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주희는 정말로 신난 것 같았다. 술자리에서 교수 만난 게 뭐가 좋다고.
주희는 재빨리 잔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닦아냈다. 그녀는 공윤까지 얼렁뚱땅 인사하게 만들었다.
“교수님이 웬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저희랑 합석하실래요?”
공윤은 그 제안에 식겁했다. 그녀는 테이블 아래로 주희를 걷어차려고 했지만 엉뚱한 의자만 차고 신음을 삼켰다.
“약속이 있어서요, 주희 양. 둘이 술 마시고 있었나보지?”
“네, 얘가 알바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휴학까지 했더라고요. 저한테 말도 없이!”
“나도 아쉬워요. 말려봤지만 의사가 확고하더군.”
“그러니까요, 교수님......”
나 빼고 내 근황 토크가 아주 예술이시군. 공윤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술로 진정시켰다. 다행히 교수는 금방 가는 것 같았다.
“그럼 다들 적당히 마시고. 난 이만 가볼게요.”
“벌써 가시게요?”
“약속 시간이 다 돼서. 다음에 봐요. 공윤 양도.”
하디 교수는 눈웃음을 짓더니 가게 밖으로 사라졌다. 주희는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공윤은 분통을 터뜨렸다.
“도대체 뭐야? 넌 또 왜 교수님한테 내 알바 얘기까지 하고 그래?”
주희는 손을 휘휘 저었다.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 설공윤. 그런 얘기 하면서 친해지는 거지.”
“아, 그래? 그럼 네 얘기나 하지 그랬냐.”
주희는 어깨를 으쓱하며 안주를 집어먹었다.
“너 저 교수님 되게 마음에 안 들어 하더라.”
“내가 언제?”
공윤은 일단 발뺌했다.
“그랬잖아.”
“안 그랬어.”
“그랬다니까.”
공윤은 포기했다.
“아는 애가 교수님한테 내 얘기나 하니?”
“그거야, 교수님이 사적으로 흥미 보이는 건......”
주희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못마땅한 듯 완벽하게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비죽이더니 술을 들이켰다.
“아무튼, 잘생겼는데 아깝잖아. 잘 지내봐. 학점을 생각해서라도.”
공윤은 신음하며 술을 더 주문했다. 어느새 잔이 텅 비어있었다.
***
변명을 하자면, 그녀는 갑작스러운 교수의 등장 때문에 발자국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서 초래하게 된 게 이런 결과라면 공윤에게는 일말의 항변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게 현실을 책임져주지는 않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긴 했어도.
저게 뭐야.
공윤은 정글짐을 ‘먹어치우고’ 있는 요상한 코끼리를 보고 정신이 다 어질해졌다. 술도 깰 겸 근처 공원에서 주희와 아이스크림을 해치울 요량이었는데, 이게 뭐냔 말이다.
일단 코끼리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생김새 곳곳이 진짜 코끼리와는 달랐다.
진짜 코끼리보다는 굉장히 작았고, 몸통은 얼룩덜룩한 원색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코끼리가 총총 밟는 곳에 발자국이 남았다.
-쇠를 먹고 꿈을 뱉는 불사의 영수. 지금은 거의 멸종되었지만, 대단한 생물이죠. 어느 면으로든. 특히 식성이나 능력이 가장......
갑자기 키론의 말이 떠올랐다.
쇠를 먹는다.
설마 저게 불가사린지 뭔지 하는 건가?
발자국도 그렇고...... 맞는 것 같은데.
고민하던 공윤은 흐느적거리는 주희를 벤치에 눌러 앉혔다. 취하고 싶은 건 난데 왜 네가 취한 거야.
코끼리는 완전히 식사에 열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신난 듯 엉덩이까지 씰룩였다. 그런데 뭔가 심상치 않았다.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처음에 수박만 했던 코끼리는 이제 서리만 해졌다.
공윤은 문제를 직감하고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나 직후 공윤은 울상을 지었다.
‘번호를 모르잖아! 그 사람 휴대폰이 있긴 한가?’
공윤이 안절부절못하거나 말거나, 코끼리의 사이즈 변화는 충실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씰룩거리는 엉덩이가 실시간으로 커지는 게 육안으로도 확인될 정도였다.
정글짐이 코끼리의 무게에 천천히 휘어졌다. 오오, 갓......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으려는데, 뭔가 부드럽고 까칠한 게 만져졌다. 꺼내보니 금빛의 깃털이었다.
그리핀의 깃털...... 공윤은 그녀가 만지작거리다가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걸 기억해냈다.
불현듯 공윤의 머리에 미친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핀을 부를 수 있을까?
난 못 가지만, 그리핀은 키론에게 갈 수 있을 거야. 걔들은 키론의 저택에 마음대로 갈 수 있다고 했으니까.
저번에도 봤잖아?
공윤의 입가에 광적인 웃음이 떠올랐다가 사그라졌다. 어떻게 부르지? 그녀는 뒤늦게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키론한테 더 잘 배워둘 걸.
그러는 와중에도 코끼리는 충실히 커지고 있었다. 이제 정글짐은 반쯤 기울어져 있었다. 쟤가 저걸 다 먹으면 어떻게 하지?
공윤은 취해서 잠든 주희의 얼굴을 쳐다봤다. 입가에 침이 떨어질락 말락 했다. 일차적 원조를 포기한 공윤은 무작정 깃털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키론이 했던 대로...... 그에게 배웠던 대로.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간절하게 빌었다.
제발, 와라...... 와라...... 와줘.
이리 와......
이마에 식은땀이 밸 정도로 염원하던 공윤의 문득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오팔색 광채가 감돌고 있었다. 키론의 것과 몹시 흡사한 그것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뿌렸다.
[포모나Pomóna.]
공윤이 속삭였다.
[이리 오렴.]
그녀는 평온한 낯빛으로 잠시 기다렸다. 이윽고 검은 하늘 사이로 금빛 날개가 홰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