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군것질을 하러 잠깐 밖으로 나왔었는데 동네에서 가끔 마주치는 한 꼬마가 “눈이 왔으면 좋겠다!”라고 외쳤던 것이 갑자기 기억났다. 아마도 지금 하늘에서 조금씩이지만 눈이 내리고 있기 때문일 거다. 누군가는 크리스마스가 아니라지만 어쨌건 겨울에 눈을 봤으니 기분이 좋다는 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오늘이 온 것에 다행을 느낄 테지. 하지만 난 다르다. 오늘이 온 것에 불행을 느낀다. 단순히 월요일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늘은 만남이라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온다는 이별의 날이기 때문이다.
종업식과 졸업식이 겸해져서 치러졌고 그 막이 내렸다. 지민 선배와 이호 선배는 다음 학년부터 직업학교로 간다고 했다. 뭐, 솔직히 이별의 날이라고 거창하게 말하긴 했지만 영영 못 보는 게 아니긴 하다. 보려고 마음먹으면 주말 같은 때에 언제든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난 시간들과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옷을 입을 일은 얼마 없을 거다.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졸업과 종업이라는 것에 들뜬 마음이 되어버린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 위로 올라갔다. 도저히 이별이라는 것에 기분이 올라가는 사람들 사이에 껴있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목적지는 당연히 동아리실, 나 이외에 아무도 없더라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올라갔건만 그런 마음이 무색하게도 상문과 주윤이 나를 반겼다.
“너도 참 너다, 이런 날에 가족들이랑 있지 않고 여기에 오다니.”
먼저 주윤이 내게 말을 걸자 질세라 상문이 말을 이어 받았다.
“그러게 말이야.”
“너희가 할 소리냐?”
“난 가족한테 오지 말라고 했어.”
“우리 부모님은 바빠서 못 오신다고 말씀하셨거든.”
내 반박은 둘의 카운터로 인해 모두 바스러졌다. 가방을 대충 바닥에 던져놓고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둘은 아무런 말없이 그런 나를 지켜보다가 조용히 물어봤다.
“저 아래쪽 사람들 때문에 온 거지?”
“어떻게 알았어?”
“우리도 그래서 왔거든.”
멍하니 그 대답을 곱씹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웃음이 작게 터졌다. 아래쪽에 있는 이별을 생각하지 않고 새 출발만을 생각하는 사람과는 근본이 다른 웃음이 말이다. 그런 나를 보며 상문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고 주윤은 질문했다.
“왜 웃어?”
“아니, 뭐라고 해야 할까. 우리도 참 비슷한 사람끼리 모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내 말을 들은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웃음 지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우리 셋은 꽤나 닮았기 때문일 거다. 처음부터 닮았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닮았다. 우리 셋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 같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 지금 없는 지민 선배와 이호 선배가 바로 그 사람들이다. 1년도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가르쳐줬다. 그들은 그런 자각이 없을 수도 있고 그럴 생각이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중요한 건 우린 좋은 영향을 받았다는 거다.
웃음이 서서히 멎어갈 때가 되자 빈자리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기타를 천천히 건들고 드럼 스틱을 들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던 둘의 빈자리가 말이다. 그들이 늘 앉던 자리에 시선을 고정시켜둔 채로 있자 둘도 나를 따라 빈자리를 바라봤다. 이것 봐, 닮았다니까.
조용히 상문이 입을 열었고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뭔가 쓸쓸하네.”
“그러게…….”
“이젠 정말 우리 셋이 여길 이끄는구나.”
저마다의 감상평을 내놓고 각자만의 감성에 빠져가고 있는데 여느 때와는 다르게 문이 세차게 열렸다. 마치 너희들의 슬픔을 날려버리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문을 열은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호 선배였다. 연이어 들어오는 지민 선배를 보고 우린 놀라기 바빴다.
“귀신이라도 봤어? 왜 그리 놀래.”
이호 선배의 한마디에 우리는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못 했다. 방금 전까지 각자의 감성으로 빠지게 한 주요 원인이 눈앞에 등장했기 때문일 거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선배들은 우리들이 아까까지 바라보고 있던 빈자리에 앉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젠 너희가 여기 주인이야. 무슨 소리인지 알지?”
“하고 싶거나 되고 싶은 모습으로 이곳을 바꿀 수 있다는 소리겠죠.”
이호 선배의 질문에 내가 대답했다. 연이어 지민 선배가 남은 둘에게 질문했다.
“어때, 잘할 수 있겠어?”
“아마도요?”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잘하도록 해봐야죠.”
남은 둘의 대답을 마저 들은 선배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 선배가 한숨을 작게 섞어 말을 이었다.
“참 길다고 한다면 길고 짧다고 한다면 짧았어. 누군가의 뒤를 쫓으면서 바쁘게 달리기도 했고 누군가가 제대로 쫓아올 수 있게 앞서 나가기도 했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거야. 이 동아리 안에서 내가 어떤 형태였고 내 옆에 어떤 사람이 있었건 그 모든 것이 행복했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지. 너희들과 한 공연은 정말 재밌었어.”
내용과는 다르게 어딘가 슬픔이 느껴지는 분위기의 말투였다. 선배의 말이 진심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은 아니다. 진심일 테지만 어느 구석에서 슬픔이 눈을 번뜩이며 도사리고 있는 느낌이랄까? 물론 그것이 우리와의 생활이 지금까지처럼 될 수 없기 때문이라면 더 할 나위 없이 기쁘겠지만……. 설령 그것이 영향을 끼쳤어도 그것만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소 선배의 말투가 아니었다. 이런 내 생각에 아랑곳 하지 않고 선배는 말을 끝맺었다.
“너희들 각자가 우리에게 배운 것들이 있을 거야. 그게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잊지 않았으면 좋겠네.”
그리곤 가방을 뒤적이며 캔 음료수를 하나씩 꺼냈다. 가만히 보니 음료수만이 아니라 술도 섞여있는 것 같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것을 조용히 가리키자 지민 선배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대답했다.
“처음 만났을 때 말하지 않았어? 우리도 꽤나 악질이라고.”
분명히 그랬던 것 같은 기억이 나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각자 선호하는 음료수를(선배들은 술을) 들었고 누가 하자고 하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음료수를 든 팔을 위로 올렸다. 이호 선배가 슬며시 웃음을 머금고 우리들을 한 명씩 차례대로 바라봤다. 절대로 이 인원을 잊지 않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이윽고 이호 선배가 지민 선배에게 눈짓하자 지민 선배가 힘껏 외쳤다.
“종업을 축하한다!”
우리 1학년 트리오도 한 목소리로 그에 대답했다.
“선배들도 축하합니다.”
그리고 각자의 음료수를 한 모금씩 들이켰다. 캔에서 입을 떼고 앞을 바라보니 지민 선배가 무표정하게 우리 1학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무표정은 아니다. 애잔함과 안타까움의 사이에 있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표정에 실려 있었다.
“왜 그러세요?”
선배는 내 질문에 고개를 숙인 채 가로로 저으며 작게 대답했다.
“아까 너희가 하는 얘기를 들었거든. 그래서 그거에 대해 얘기해줄 게 생각났어.”
선배의 그 말에 적어도 나는 숨을 순간적으로 멈췄다.
그게 들렸단 말이야?
일단 선배가 할 얘기가 있다고 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뒷말을 재촉했고 선배는 그에 응하여 대답했다.
“물론 새 출발만을 생각하며 이별을 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별만을 생각해서 새 출발을 잊는 것도 안 돼. 무슨 말인지 알지?”
선배는 우리들을 돌아봤고 우린 선배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전원의 끄덕임을 확인한 선배는 안심한 것 같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곤 언제나처럼 당당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잘 와줬어, 우리의 동아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