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동굴로 돌아온 공윤은 소접의 머리를 타고 기어오른 다음(그는 몹시 투덜거렸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게 누가 멋대로 이런 일을 벌이래?) 떨어진 곳과 다른 통로로 돌아갔다.
소접이 알려준 대로 한참을 걸어가니 문이 나왔다. 문을 열자마자 계피 냄새가 훅 풍겼다.
키론에게서 나던 냄새였다. 갑자기 무릎이 휘청거릴 정도로 안도감이 들었다.
그녀는 비틀비틀 걸어가서 뭔가에 기댔다.
알고 보니 그건 거대한 나무였다. 꼭대기가 천장에 닿을 정도로 커다란 버드나무.
단지 이파리가 녹색이 아니라 보라색이라는 것과 엄청나게 커다랗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신비한 보랏빛 이파리가 잔잔하게 흔들렸다. 내가 모르는 사이 라벤더 교배종이라도 만들었나?
공윤은 그 색에 홀릴 듯 다가갔다.
몽롱해지려던 공윤의 정신을 깨운 건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키론의 목소리였다. 분노에 찬 그의 목소리는 말 그대로 저택을 뒤흔들었다.
평소의 은은함이 사라진 목소리는 마치 파괴적인 악장을 연주하는 음악 같았다.
비장한 오케스트라가 내부의 파장을 뒤틀었다.
단지 착각이 아니라, 실제로 벽에 금이 가고 있었다.
세상에, 저게 무슨.
공윤은 소리 없이 입을 벌렸다.
“릴리,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를 수가 있지? 그녀를 어디에 처박아두고 온 거야? 그녀는 아무것도 몰라! 내게 상의도 없이, 그런......”
뒤이어 키론은 생략할 수밖에 없는 단어를 내뱉었다. 그토록 고상해 보이는 사람이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원색적인 욕설이었다.
한국어는 아니었다. 그런데 공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키론의 발음은 좀 더 날카롭고 복잡했지만, 보다 우아하게 축약하자면 ‘이런 개의 발바닥 같은 놈을 정말이지 신의 항문에 처박아주고 싶다.’ 과 비슷했다.
공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충격을 받았다.
첫째, 키론이 화를 냈다. 둘째, 키론이 욕을 했다. 셋째, 그놈의 이름이 정말 릴리였다.
일단 키론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멀쩡한 몰골로 나타나면 키론이 덜 흥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론의 분노는 위험했다.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공윤은 너무나 지치고 추운 나머지 가냘프게 속삭였다.
“키론?”
키론은 공윤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바닥에 닿기 전에 나타났다. 거의 바람에 실려 왔다고 해도 믿어질 것 같았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등장이었지만, 이제는 현실성을 추구하는 게 별 의미가 없었다.
분노가 채 가시지 않은 키론의 조각상 같은 얼굴에 놀람과 안도가 교차했다. 일그러진 얼굴이었는데도 아름다웠다.
하긴 그는 언제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공윤은 또 기절했다.
알바생 되기 참 힘들다.
***
공윤은 깨어나자마자 계약서를 내놓으라고 종용했다.
"글쎄, 내놓으시라니까요? 대뜸 자기 제자를 해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모른 척이에요?”
망할 늑대자식과 뱀 새끼가 그녀를 시험하겠답시고 멱살을 끌어다 물에 빠뜨려놓는 경험을 또 하고 싶지는 않았다.
공윤은 파충류 두 마리와 포유류 한 마리를 떠올리며 이를 꼭 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악착같이 벌고 개처럼 뜯어주겠다 이거야.
키론의 심사는 복잡해보였지만, 공윤은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였다.
공윤이 성큼 다가서자 키론은 주춤 물러났다.
내가 일진이니? 돈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계약서에 서명만 하겠다니까?
이렇게까지 당했는데 이젠 억울해서라도 그냥은 못 간다!
공윤의 처절한 다짐 앞에 키론은 가련하게 떨었다.
“안 돼요, 진짜...... 공윤 씨는 아직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당신은 좀 더 설명을 들어야 해요.”
“아하, 설명.”
공윤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벽을 쾅 짚었다.
얼떨결에 벽쿵을 당한 키론이 가까워진 거리에 미모사처럼 움츠렸다. 그는 벽의 일부가 되고 싶은 것처럼 뒤로 몸을 바싹 붙였다.
공윤과 닿으면 화상이라도 입을 것 같은 태도였다.
“해보세요, 설명.”
“......”
“뱀 여자를 상대하는 거요? 아니면 그 비슷한 종들을 대하는 거요? 전 방금 사전에 늑대랑 모의한 뱀한테 물려서 물에 빠졌다가 돌아온 사람이에요. 그래도 걔들은 깔끔하게 끝내주던데요. 다른 데서는요, 더 안 좋은 일도 많아요. 더 나쁘고 더 더러운 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요. 그래도 어디다 항의도 못해요. 나만 손해거든요. 시간 잃고 돈 잃고, 그런데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어. 그냥 나 혼자 더러운 기억 안고 끝나는 거예요.”
공윤은 숨을 골랐다.
“그래요, 여기서 일하다 보면 뱀 여자가 날 죽일 수도 있고 서리가 내 피를 모조리 빨아먹을 수도 있겠죠. 그래도 그건 내 마음이 아프지는 않아요. 받아들일 수 있어요.”
저 밖의 어떤 진상들보다는 훨씬 감당하기 쉽겠다고.
공윤은 진지하고 솔직하게 말했다. 이런 건 진심을 섞어 말해야 더 잘 통하는 법이었다.
“나는 지금 굉장히 이성적이고 인간적이고 이기적인 판단을 내리는 거라고요.”
격정적인 침묵이 감돌았다. 키론은 묵묵히 공윤을 내려다봤고, 그녀도 지지 않고 오팔색 눈을 마주 봤다.
키론은 손을 저었다.
종이가 팔락거리며 날아왔다. 예의 항목과 함께 키론의 서명이 있었다.
갈색 자국도 남아있었는데, 그건 공윤이 흘린 치킨조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공윤은 망설임 없이 서명했다.
그녀는 나중에 그걸 반쯤은 후회했고, 반쯤은 후회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 뭘 하면 될까요, 사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