든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둘째 줄에는 연.애 네 글자가 적혔다.

 실은 뭐 팜프파탈, 마성의 그녀, 후리기 한 판승의 대가, 이런 것들을 적고 싶었지만,

 들켰다가는 혈압에 의한 부모상을 먼저 치를 수 있으므로 조용히 삼켰다.

 

 그리고 어떤 사회에서든 미친 놈들은 많기 때문에 내 한 몸을 지킬수 있는 호신술은 필요했다.

 다행히 챔버가는 꽤나 잘나가는 귀족가였고, 뭐든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 기사단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 날 밤.

 내 꿈에는 빛나는 슬라임 같은 구체가 등장했다.

 

 "야! 너 진짜 뭐하는 거야?"

 "이건 또 뭐야?"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위대한 창조주이지."

 "아하. 아니 잠깐. 아하가 아니지? 5년이나 지나서????

 이봐, 나는 어떻게 된 거야?"

 "하.. 너 아예 기억이 안나?

 니가 기도했잖아.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시작으로 멋지게 살아보고 싶다고.

 그래서 새로운 곳에 넣어줬더니 그냥 또 김지혜처럼 살고 있네."

 

 ... 분명 그런 일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기도는 언젠간 세계일주를 하고 싶습니다, 정도의 무게 아닌가?

 

 "??? 또라이세요? 그거 듣고 여기다 나를 던져버려???"

 "어? 나 원래 진짜 기도 안들어주는데 너는 꽤 진심 같았는데??"

 

 꽤 진심이었겠지. 사내 썸남이랑 하룻밤을 보내자마자 갑자기 그가 날 뻥찼으니까.

 평생 나를 따라다닐 꼬리표 생각에 이 좋은 직장을 옮겨야하나 싶어 깡소주를 불었으니까.

 그 때는 꽤나 절박했겠지.

 

 "아니... 이보세요... 그렇다고 이렇게 극단적으로 기도를 들어주면 어떡해?!

 적당히 이직을 하거나, 이민을 가거나, 그 놈을 죽여줄 수도 있잖아?!"

 "어? 어..

 네가 굉장히 새롭고 싶어하는거 같았는데?!!!??"

 "그럼 단순히 그 이유로 내가 여기 온거야?"

 "....응......

 뭐 일단은."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이성을 잃었다.

 실체는 없었지만 나는 내 분이 풀릴 때까지 쫓아다니며 주먹을 휘둘렀다.

 지쳐서 헉헉대며 쓰려지고 나니, 의미없는 내 빙의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분명 이유가 있을거라고, 아직 못 찾은 걸거라고, 마음 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나의 희망이 무너졌다.

 5년간 내 삶의 이유를 찾아다녔던 스스로에게 미안함이 치솟았다.

 그냥 썸남이 똑같이 당해서 술마시며 울다가 내 생각이 나서 반성하게 해달라고 빌 걸.

 

 "야.. 고만 울어..

 기도를 들어준 내게 잘못은 없지만 심히 유감스럽다."

 

 저 양아치가 진정 신이란 말인가.

 

 "돌아갈 방법은?"

 "없지.. 원래 엘리가 급사하면서, 그 자리에 네가 들어간 거거든."

 "하.. 급사...????????"

 "걱정마.

 아무도 몰라.

 그리고 엘리도 다른 세계의 영혼을 원했어."

 "엘리가 왜?"

 "글쎄.

 난 잘 모르겠어."

 

 모를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신의 어투에서 알려줄 의지가 없었다.

 

 "그럼 ... 지혜는?"

 "지혜는... 깊이 알지마.

 어떻게 되었든 너만 괴로울거야."

 

 맞다.

 돌아갈 수 없다면 모르는 것이 나을수도 있다.

 이미 5년이 지나 이 곳도, 저 곳도 내 고향이었다.

 

 "하... 5년만에 나타나서 한다는 소리가.

 하... 참.

 그래. 그럼 보상은?"

 

 때릴 수 없다면 얻어내야지.

 

 "뭐라는 거야?"

 "당신의 과도한 친절로 제 영혼이 혼란과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게 안 보이냐는 말이야."

 "......"

 

 신에게 표정은 없었지만 나는 지금 경악한 표정을 본 것 같았다.

 

 "소원 들어줘."

 "뭔데?

 들어나보게."

 "내 소원은 내가 불러낼 때마다 나타나서 내 소원을 들어주는 거야."

 "......"

 

 그래.

 이제는 신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게 틀림없었다.

 원래도 나는 맨정신으로 개소리를 잘했기 때문에 큰 타격은 없었다.

 

 "그건 힘들고, 딱 3번.

 내가 내킬 때 네게 올게.

 소원은 안 들어줘도 내 마음이야."

 "그냥 찾아온다고?

 그게 다야?"

 "응. 난 기분파니까.

 소원을 들어줄 수도 있고, 수다스러워질 수도 있지."

 

 또 나의 주먹이 울기 시작했지만, 후들거리는 다리가 주먹을 진정시켰다.

 

 "그래. 자주 찾아와.

 담번엔 실체 가지고 와.

 때리면 타격감 있게."

 "아, 무섭네 정말!!

 신을 왜 패겠다는 거야!"

 "너 같으면 안 패겠냐?!

 여튼 자주 와.

 지혜를 아는 건 너와 나 뿐이니까."

 

 마지막 말에 왜 내 뒷 맛도 씁쓸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구체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휙 하고 사라져버렸고 나는 잠에서 깼다.

 

 2일 뒤, 예정대로 루터가 방문을 했다.

 그 사단을 일으키고 루터도 할아버지한테 혼났다고 들었다.

 여자애한테 맞고 다닌다고.

 하지만 특유의 맹한 얼굴과 반짝이는 눈으로 활짝 웃으며 운동이 너무 힘들다고 할 때 나도 웃어버렸다.

 애정이 피어날 순 없어도 우정이 피어날 수는 있을 것 같았고, 이 사회가 밉다고 루터까지 미워할 수 없었다.

 

 "루터, 나 할 말이 있어."

 "저번 일 때문에 그래?

 너무 걱정마."

 

 굴욕은 당한건 난데 왜 나보고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는지, 그의 꽃밭 같은 머릿 속이 궁금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나는 너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하지만 부부가 되고 싶지는 않아."

 "무슨 소리야?

 너 또 소설 봤어, 엘리?"

 "그런거 아니야!!!!

 이것 봐, 이렇게 낭만이 없는데 부부가 된다니!

 내가 너무 힘들거라구!!"

 "진심이야?

 너 어쩌려고 그래?

 부모님이 아시면 난리나."

 "응. 난리나겠지.

 넌 나를 사랑해?"

 "우웩!

 휴, 간만에 위액 볼 뻔 했다.

 너 왜이래.

 사춘기야?"

 

 당연하지, 이 놈아.

 우리는 18세 사춘기가 맞거든?!

 확신했다.

 이놈은 아직 초딩이다.

 

 "응. 그런 것 같아.

 난 공부도 더 하고 싶고, 멋진 연애도 하고 싶어.

 너 말고!"

 "...... 엘리...... 왜그래.

 화가 많이 난거야?"

 "아니 진심이야.

 넌 하고 싶은거 없어?"

 "응...... 난 그냥......

 백작위 이어받아서 너랑 결혼해서 애 많이 낳고 살고 싶었는데."

 

 내 단호한 눈빛이 드디어 전달이 됐는지 루터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때문에 그래?

 할아버진 원래 그러셔.

 좀만 참아.

 너 하고 싶은거 있으면 결혼해서 다 해.

 내가 백작되면 다 하게 해줄게."

 "난 연애하고 싶은데?"

 "그게 무슨 소리야?"

 "찐한 연애 하고 싶다고. 너 말고."

 "엘리...... 너 진짜......

 우리가 친구기도 하지만 정혼자 사이기도 해.

 너무하다."

 

 루터의 상처받은 얼굴에 잠시 움찔했지만, 소녀가 검을 빼면 무라도 베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루터, 미안해.

 하지만 부모님께 말씀드리기 전에 잘 생각해봤으면 좋겠어.

 내 결심이 흔들리진 않겠지만, 너와 뜻을 함께하면 설득하기 더 쉬울 것 같아."

 

 루터는 말없이 돌아서서 집으로 가버렸다.

 아직은 채 다 자라지 않은 그의 작은 어깨가 처져있어서 미안했다.

 

 '저 놈은...... 차라리 화를 내지.'

 

 그럼에도 나는 내 주장을 굽힐 수 없었다.

 가끔은 내 행복을 위해 무고한 희생자가 생기기도 하는 법이었으니까.

 

 

 나는 곧바로 기사단을 방문했다.

 어릴 때 기사단의 기쁨을 담당했던 이후로 영 교류가 없던 챔버가 장녀의 방문은 기사단에게 작은 놀라움이 되었다.

 

 "아가씨, 안녕하십니까."

 "기사단 군기가 여전히 훌륭하네, 단장.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내가 간단한 체술을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해?"

 "체술이요??

 백작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까?"

 "그럼 오지도 않았지.

 아주 간단하면 돼.

 급한 일이 생기면 도망칠 수 있을 정도."

 "......아가씨, 저희가 부족하지만 그런 일이 절대 생기지 않도록 호위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사단장의 얼굴에 식은땀이 돋고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의 주인이 너그러운 편이라고 해도 몰래 딸에게 체술을 가르치는 걸 들키는 날에는 실업자가 될 것이다.

 

 "음.. 옛정을 생각해도 안 될까? 어릴 땐 귀여워해 줬잖아."

 "그 옛정으로 열심히 지켜드리겠습니다.

 외출하실 때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아니면 위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 아니야. 됐어.

 기사단의 아침 훈련은 언제지?"

 "아침 6시입니다.

 저기 아가씨... 어쩌시려고..."

 "아냐, 별 일 아니야.

 볼 일 봐."

 

 싱긋 웃어주는 내 표정에서 무엇을 읽은 것인지 기사단장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릴 때 조용히 사고를 치고 다니던 엘리를 지켜주던 건 홈크였다.

 발음이 잘 되지 않던 시절부터 그를 아저씨라고 불렀기에, 내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금방 알 터였다.

 

 다음 날 새벽 5시 반, 아직 몇몇 막내 하인들만 일어나 하루를 준비하기 시작할 때 나는 전날 부탁해 싸둔 바구니를 들고 연무장을 찾았다.

 전담 하녀 안나가 도대체 어디에 쓰시려는거냐고 여러번 물었지만 한창 클 때라 자면서 먹으려고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얻어낸 소중한 바구니였다.

 지혜의 기억때문에 최대한 가볍고 편하게 입고 가고 싶었지만, 몇 년동안 감춰져 살아오다 보니 실루엣을 드러내는게 약간은 어색하기도 했다.

 

 '일단 치마만 아니면 되겠지.'

 

 최대한 가볍게 입고 연무장에서 나는 몸을 풀기 시작했다.

 나름 김지혜는 학교에서 단거리 2등 정도는 하는 육상부 출신 스프린터였다.

 하지만 도구의 저주를 받은지라 공이나 기타 도구를 쓰는 운동엔 젬병이었고, 그래서 체술을 선택했다.

 검을 들었다가는 피아 구분 없이 벨 것 같았다.

 

 간만에 뛰는 아침의 공기는 상쾌했고 엘리의 몸은 생각보다 가볍고 날렵했다.

 땀이 나기 시작할 쯤 기사단은 집합했고, 나 때문에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아가씨, 정말 왜 이러십니까!"

 

 홈크 아저씨는 인사도 잊고 울 것같은 얼굴로 내게 매달렸다.

 

 "단장 걱정마.

 챔버가를 지켜주는 훌륭한 기사단을 응원하기 위해 아침 간식을 싸온 것 뿐이라니까?

 모두 저를 신경쓰지 마시고 훈련하세요.

 난 건강 유지를 위해 옆에서 몸을 풀도록 하겠습니다."

 

 바구니에서 간단한 바나나와 우유를 꺼내놓고 연무장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고 결연한 포즈로 서자 단장도 포기했다.

 처음에는 나를 쳐다보며 훈련하느라 사시가 될 것 같던 단장도 2주쯤 지나고, 백작의 기상 시간 전에는 돌아가는 나를 보며 약간 안심이 된 것 같았다.

 

 "오늘은 검술 대신 체술 훈련을 하겠다.

 다들 검 놓고 와."

 

 이렇게 나에게 선물같은 시간도 생겼고, 훈련은 점점 즐거워졌다.

 지혜로 살아본 나로써는 엘리의 신체 능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코어 근육이 좋다고 생각은 했지만 귀족 영애로써 잡는 자세들로 인한 것이라 생각했지 원래 능력치가 이렇게 좋을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근육통도 별로 없었고, 근육의 유연성과 힘이 좋았다.

 날렵했고, 순발력이 뛰어났으며, 움직임에 센스도 있었다.

 훈련을 거듭할수록 지혜와 엘리의 공통점을 찾아낸 것 같아서 기뻤다.

 운동하며 비워진 머리는, 날 긍정적이고 단순하게 만들어줬다.

 한국의 지혜도 태어난 의미를 모르면서 잘 살아냈듯, 여기의 엘리온도 빙의한 김에 잘 살아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매일 조금씩 늘어가는 삼두와 복근을 보며 움직임의 기쁨을 알아가던 때, 내 절친인 베스 마일러가 찾아왔다.

 

 "엘리! 요새 뭐하길래 연락이 없어?"

 

 비상하는 왕국의 꽃이라는 명성답게 갈수록 눈웃음이 만개하는 베스가 날 흘겨보았다.

 

 "베스~ 더 예뻐졌네?

 난 요새 바빴지."

 "이 기집애, 다이어트 한거야??

 왜이렇게 이뻐졌어~ 살도 빠지고!"

 "아이고 이쁜 애들이 더한다더니~

 그나저나, 자 이제 썰을 풀어봐도 좋을거 같은데요, 후작 영애?"

 "어? 뭐 들었어?"

 

 흔들리는 그녀의 눈을 보니 혹시나가 역시나다.

 사교계에서 청순하고, 친절하며, 현명하고 얌전하다는 평을 듣는 그녀의 실상은 정반대였다.

 똑똑하고 예쁜 것은 사실이었고, 그 모든 능력과 평판을 이용하는 능력이 탁월했으나, 알고보면 훨씬 재미있는 영애였다.

 무엇보다도 화려한 연애를 꿈꾸는 나에게는 그녀의 남자를 후리는(?) 타고난 능력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그녀의 연애사는 나에게 어떠한 소설보다 흥미로웠으니까.

 

 "아, 저번에 만났던 그 영식 기억나?

 그... 빨간 커프스... 빨커라고 부르자.

 아니 그 빨커가 나한테 편지가 온거야.

 얼굴만 보고 그냥 그런 영식일줄 알았는데 한 마디만 써서 보낸거 있지?

 어머 그거 보는 순간 매력이 터져버렸잖아."

 "어머어머, 뭐라고?"

 "그 때 그 손수건 받아가, 라고만 딱 온거야~"

 "뭐야뭐야 박력뭐야~~

 빨커 그렇게 안봤는데!

 그래서?

 베스, 너는 뭐라고 답했어?"

 "얘, 튕겨줘야하지 않겠니???

 에단? 했지~"

 "미쳤다미쳤다~~~"

 

 그녀는 다양한 남자와 다양한 썸을 탔고, 나의 시야를 넓혀주기에 충분했다.

 그녀 또한 꽉 막힌 사교계에서 이런 이야기를 편견없이 들어주고 재밌어하는 나와의 시간을 매우 즐겼다.

 누구나 그렇듯 배 속이 간질거리는 썸의 느낌은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지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녀와의 친분 또한 우연이었다.

 빙의 후 억지로 나간 다과회에서 누구에게나 호의부터 얻는 그녀와 나는 첫 눈에 서로를 싫어했다.

 내 눈에는 누구에게나 친절히 웃는 그녀의 눈웃음은 속마음을 가리기 위한 방패막이로 보였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녀는 모두와 즐겁게 대화하고, 깔깔대며 웃는 내가 시끄럽고 깝치는 걸로 보였다고 했었다.

 남자들과 잘 엮이는 베스는 영애들에게 오해를 쉽게 사는 일이 종종 있었기에, 절대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가진 서로를 동경하면서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반년 쯤, 어느 파티에서 우리는 영식들을 자세히 관찰하다가 영식이 아닌 둘이 서로 통하는 순간을 가지게 됐다.

 일단 서로만큼 이성에게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는 영애들도 없었다.

 그리고 연애에 마음을 활짝 열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서로의 취향이 정확하게 반대였다.

 서로 절대 남자를 두고 싸울 일이 없겠다는 걸 깨달은 이후 우리는 다시 없을 친구가 되었다.

 

 차세대 사교계의 꽃으로 불리는 그녀의 절친이 되면서 나도 '베스의 친구'로써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녀 곁의 색다른 매력의 영애, 로 관심을 받았으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베스에게 가는 길목 정도로 여기고 다가오는 영식들을 쳐내는 스킬과 안목만 높아지는 날들이었다.

 

 이제 독립과 파혼(을 통한 핫 연애)이 목표가 된 나에게는 선결 과제가 남아있었기에 베스에게 소홀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와 즐거운 수다 타임을 마치고 나는 밤늦게까지 돈을 벌기 위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다음 날 호랑이 가죽과 고기를 취하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한다는 선조의 옛말을 기억하며, 외출을 감행했다.

 

 

 시장조사를 마친 후 나의 소감은 '난감'이었다.

 

 이 세계는 아직 근대까지도 못 온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기술을 마법으로 채우는 형식이었다.

 마법도 쇠락하는 마당에, 가내수공업과 자영업이 대부분의 상업을 형성하는 사회에서 기술도 없고, 알바라곤 과외만 해보고, 공부밖에 안 해본 내가 도대체 무엇으로 돈을 벌 수 있을지 감도 안 잡혔기 때문이다.

 

 방법과 기회, 운 세 가지가 필요하다는 판단은 옳은것 같았지만 쓸모없었다.

 나는 셋 다 없었으니까.

 나쁘지 않은 뇌라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천재도 아니고 귀족 영애로써 내 행동 반경엔 제약이 많았으니 말이다.

 

 '......행동 반경?'

 

 그래, 내겐 기회가 찾아왔을 때 잡을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의 여유가 필요했다.

 지금처럼 생활 방식으로는 제약이 너무 많았다.

 

 "베스, 너는 앞으로 뭘 할 예정이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집에서 교육받고 지내다가 연애하고 결혼할 거야?"

 "음... 응... 난 안주인 역할을 잘 해낼 자신이 있는데?"

 

 역시... 사회에 순응하는 베스여... 최고의 신붓감 답다.

 

 "그렇지. 넌 물론 잘 할거야.

 그런데 베스, 아직 상대도 없잖아.

 데뷔탕트까지 나랑 어차피 더 놀 생각이었지?"

 "응? 그렇지?

 지금도 가정 교육 말고는 딱히 특별한걸 하진 않는데?"

 "베스, 나랑 아카데미 가자!"

 "갑자기?"

 "응! 가면 지금 우리 또래 말고도 더 의젓한 영식들도 많잖아.

 가면 기사 수업 받는 영식들 많은거 알지?

 잘 생각해봐.

 아카데미는 무조건 남학생의 비율이 높아.

 캠퍼스 봄날의 설레는 산책과 오가는 눈빛..."

 

 그녀의 눈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역시 그녀는 물 수 밖에 없는 미끼였다.

 키크고 어깨 넓고 몸 좋고 리더십 좋은 남자를 좋아하는 그녀의 눈에 또래 영식의 구애는 초파리의 날개짓과 같았으며, 가끔 기골을 타고난 영식들이 나타났으나, 하늘이 주신 그녀의 밀당 스킬에 장단을 맞춰 줄 수 없었다.

 베스에게 연상의 기사가 가득한 아카데미는 고양이 앞의 노량진 수산시장이었다.

 솔직한 베스의 동공에 성공을 확신하며, 우리의 절친 우정이 연장되어서 기뻤다.

 

 꽤나 사교성이 있는 성격이었지만, 아무도 모르는 내적 낯가림과 수줍음이 있던 나는 혼자 아카데미에 진학하는 위험부담을 안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바로 옆에 살지 않는 이상 결혼 후에는 이렇게 함께 할 시간이 많지 않을 것 같다는 아쉬움도 있었다.

 사교계에서 평판이 좋은 그녀와 함께 진학한다고 하면 부모님이 훨씬 안심하실 것 같다는 계산은 가장 마지막이었다는 걸 베스가 꼭 믿어줬으면 좋겠지만 말이다.

 

 베스는 어차피 처음부터 파혼과 독립에 대한 나의 계획을 로맨스 소설에 영향받은 일탈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두 번 사는 인생, 한 번은 도박을 해보자!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37 37 2022 / 2 / 15 194 0 7167   
36 36- 수정 2022 / 2 / 10 191 0 5255   
35 35 2022 / 2 / 10 188 0 7170   
34 34 2022 / 2 / 7 188 0 6601   
33 33 2022 / 2 / 5 183 0 5597   
32 32 2022 / 2 / 5 181 0 4926   
31 31 2022 / 2 / 4 181 0 4860   
30 30 2022 / 2 / 4 189 0 8214   
29 29 2022 / 1 / 31 192 0 5062   
28 28 2022 / 1 / 31 194 0 7371   
27 27 2022 / 1 / 31 198 0 7670   
26 26 2022 / 1 / 31 203 0 7272   
25 25 2022 / 1 / 31 187 0 6785   
24 24 2022 / 1 / 29 180 0 5406   
23 23 2022 / 1 / 29 189 0 8266   
22 22 2022 / 1 / 29 193 0 4732   
21 21 2022 / 1 / 28 187 0 7936   
20 20 2022 / 1 / 28 192 0 5245   
19 19 2022 / 1 / 27 195 0 4945   
18 18 2022 / 1 / 27 198 0 3998   
17 17 2022 / 1 / 27 195 0 5280   
16 16 2022 / 1 / 25 198 0 8107   
15 15 2022 / 1 / 25 181 0 4951   
14 14 2022 / 1 / 25 181 0 7543   
13 13 2022 / 1 / 21 184 0 7073   
12 12 2022 / 1 / 21 195 0 7049   
11 11 2022 / 1 / 21 186 0 7490   
10 10 2022 / 1 / 20 200 0 5507   
9 9 2022 / 1 / 19 211 0 8693   
8 8 2022 / 1 / 19 206 0 8630   
 1  2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