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오, 선배들. 여기 봐요. 들어있는 게 있어요!”
박주윤이 호들갑을 떨며 우편함을 가지고 달려와 책상 위에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들을 쏟아냈다. 후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종이들. 아무렇게나 접혀져 있는 것도 있고 반듯하게 접혀져 있는 것도 있었다. 그것을 본 나는 입을 열었다.
“은근 많은데?”
“그러게. 이렇게나 많은 고민들을 가지고 있는 걸까?”
서이호 선배가 우리 뒤에서 대화를 듣다가 책상 쪽을 보더니 아무렇게나 접힌 것과 반듯하게 접힌 것으로 나눴다. 우리가 무엇을 하냐고 묻자 선배는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무렇게나 접었다는 건 그만큼 진지함이 부족하다는 거고 그렇기에 내용이 터무니없을 확률이 좀 있거든.”
라고 대답하면서 종이들을 하나씩 펴서 읽기 시작했다. 무표정하게 읽다가 대부분의 것을 꾸겨 뭉친 다음에 쓰레기통에 버렸다. 우리가 쓰레기통과 선배를 번갈아 바라보자 선배는 웃으면서
“저기에 어울리는 말들이야.”
라고 했다. 여담이지만 나중에 주윤과 둘이서 확인해보니 선생이 뭐라고 하는 게 화나서 죽이고 싶다거나 이런 거 할 시간에 공부나 하라거나 하는 내용들이 쓰여 있었다.
아무렇게나 접힌 것에서도 그나마 읽을 게 있었던 모양인지 두 장 정도가 펴져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는 것처럼 반듯하게 접힌 것들을 펴 나열하기 시작했다. 전부 나열을 끝낸 후에 이호 선배가 이지민 선배를 불러왔다. 여태까지 단잠을 자고 있었는지 눈을 비비며 천천히 다가왔다.
“왜…….”
“이만큼 쌓여있었어.”
“어디에?”
“우편함.”
“흐음…….”
선배는 종이들의 내용을 천천히 훑으며 새롭게 분류를 시작했다. 좀 많은 종이들이 한 쪽으로 쏠렸고 전체를 10으로 봤을 때 대략 7대2대1의 비율로 나눠졌다. 이것이 뭐냐고 묻자 지민 선배는 한숨을 섞으면서 대답했다.
“비슷한 주제들이 좀 보여서 분류를 해봤는데 뭐, 보는 대로야. 대부분이 비슷한 내용이지.”
“무슨 내용인데요?”
“성적을 올리고 싶다는데.”
“아…….”
“무시할 만한 내용들이지?”
“네, 어느 정도는…….”
“그래도 조금은 답장을 해줄까요?”
“무슨 답장? 뭐라고 쓰려고?”
“음. ‘스마트폰을 부숴라. 못 부순다면 네 의지는 고작 그 정도다. 아니면 적어도 핸드폰을 정지시켜라.’는 어때요?”
“글쎄, 항의가 오지 않을까? 그리고 스마트폰을 안 부숴도 하는 애는 알아서 하지 않나?”
확실히 그건 그렇다며 주윤과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지민 선배는 답장을 하던 안 하던 상관이 없다는 것처럼 기지개를 켰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우리와 7의 비율을 가진 종이를 번갈아 보던 이호 선배가 지민 선배에게 질문을 던졌다.
“남은 건 무슨 내용이야?”
“아, 저기 좀 적지만 그래도 뭉텅이로 있는 건 연애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 이쪽에 앞선 두 뭉텅이보다는 양이 적은 종이들은 대학에 관한 질문.”
“흐음…….”
“정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아니면 우리한테라도 의지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네. 성적을 올리는 방법은 학교나 학원이 잘 알고 있을 테고, 연애는 어차피 운이야. 운 좋게 마음이 맞는 상대를 만나느냐 마느냐의 문제지.”
“그럼 솔로들은 운이 없는 사람들인가요?”
“글쎄다. 그 중엔 스스로 운을 던져버린 사람도 있겠지. 그리고 아까 하던 말을 잇자면 대학 문제 또한 학교나 학원이 더 잘 알아. 우리한테 질문하기 전에 먼저 그쪽을 들렀어야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을 정도의 애들한테 뭔 소리를 하냐. 들렀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여기에 종이를 넣은 거라면 이야기는 다르지만.”
“들으면 상처 받지 않을까?”
“어느 정도는 틀린 말이 아니라서 상처를 받는 거겠지.”
지민 선배는 말을 끝마치고 종이들을 훑어보다가 1의 비율 쪽에 있던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어 천천히 읽었다. 그리곤 뭐가 웃긴지 동아리실을 메울 정도로 웃어 보였다. 우리 셋이 왜 그러냐는 눈으로 바라보자 선배가 종이를 우리 앞으로 내밀었다.
“그거 쓴 애는 좀 재밌네. 어쩐지 좀 어순이 이상하더라니 세로 드립이야.”
“세로 드립이요?”
“첫 글자들만 쭉 읽어봐.”
“……몇 학생은 왜 사회를 욕하는가.”
“그래. 그 애한텐 답장해줄 필요성이 있겠네.”
“뭐라고 적게?”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기 때문이라고 적어야지.”
“흐음. 그걸로 만족할까?”
“글쎄? 그럼 한마디 덧붙여주지, 뭐.”
“뭐라고 덧붙이게요?”
“적어도 지금의 네가 부정적인 면만 보고 있어서.”
9-2
“선배.”
석양에서부터 흘러나온 빛깔이 하늘을 채우기 시작할 때, 누군가가 이지민을 불렀다. 반사적으로 지민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와 몸을 돌렸다. 그곳에 서서 노려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지민을 응시하고 있던 이는 그녀 자신 또한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뭔 일이래, 네가 날 부르기도 하고.”
김민준은 천천히 지민에게 다가왔다. 그녀 자신 또한 그를 피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에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를 기다렸다. 서로가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가 되었을 때 민준은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에 입을 열었다.
“그 후에 계속 선배를 생각했어요. 선배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요.”
“개소리면 뺨 맞는다.”
“……선배의 그 말투에 대해서입니다.”
“내 말투?”
“네. 선배는 확실히 말투가 너무 거칠어요. 처음 만난 사람이 앞에 있을지라도 거친 말투에는 변함이 없죠. 그 부분은 제가 증인이에요. 심지어 고민을 풀어줄 때도 그렇습니다. 그건 예의가 없는 거 아닌가요? 저는 성격, 기분이란 걸 가진 사람이란 말입니다. 기분이 얼마나 나빠질지, 무슨 상처를 받을지 고려하지 않는 거예요?”
“말이 너무 중구난방하다고 생각하진 않냐?”
“아직 제 이야기 다 안 끝났는데요.”
“하, 그럼 다 말해봐.”
지민은 한숨을 크게 내쉬곤 고개를 내저으며 귀찮음을 잔뜩 담아 대답했다. 지나가는 강아지도 들으면 알 정도로 명백하게 부정적인 감정만이 들어있었지만 민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저와 미주만의 문제에요. 부모님마저도 간섭하지 않을 법한 문제라고요. 그런데 왜 선배가 끼어들어요? 당사자가 아니라면 가만히 있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와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소리만이 둘 사이의 공간을 채웠다. 지민은 다음 말이 있을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였고 민준은 자신의 할 말이 끝났기 때문에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오해가 낳은 침묵 속에서 둘은 한동안 가만히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기를 몇 분,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지민이 “이제 내 차례야?”라며 입을 열었고 민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침묵이 걷어졌다.
“그러니까 네 말을 요약해보면 내 말투는 거칠다. 초면인 사람에게도, 고민을 해결해줄 때에도 말투가 거친 것은 문제다. 그리고 그 일은 내가 낄 문제가 아니다?”
“네.”
“흠. 그럼 예시를 들어보자. 네가 살인자에게 가까운 친구, 가족을 잃었다고 해봐.”
“그럴 일은 없는데요.”
“예시라고 했지 않았냐? 예시에 태클 걸지 마. 그리고 아직 내 이야기 안 끝났어. 아무튼 만약 그렇게 잃었으면 넌 과연 살인자를 욕하지 않을까?”
“……하겠죠.”
“그 살인자도 초면 아닌가? 왜 욕을 하지?”
“하지만 그 사람은 법을 어겼잖아요. 그리고 저나 제 친구나 가족에게 상처를 줬고요.”
“넌 김미주에게 상처를 줬잖아. 범법이라는 것을 빼면 똑같지 않아?”
“그렇지만…….”
“내 이야기 아직 안 끝났다고 했지. 그리고 또 뭐였더라? 맞아, 내가 낄 문제가 아니라고 했던가? 헛소리 좀 작작해. 난 그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아니야. 김미주라는 애가 고민이라고, 해결해달라고 너와 걔 사이의 일을 들고 왔고 내가 해결해주겠다고 말한 시점에 이미 난 관계자라고. 내가 너희 둘 사이의 일에 이렇게 끼어든 것이 잘못이라면 변호사나 검사, 판사라는 직업이 존재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속사포처럼 지나간 말을 끝으로 아까 전의 침묵이 다시 깔렸다. 하지만 이번에 깔린 침묵 속에 서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전과 달랐다. 지민은 다음 말을 생각하며 혹시 모를 민준의 반박을 기다리고 있었고 민준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 한순간에 많은 말이 휩쓸고 지나가서 그런 것이다.
지민은 스스로의 인내심의 한계점까지 기다려도 상대방에게서 이렇다 할 말이 안 나오기에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굳이 너만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도 이런 내 말투를 지적할 수 있겠지. 많은 이유를 들면서 말이야. 하지만 어떡하겠냐. 난 그런 몇 사람들 때문에 나를 이루는 부분을 쉽게 바꾸고 싶진 않아. 나의 이런 점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도 있다는 거니깐.”
“취업할 때 면접관 앞에서도 그 말 해보시죠.”
어떻게든 짜내어 내뱉은 민준의 반박은 지민에게 보기 좋게 바로 반박 당했다.
“그 사람들은 내게 돈을 줄 곳을 주는 사람들이잖아. 당연히 그 땐 말을 바꾸지. 네가 나한테 돈을 준다면 모르는 일이지만. 그래, 만약 지적한 사람이 내게 있어 소중하다고 판단되는 존재라면 바꿀 의향은 있어.”
그리고 지민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마지막 말을 해주기 위해 하는 준비동작이다. 그녀가 그런 준비를 할 때조차 그는 입에 족쇄를 걸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숨을 쉬고 있는지도 의심이 될 정도의 조용함을 그는 쭉 고집하고 있었다. 민준이 할 말이 없어지고 긴장을 하면 늘 나오는 패턴이다.
“직접 당하기 전까진 공감은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게 요즘 우리 나이대의 애들이야. 아니, 요즘 사람들인가? 아무튼 그런 건 오글거린다며 멀리하기에 바쁘지. 그러면서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하면 공감해주고 같이 분노해주길 바래. 그건 모순 아니야? 난 그런 모순을 싫어하니까 실천하는 거야. 피해가 되는 불미스러운 일이 내게 일어났을 때 누군가가 공감해주고 화내주길 바라거든. 그런 주제에 가만히 앉아서 바라고 있을 수는 없잖아?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공감하고 동조하면서 같이 감정을 느낀 거야.”
“하지만 말이에요, 선ㅂ…….”
민준이 쉬어버린 목소리로 간신히 낸 말허리를 가뿐하게 자르며 지민은 덧붙였다. 그것은 민준에게 보내는 지민이 생각한 최고의 비수였고 지민의 예상대로 그 비수는 정확하게 그의 목으로 파고들어가 목소리를 못 내게 했다.
“애초에 네가 했던 짓이 정말 욕먹을 짓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정적만이 둘 사이를 가득 메꿨다.
석양은 이미 져있었고 짙은 푸른색이 밤의 시작을 알리듯이 하늘을 덮었다.
지민은 가볍게 손을 들어 작별을 고하고 뒤돌아 자신의 갈 길로 나아갔다. 민준은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있다가 지민의 뒷모습이 손가락으로 가려지게 될 정도로 작아졌을 때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