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봐요, 선배들. 설치한 보람이 있는 것 같은데요?”
“하나만 들어있는데?”
“없는 것보단 괜찮지 않을까요?”
얼마 전에 있었던 나에 대한 문제 해결을 계기로 난 이 동아리에 몸을 담게 되었다. 작년 겨울방학부터 이번에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 이곳을 한 번도 청소하지 않았을 것 같다. 아니, 반드시 그랬을 것이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시간을 들여서 먼지를 털어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쓰는 악기를 제외한 나머지들은 물론이고 의자, 책상, 창문 등등 먼지가 없는 곳을 가려내는 게 더 쉬울 정도다. 문제는 실제로 가려봤는데 그런 곳은 없었다는 거지만……. 아무튼 이런 일 말고도 나름 마음에 드는 일도 했는데 그것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일명 ‘우편함’이다. 선배들의 해결 과정을 바로 옆에서 봤고 문제의 당사자였던 내 시점으로 봤을 때 이들의 해결 능력은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문제는 이들은 포스터에 자신들의 반을 적어두지도 않았고 고작 이곳의 좌표만 적어놨기에 대부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칠 우려가 많다는 것이다. 아마 실제로 그냥 지나친 사람이 있을 테지. 그래서 내가 만들어낸 것이 바로 이 우편함이다.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문제를 간단하게 적어 넣어둘 수 있는 그런 우편함. 그리고 방금 확인한 결과, 작지만 수확이 존재했다.
“근데 왜 하나뿐일까요?”
내 질문에 선배들은 온도 차가 확연히 느껴지는 각자의 대답을 말했다. 먼저 이지민 선배가,
“글쎄다. 뇌가 장식이라? 아니면 공부한 내용들을 쑤셔 넣느라고 고민을 넣을 공간이 없거나.”
연이어 서이호 선배가,
“부끄러운 고민들이 있거나 자신이 판단했을 때 무겁다고 생각해서 아닐까?”
둘 다 틀린 말은 아니기에 난 고개를 끄덕이면서 우편함에 들어있던 봉투를 꺼내 뜯어 내용물을 꺼냈다. A4용지에 적혀진 꽤나 빼곡하면서 많은 글자들. 셋이서 읽기엔 글자의 크기나 용지가 작았기에 내가 읽기로 했다.
“읽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1학년 3반의 김미주입니다. 포스터에 적혀있는 고민 해결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찾아왔었는데 아무도 없으셔서 이렇게 종이에 적어 넣고 갑니다. 고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우선 저는 현재 남자친구와 연애 중입니다.”
여기까지 읽고 슬슬 본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민 선배가 내 말을 싹둑 잘랐다.
“잠깐만.”
“왜요?”
“네가 먼저 읽고 나서 시시콜콜한 연애 이야기면 찢어.”
“시시콜콜의 기준이 뭔데요?”
“데이트 장소를 알아봐 달라거나, 추천해 달라거나? 뭐, 그런 비슷한 분위기나 내용.”
선배의 말을 듣고 혼자서 천천히 내용을 눈으로 읽어나갔고 마지막 문장까지 다 읽고 나서 나는 선배들에게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갈까요?”
“왜?”
“그렇게 가볍진 않은데……. 이렇게 밖에서 이야기하긴 좀 그런 내용이에요.”
그렇게 우리는 동아리실에 나란히 들어왔고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자 지민 선배가 입을 열었다.
“그래. 다시 읽어봐.”
“네. 으흠, 저희는 다른 커플들과 똑같이 서로 좋아하고, 더 나아가 사랑했기 때문에 사귀기로 했고 지금까지 사귀고 있습니다. 별 싸움도 없이 평화롭게 데이트도 하고 공통된 관심사를 찾아보고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폭풍전야라고 하던가요, 그 평화롭던 날들이 지금에 와선 그렇게 느껴집니다. 일의 발단은 어제 방과 후였어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남자친구와 함께 하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자친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자꾸 말을 꺼냈다 넣었다, 주제가 이리저리 튀기도 해서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냐고. 그랬는데 남자친구가 정말 화 안 낼 거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습니다. 남자친구가 천천히 말을 꺼내더군요……. 네, 맞아요. 평소와 비교하면 훨씬 심한 신체적 스킨십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저는 당연히 화를 내진 않았습니다, 대신 확고하게 말했죠. 저는 혼전순결이라고. 그런데 그 일 이후로 어젯밤부터 남자친구가 평소와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피곤하다며 먼저 들어가기도 하고, 연락도 제 때 받지 않고…….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그리고 종이에서 눈을 떼고 “다 읽었어요.”라고 말하며 선배들을 보자 선배들은 크게 이렇다 할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둘 중 하나다. 무감각하거나,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서 하나 만을 표현하기 힘들거나. 약간의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이호 선배였다.
“이건 우리 영역의 문제인가?”
이호 선배의 말을 지민 선배가 받아 이었다.
“글쎄. 조언을 원하는 거면 그럴지도 모르는데.”
“흠.”
그리고 다시 찾아온 침묵. 나 또한 입 밖으로 내진 않았을 뿐 머릿속으로 어느 쪽이 더 최선, 적어도 차선의 방향인지 찾아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 나질 않아 내 머리에 대해 답답함을 느끼던 와중 지민 선배가 책상에 손을 올리며 나를 불렀다.
“야.”
“네?”
“데려와.”
“누굴……? 설마 얘를요?”
“그래.”
“점심시간도 곧 끝나가는 데요?”
“여기서도 예비종 소리는 들리니까 그 때 보내주면 돼. 그리고 그 때까지 이야기가 끝이 안 났으면 방과 후에 부르면 되잖아.”
“근데 남자친구랑 하교를 같이 한다고…….”
“네가 읽어놓고 눈치를 못 챘냐? 달라졌다고 하잖아, ‘달라진 것 같다’같은 애매한 추측이 아닌 확신에 가득 찬 말투야. 그렇다면 적어도 오늘은 하교를 같이 안 할 거다.”
가끔 저런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는 말을 지민 선배가 하는 것을 보면 자꾸 어렸을 때 읽었던 추리소설의 주인공이 생각이 나 흠칫할 때가 있다.
“알아들었으면 빨리 다녀와.”
“선배들은요?”
“기다리고 있을게.”
운 좋게도 A4용지 안에 있던 고민의 주인공은 자신의 반인 1학년 3반에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동갑에게 다가가 뭐라고 말할지 몰라 ‘음악실 옆에’라고 이야기했다. 배려 따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내 말에 내 앞에 있는 동갑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라는 말만 건넨 채 묵묵히 5층에 있는 동아리실로 향했다.
“생각보다 빨리 데리고 왔네?”
“반에 있었거든요.”
“그래, 뭐……. 아무튼, 네가 이거 썼지?”
지민 선배가 종이를 들어 보여주자 김미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요.”
“여기에 적힌 내용은 다 사실이야?”
“네, 전부 사실이에요.”
선배는 A4용지를 다시 봉투 안에 넣더니 드럼 쪽으로 던져 놓고 김미주에게 제대로 말을 시작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가끔 나오는 형사의 취조 장면이 얼핏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여기엔 혼전순결이라고 써져 있던데, 그 이외의 요소는 없어? 거부할 요소.”
“그냥 너무 이른 것 같고……. 지금은 일단 아니에요.”
“너 스스로에게도 거부 의지가 있단 소리네. 그렇다면 다음 질문. 남자친구랑은 어쩌고 싶어?”
“네? 무슨?”
“미래의 계획 말이야.”
“천천히 생각해야죠……. 될 수 있으면 함께 가고 싶어요.”
“음……. 좋아. 그럼 마지막 질문. 남자친구의 이름은?”
“김민준이에요.”
“음? 김민준?”
“네, 왜 그러세요?”
“아니, 별 거 아니야. 부탁 하나 해도 되지?”
“뭔데요?”
“김민준을 오늘 방과 후에 정문 앞으로 불러내.”
선배의 명령을 끝으로 김미주는 아무런 말도 없이 돌아갔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내가 지민 선배에게 저번부터 가지고 있던 의문을 물어봤다.
“왜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불러요? 그리고 방과 후……. 저번에도 그러지 않았어요?”
선배는 내 질문을 듣더니 뭘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대답했다.
“해결하고 바로 집으로 가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