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옘병할,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공윤은 절절한 심정으로 욕하고 싶었다.
땅 파서 십 원 한 장 안 나오는 거 알고 남의 돈 벌어먹기 쉽지 않다는 거, 십 대의 고릿적부터 알고는 있었으나 직접 체험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시작부터 이런 험한 판타지를 목격하게 될 줄이야.
그녀는 비늘이 뽐내는 리얼함에 몸서리쳤다.
공윤은 머리통 하나 이상 위에 있는 옥안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설명해요, 지금 당장.”
“라미아에요. 여기까지 내려오다니, 잘 없는 일인데.”
그걸로 끝?
아무래도 이 남자는 공윤에게 지나친 이해력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저 분, 어, 하체가 뱀처럼 생기신 여자분 이름이 라미아예요?”
“뱀처럼 생긴 게 아니라 진짜 뱀이에요. 아무래도 서리를 찾으러 온 것 같네요.”
“서...... 서리를요? 왜요? 아니아니, 서리가 저 분이랑 아는 사이에요?”
공윤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내가 초콜릿 까주던 애가 뱀 여자랑 아는 사이였다고?
키론은 공윤을 물끄러미 봤다.
공윤은 그 시선에 들끓던 질문을 꼴깍 삼켰다.
“아직 서명 안 했죠?”
“네.”
그래서 다행인 것 같아요.
“잘했어요.”
“네?”
키론은 또 웃었다.
이번에는 전혀 천사 같지 않았다.
“그냥 해버리려고 했는데...... 그래도, 당신이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는 알아야지.”
키론은 공윤이 생명줄마냥 붙들고 있던 팔을 놓게 하더니 몇 발짝 걸어갔다.
그녀는 그제야 그들이 아직까지도 바싹 붙어 있었다는 걸 알았다. 거의 껴안듯이.
“잘 봐요, 공윤 씨. 그리고 결정해요.”
키론의 눈이 똑바로 공윤을 쳐다봤다.
그녀는 그 색을 뭐라고 해야할지 알 것 같았다. 오팔......
“하기 싫다고 하면, 보내줄게요.”
키론의 눈은 오팔 같았다.
그토록 많은 것을 품어야만 하는 자의 눈.
***
“여기서 뭐하고 있었던 거니, 아가.”
라미아의 말투는 마치 신데렐라에게 다정하게 구는 계모 같았다. 그러니까, 그녀에게 상냥함이란 어쩐지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서리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내가 연어 먹는 곰을 잡아오라고 한 게 싫었던 모양이구나. 이렇게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다니.”
“...... 시, 어어.”
서리가 중얼거렸다.
그 애의 시선은 바닥에 들러붙은 쇼콜라 케이크의 잔해에 머물러 있었다.
공윤은 서리의 심정을 이해했다. 내 치킨......
“뭐라고 하는 거냐, 알아듣게 말을 해.”
라미아가 성급하게 쏘아붙이며 미끄러지듯 다가갔다.
안대를 썼는데도 앞이 잘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런 곰은 이 나라에 없다는군요. 서리는 아무래도 곰 사냥에는 별 흥미가 없는 것 같은데요.”
“누구냐?”
공윤은 순간 그녀의 머리카락이 수백 개의 뱀 가닥으로 보였다.
라미아는 인간의 형상인 상체마저도 온전히 뱀이 된 듯 쉿쉿거렸다.
“안녕하세요, 라미아. 오랜만에 보네요.”
키론은 마실 나온 동네 청년처럼 굴었다.
성질 사나운 노인에게 사근사근하게 말을 붙이는 남자.
그는 태평해보이기까지 했다.
...... 어쩌면 이 알바, 서비스직일까?
라미아는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그 동작은 퍽 기괴해보였다.
“누구지?”
“키론이에요. 오래전이라 기억이 잘 안 나시나보네요.”
키론은 더없이 상냥한 말투였다.
“오오, 키론?”
라미아가 손뼉을 짝 쳤다.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 언제 성별 바꿨니? 여자인 줄 알았는데.”
키론의 친절한 표정에 약간의 균열이 생겼다.
라미아는 뱀의 몸통을 휘저으며 키론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진짜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키론을 맛보듯 했다.
틀림없이 냄새가 고약할 텐데도 키론은 물러서거나 표정을 찡그리지 않았다.
“아니야. 얼굴이 달라.”
“난나는 없습니다. 이제 제가 키론이에요.”
‘난나?’
공윤은 궁금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참았다.
나중에 꼭 물어봐야지.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이곳이 꽤 외곽이긴 합니다만, 사람들에게 들키면 어쩌려고요.”
“내 애를 찾으러 왔지.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오질 않잖아.”
“애라면...... 서리 말인가요?”
“서리?”
라미아는 몹시 불쾌한 듯 되물었지만 키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서리에게 총총 다가가더니 그 애의 눈을 빤히 봤다.
공윤이 보기에는 탁하고 멍해 보이는 눈이었다.
“서리야, 저 분과 계속 있고 싶니?”
서리는 눈을 느리게 껌벅거렸다.
“아아아......니이.”
“그럼 어떻게 하고 싶어?”
서리는 공윤을 보고, 키론을 봤다가, 공윤에게 걸어가더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어...... 뭔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굉장히 중대한 일이 순식간에 결정된 것 같은데.
공윤은 자기 손을 잡고 흔드는 서리를 뿌리치지도 못하고 울상을 지었다.
서리는 이걸로 됐다는 듯 만족스레 골골거리는 소리를 냈다.
키론은 서리와 눈을 맞추느라 숙였던 허리를 펴고 선언했다.
“라미아, 서리는 데려갈 수 없습니다.”
거의 진리라도 말하는 태도였다.
라미아는 이를 갈았다.
저 치아들, 진짜 뾰족한 것 같은데 입 안 다 갈리겠다......
공윤은 참견하지 않기로 했다.
“내 애를 그렇게 부르지 마.”
“서리는 이제 서리에요. 스스로 받아들였으니까요. 그걸 부정하는 건 저 아이를 부정하는 겁니다.”
“누구 멋대로 그런 짓을?”
“서리 스스로요. 애초에 당신 아이도 아니잖습니까. 데려올 때 서리가 동의했나요?”
“동의라!”
라미아가 비웃었다.
“어린 키론아, 우리에게 그런 것이 필요할 것 같으냐? 저 앤 약했고 나는 강했다. 그게 전부야. 그러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키론은 잠깐 말이 없었다.
그는 갑자기 피곤해 보였다.
“그런 논리로 따지지 마세요. 그렇다면 당신을 저주한 여신도 당신보다 강했으니 정당한가요?”
라미아의 창백한 이마 위로 푸른 혈관이 솟았다.
그녀가 새파랗게 속삭였다.
“어린 것아, 내 손에 죽고 싶니?”
“해보세요, 라미아. 당신이 정말 할 수 있다면 좋겠군요......”
키론이 평온하게 웃은 순간 라미아가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