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는 시간이 점점 빨라지더니 이젠 외투를 입지 않으면 안 될 날씨인 12월의 겨울. 이런 계절엔 집에서 이불을 꽁꽁 싸매고 귤이나 까먹으면서 스마트폰 보는 게 최고인데 난 지금 무대 위에서 아무도 없는 텅 빈 객석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이곳은 G대학교에 있는 별관 강당. 꽤나 멀리 떨어진 곳임에도 여기까지 온 이유는 단순하다. 공연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뭐하고 있어? 내려와. 연습해야지.”
“네, 선배.”
뒤에서 들려오는 지민 선배의 말에 난 객석에서 눈을 떼고 무대의 뒤편으로 내려가 선배의 뒤를 따랐다. 이번에 하는 공연이 2학기 초반부터 열심히 악기를 배우고 합을 맞추는 등의 연습을 해온 이유다. 하지만 여전히 나를 따라다니는 열등감은 왜인지 모르게 오늘따라 더욱 심하게 요란을 떨어댔고 떨어댄다. 오늘만큼은 그런 생각을 그만두고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집에서 나왔건만, 그 다짐의 역효과인지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는다. 이럴 때마다 내가 기계였다면 조금 더 편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 생각은 늘 그렇듯 현재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았다.
연습실이라는 글자가 적힌 곳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이호 선배는 물론, 상문과 주윤이 연습에 한창이었다. 나보다 앞서 들어간 지민 선배가 드럼 스틱을 내 앞으로 불쑥 내밀었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것을 쥐었다. 역시 내 고민을 말하긴 글러먹었나.
“이제 연진이도 왔으니까 슬슬 제대로 연습하자. 곡들은 다 기억하지?”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의 자세를 잡고 있는데 상문이 지민 선배에게 물었다.
“이번에 선배는 무슨 악기를 맡을 생각이에요? 기타? 아니면 보컬?”
지민 선배는 그 질문에 망설임 없이 시원스레 대답했다.
“오늘은 둘 다 할 거야. 그러고 싶은 날이거든.”
찰나와 같다고도 느낄 정도로 정신없는 마지막 연습 시간이 전부 흘러갔다. 벽에 걸린 무미건조한 시계는 공연 시작까지 30분 정도 남았다는 사실을 내게 알려주었다. 다른 넷은 관객 분들이 얼마나 오는지 보고 싶다는 것을 구실로 내가 현재 있는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뭐, 나쁘지 않다. 오히려 조용하니 좋다고 볼 수 있다. 공연 시작 전에 이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말이다. 곧이어 눈을 감고 아무도 없는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이 듣고 볼 수 있는 생각이라는 파도에 몸을 맡겼다.
열등감. 이것은 늘 내 주위를 맴돌며 생각하지도 못 한 타이밍에 훅 치고 들어와 내 생각을 장악한 뒤, 천천히 나와 주위의 것들을 넘어뜨리는 놈이다. 지금만큼은 어떻게든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를 회상해보면, 열등감이라는 것은 언제나 없애려 했지만 언제나 없앨 수 없었던 것이었다. 당연히 이번 경우에도 없앨 수 있을 리가 없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없앨 수 없다면 작게라도 만들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최대한 이것을 작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선배들이나 애들한테 이 일을 얘기하고 그에 대한 위로나 대책을 받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러고 있지 않다. 정확히는 그러지 못 하고 있다. 왜일까? 그건 고민을 가진 이들 중 몇 명이 주위에 말을 하지 못 하는 이유에 내가 해당되기 때문이다. ‘주위에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기에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 말이다. 누군가는 내 이런 모습을 보고 모순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렇기도 하다. 친구 사이에 고민을 나누는 게 당연하다고 했으면서도 정작 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허나 여기엔 차이점이 있는데 내가 ‘친구 사이에 고민을 나누는 게 당연하다.’는 발언을 했던 그 고민은 당사자의 친구들로부터 태어난 고민이었고 내가 가진 고민은 순전히 내 성격에서 태어난 고민이라는 거다. 즉, 누구에게서도 영향을 받지 않은 내 문제이기에 내가 해결할 일이고, 더욱이 주위에 말해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얘기다.
생각이란 건 시간을 빠르게 흐르게 하는 재주가 있었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 재주가 발휘됐다. 시계를 보니 그새 20분이 흘렀었고 구경을 나간 선배들이랑 친구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 기대와 설렘, 긴장이 섞인 표정으로 관객 분들이 많이 왔다거나 잘 될지 모르겠다는 말들을 쏟아냈다. 난 직접 보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의 많은 분들이 오신 건지 짐작이 안 갔지만 지민 선배가 작은 목소리로 “저번보다 많네…….”라고 중얼거리며 우리들을 조금 걱정스럽게 보는 것을 재료로 짐작해보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사람이 온 것 같다. 관객석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일지도 모르려나. 그렇게 생각하니 나 또한 긴장이 되었다. 덕분에 연이어 찾아온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대기실이 있는 복도의 양 끝에 배치된 정수기 중 안쪽에 있는 것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도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서 뒤를 돌아봤더니 지민 선배가 인사를 하는 것처럼 손을 들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예의 상 선배가 오기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정수기 쪽으로 향했다.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걷기만 하던 상태는 정수기에 도착하고 나서야 변화했다.
“이야, 사람 엄청 많이 왔어.”
“그렇게나 많아요?”
“그래. 너도 봤으면 아마 주윤이처럼 얼빠진 목소리를 냈을지도 모를 정도야.”
“얼마나 얼빠진 목소리인지 듣고 싶네요……. 그런데 선배는 어떻게 여길 알았어요?”
“뭐가?”
“이곳이요, G대학교 별관 강당. 그리고 부탁을 받았다고 했지 않았어요?”
“그랬지.”
“궁금한 게 그거에요. 대충 설치된 곳도 아닌 대학교의 강당인 이유와 이번 공연을 해달라는 부탁을 누구에게 받았느냐는 거죠.”
지민 선배는 종이컵에 담긴 물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물에 비친 자신을 보며 과거를 회상하는 것처럼 말을 꺼냈다.
“나도 이건 선배한테 들은 거라 확실하진 않아. 믿든 안 믿든 네 자유라는 뜻. 그러니까…… 우리 동아리는 처음 설립 당시에 다른 동아리랑은 운영 방식이 달랐대. 다른 동아리는 지금처럼 고등학교 3학년은 끼어들 수 없는 시스템이었는데 여긴 달랐다는 거야. 물론 표면상으론 같았겠지만 아무튼 3학년도 같이 할 수 있는 동아리였어. 그 이유가 뭐였는지 알아?”
돌연 날아든 선배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 우리 동아리는 음악 쪽으로 같이 진출할 사람을 모집하는 곳이었거든. 즉, 마음이 맞는 사람이면 같이 졸업 후에 오디션을 보러가든지 할 수 있었다는 소리지. 결국 선생들이 귀신 같이 밝혀내서 동아리에 제한을 걸어두고 그랬지만……. 아무튼 이곳도, 우리에게 부탁을 한 분도 전부 그 때부터 알게 되었어. 당연하게도 우리가 먼저 부탁을 드렸다고 해. 그리고 그 때의 일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거지. 관객 분들도 처음엔 어린아이나 어르신들 밖에 없었다고 해. 하긴, 고등학생 몇 명이 모여서 하는 공연에 누가 그렇게 관심이 있었겠어? 그래서 부탁하신 분도 얼마 안 가 포기하려고 했다나 뭐라나……. 하지만 오랜 기간에 걸쳐 같은 시즌에 같은 곳에서 공연을 하니까 사람들이 관심이 생겼나봐. 작년을 비롯한 최근엔 성별, 연령에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왔고 온다고 해.”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머릿속으로 그 수많은 장면들을 그렸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고 오디션을 보고 음악을 즐기며 서로를 알아가고……. 그리고 그와 함께 긴장감에 묻혀있던 열등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역시 나와는 안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안 어울린다는 열등감. 그렇게 미약한 우울함에 휩싸여가기 시작할 때, 지민 선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순간적으로 난 내 귀를 의심했다.
“네……?”
“내가 네 나이인 17년 동안 24시간 내내 널 봐오진 않았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 두 번씩 몇 시간을 봐왔어. 표정 변화나 그 날 컨디션 같은 건 대충 눈에 보이지.”
선배의 말에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 했고 그런 나를 보며 선배는 시원스럽게 말을 계속했다.
“여하튼 다시 물어볼게. 무슨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