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1학기 기말고사로 인해 12시도 넘기지 않고 끝났다. 그럭저럭 시험을 보고 난 뒤에 동아리실로 올라왔는데 어쩐 일인지 문이 열려있었다. 올라오기 전에 본 광경으로 생각해보면 박주윤은 아직 가채점 중이었고 창밖으로는 이지민 선배와 서이호 선배가 매점으로 들어가고 있었으니 동아리원 중 누구도 현재 이곳으로 올 수 없다……. 동아리실은 해당 동아리원이 아닌 이상 수위 아저씨도 열지 못 하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인데 누구지?
누군지 모르겠으나 일단 나는 동아리원이니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가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용으로 구석에 둔 의자 위에 앉아있는 여학생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쪽도 내게 시선을 옮기며 나와 눈을 맞췄고 침입자 같지 않은, 너무나도 당당한 분위기로 내게 손을 흔들었다. 하마터면 같이 올라갈 뻔한 내 한쪽 손을 겨우 잡아두고 그녀에게 물었다.
“동아리원이 아니신 것 같은데 어떻게 들어오셨죠?”
“그냥 열려있던데?”
“……네?”
“올라올 때 어떤 남녀 선배를 봤는데 그 선배들이 범인이지 않을까?”
나는 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설마 매점에 가기 전에 여기에 들러서 문을 열어두고 가다니……. 어차피 훔칠 것도 없다지만 그러다가 뭐라도 없어지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주윤과 나를 배려한 행동이었을까? 나는 고개를 가볍게 좌우로 흔들고 생각들에게서 빠져 나왔다. 그건 나중에 선배들이 왔을 때 물어보면 되는 일이다. 지금은 내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중요하다. 우선…… 어째서인지 이름표가 달려있지 않지만 일단 선배들을 선배라고 지칭한 것으로 봤을 때 나와 동갑임은 틀림없다. 조금 더 말을 편하게 해보자고 생각하며 헛기침을 한 뒤에 목을 가다듬고 다시 질문했다.
“여기엔 어쩐 일로 온 거야?”
“왜 왔을 거라고 생각해?”
“밴드부 관련 일이거나 고민 해결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맞아. 고민 때문에 온 거야.”
“선배들은 아마 곧 있으면 올 거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응? 선배들은 왜?”
“어? 뭐가?”
“너도 해결해줄 수 있잖아.”
그 말을 듣고 나는 살짝 멈칫했다.
내가?
내가 누군가의 고민을 해결해줄 수 있을까?
내가 선배들의 해결을 지켜보고 기다리는 이유, 선배들의 해결에 감탄하는 이유, 내가 나서지 않는 이유는 누군가의 고민을 듣고 해결해준다는 건 말 그대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하고 잠시 나의 일을 놓으면서까지 남의 고민에 대한 생각을 하고 해결 방법을 찾는 그런 책임감이 있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 그 정도의 책임감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는 내가 누군가의 고민을 해결해준다는 건 분명히 모순적이다. 그렇기에 여태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앞에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내게 질문을 살포시 건넸다.
“내 고민…… 들어주기라도 해볼래?”
나를 향해 똑바로 꽂히는 시선과 그 속에 담긴 진심을 차마 외면하지 못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그녀가 앉아있는 곳 앞으로 의자를 하나 끌고 와 앉은 뒤, 마주봤다. 어쩔 수 없다. 여전히 이것이 모순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지만 겉으로 내보인 답을 따를 수밖에 없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처음부터 약하게나마 내게 의문을 제시하던 것을 물어봤다.
“그…… 이름표는 왜 없어?”
“아, 그거? 뭔가 거부감이 들어서 말이야. 내 교복엔 그런 거 없어.”
“하지만 없으면 교문 통과를 못 할 텐데.”
“맞아.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생각해낸 건데 우리 학교는 체육복 등하교가 가능하잖아? 4월 정도까진 변명으로 어떻게든 넘기고 그 후엔 전학 간 친구 체육복을 얻어서 그거 입고 등교해.”
“그거 걸리지 않아?”
“그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내 이름이 아니라 이름표의 유무라서 괜찮아. 실제로 학교에 다니면서 한 번도 걸린 적이 없어.”
턱을 괴고 그녀의 답변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 가지를 더 물어봤다.
“근데 애초에 이름표를 왜 안 다는 건데?”
“흐음…… 뭐랄까, 강아지 같은 존재가 된 것 같아서? 강아지에게 목줄을 채우고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목줄에 걸린 이름표를 보고 ‘저 강아지 이름이 이러이러한가봐~’ 하잖아? 그런 느낌이 있어서 말이야.”
고개를 가볍게 위아래로 움직이고 난 후에 헛기침을 하고 그녀를 바라봤다.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한 스타일이라고 해야 할까? 확실한 건 이유 없는 반발심으로 하지 말라는 짓을 하는 애들과 비교했을 때 훨씬 나은 것 같다. 선배들이랑 은근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중요한 한 가지만 더 물어보고 본론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네 이름을 몰라. 이름이 뭔데?”
“김상문이야.”
“그래, 그럼 고민이 뭔지 말해줘.”
상문은 고개를 끄덕이고 목을 풀더니 말을 시작했다.
“음…… 생각해 보면 누구나 한 번 정도는 마주쳐봤을 법한 일에 대한 고민이야. 친구 중 하나가 종교를 좀 강요해.”
“무슨 종교인데?”
“그건 말할 수 없어. 무교인 네가 내 말을 듣고 편견을 가질 수도 있잖아?”
머릿속에 당장 어떠한 질문이 떠올랐지만 명확하게 보이진 않아 우선 묻어두고 상문의 말에 동의했다. 찝찝하지만 내 기분이 우선이 아니기에 그녀에게 “계속 말해.”라고 공을 던졌고, 상문은 고갯짓으로 리시브했다.
“아무튼 좀 도가 지나치다고 해야 할까? 처음엔 가벼운 권유 정도였는데 점점 강제성이 띄워져. 인사말이 되어버렸을 정도니 말은 다 했지. 우리 집에 찾아와서 우리 부모님한테 권유할 정도야. 내가 그래도 몇 번 말하니까 부모님한테는 별 말을 안 하는 것 같긴 한데 우리 부모님한테 갈 권유를 내 쪽으로 죄다 끌고 온 느낌이야, 요즘은.”
“흐음…….”
그 말을 듣고 나는 그 정도의 호응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상문의 이야기를 대충 흘려듣고 있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나 같은 경우엔 대충 듣고 있지 않기 때문에 호응을 이것 이상으로 할 수 없다. 나는 말을 한 번에 다 듣고 생각을 시작하면 놓치는 포인트가 늘 생기는 케이스인지라 이렇게 말을 들어가며 바로바로 생각을 떠올려야 한다. 귀와 뇌가 동시에 일을 하고 있으니 입이 제대로 작동할리 있겠는가.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이런 상황을 모르기에 한 번씩 “제대로 듣고 있어?”라고 물어보곤 했고 이번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기…… 제대로 듣고 있는 거 맞아?”
간단하게 “응.”이라고만 대답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타이밍에 불쾌함을 느껴 내 생각의 흐름을 끊던데 상문은 살짝 미간만 찌푸리더니 혼자서 어떤 형식이든 내 태도를 납득했는지 고개를 몇 차례 끄덕이더니 팔짱을 끼고 내 말을 기다렸다. 그녀의 배려가 헛되이 되지 않게 몸에 존재하는 모든 세포들을 사용해 생각을 해냈다. 몇 분 정도 지났을까? 정확히 얼마가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 앞에 있는 상문이 그렇게까지 나쁜 표정이 아니라는 것과 아직 선배들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보고 아직 얼마 지나지 않았을 거라며 짐작할 뿐이었다.
목을 가다듬고 상문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녀는 지금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아까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하게 나와 눈을 맞췄다.
“대충 생각은 끝났어.”
“그래?”
“응. 이제부터 들려줄게.”
“기대되는걸.”
“큰 기대는 걸지 마. 그 후에 밀려올지도 모를 실망에는 책임 안 질 거니깐.”
“그 말을 들으니까 더 기대된다.”
“뭐, 아무튼…… 시작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