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본 선영이는 조용한 아이였다.
나는 포식자들에게 잡혀 먹히지 않으려고 쥐 죽은 듯 조용히 숨어 지냈지만 선영이는 원래 성격이 그렇게 조용한 아이 인 것 같았다.
그녀와 나는 같이 일학년 영어반 이였다. 한 학급에 25명 정도가 편성되어 있었고 나의 학급에는 남학생과 여학생이 반반 정도였다. 학급에서 무엇보다 끔찍했던 것은 바로 민변구와 신영귀,에릭 방. 네명의 V4 중에서 무려 3명의 V4들이 한반에 있었다는 것이다.
V4 중에서 차동팔만 유일하게 중국어반이였다.
그녀는 무테 안경을 쓰고 교실 창가 맨 앞 구석 자리에서 항상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자리는 교실내 사각지역으로 선생이나 친구들에게서도 잘 눈에 띄지 않는 자리였다.
그런 점이 혹시 그녀도 나와 같은 부류가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만들었다.
나는 그녀를 몰래 관찰하는 도중에 얼핏 그녀의 정면을 마주보게 되었다. 나는 그녀가 오른쪽 눈에 살짝 사팔뜨기가 있다는 것을 재빨리 눈치챘다.
남들이 그녀를 볼 때 그녀의 사팔뜨기가 거슬렸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도리어 그녀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 다는 생각에 안심이 들었다. 그리고 항상 먼 곳을 꿈꾸듯 바라보는 듯한 그녀의 시선이 답답한 이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것 같아 더욱 끌리게 되었다.
난 선영이에게 말을 걸어 보려고 여러 차례 기회를 엿봤지만 학급 내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받던 나에게 그런 기회는 좀처럼 찾아 오지 않았다. 아무리 조용한 여자 아이라도 상대방도 그런 대상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국어 시간의 독후감 발표시간에 선영이가 발표할 차례가 되었다. 나는 내심 긴장했다.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오랫동안 쳐다 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선영이가 발표한 독후감 책의 제목은 톨스토이의 <부활>이였다.
이런 심술 궂은 운명의 장난이라니. <부활>은 내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중의 하나 였다. 여주인공 <카튜사>가 자기집 주인 남주인공에게 어린 시절 순결을 유린당한 후 타락을 길을 걷게 되고 나중에 남주인공이 범죄자가 되어 붙잡혀 온 그녀를 우연히 만나 그녀에게 영혼의 속죄를 하는 내용이었다.
난 그녀가 이 책을 독후감의 대상으로 선정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선영이와 나의 영혼이 교감이 된다는 의미였고 그동안 나에게 큰 시련을 안겨준 조물주가 나의 인내에 보답하여 내려주는 선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치 성경에서 <욥>이 신이 내린 큰 시련과 고통을 극복하자 큰 행복으로 보답 받은 것처럼 말이다.
그녀가 독후감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나는 숨도 쉬지 않고 아픈 심장이 헐떡거리는지도 모른채 나의 모든 오감을 그녀의 입술과 눈동자와 목소리에 집중했다.
“이상으로 제가 준비한 톨스토이의 <부활>에 대한 독후감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그녀가 마침내 오분 동안의 독후감 발표를 마쳤을 때 그토록 황홀한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 것에 대하여 벽에 걸린 시계가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안경을 고쳐 쓰고는 도도한 표정으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난 다른 여자아이들과는 그녀의 그러한 도도한 얼굴표정이 기품 있어 보여 좋았다.
친구들은 그녀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었겠지만 나는 그 짧은 오분 동안 그녀에 대하여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우선 그녀는 눈에 사팔뜨기라고 불리는 약간의 사시끼가 있었다.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의 여주인공 <카튜사>가 소설에서 사팔뜨기로 묘사되었는데 그녀도 마치 소설의 여주인공처럼 왼쪽 눈에 약간의 사시끼가 있었다.
그리고 여태까지 잘 눈치 못챘었지만 그녀는 나이보다 몹시 성숙한 몸매를 갖고 있었다. 교실 맨 앞에 앉아 있어서 키가 작은 줄 알았는데 교탁에 서있던 그녀는 국어 선생님 만큼이나 키도 컸고 교복 앞가슴에 단추도 살짝 벌어져 있었다.
그녀는 발표를 마치고 들어가면서 나를 보고 찡긋하고 눈을 깜박인 거 같았다. 난 그게 그녀가 진짜로 그렇게 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사시 때문에 내가 착각한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돌아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나는 그녀한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을 때 갑자기 에릭 방과 눈이 마주쳤다. 난 흠칫 놀라서 어깨를 움츠리며 시선을 돌렸다. 한참 뒤에 다시 뒤를 바라 보았을 때 에릭 방은 한쪽 입고리를 올리고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아직도 나를 쳐다 보고 있었다.
그 날 이후 나는 뒤에서 나를 유심히 쳐다보는 불안한 눈길이 느껴지곤 했다. 조심스레 뒤를 돌아다보면 에릭 방이 나를 보고 씩 웃다가 다시 선영이 쪽으로 눈길을 돌려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곤 하였다. 난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알아챈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혹시 저 놈이 눈치를 챘나?> 싶기도 하였다. 하지만 선영이와 난 말 한번 섞어 본 적이 없는 사이였다. 그러니 의심할 건덕지라고 할만한 것도 사실 없었다. 어떻게 눈빛만 보고도 사람의 속마음을 한번에 알아챌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나는 에릭 방에게는 그냥 무의미한 투명인간 같은 존재였다. 그는 내 이름조차도 모를 것이다.
만일 내가 그녀한테 호감이 있다손 치더라도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겠는가. 선영이는 내 존재조차도 모를 터인데. 그리고 에릭 방은 내가 감히 범접하기에는 너무나 차원이 다른 상대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여름 방학 전의 6월 수능모의평가 날이 되었다. 성적은 그동안 과외를 열심히 한 덕분에 학기초보다는 많이 올라간 상태였다. 그 정도면 웬만한 인 서울 대학의 괜찮은 학과에는 지원해 볼만한 점수였다.
문과생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국어가 딸리고 이상하게도 과학탐구에 많이 끌렸다. 아마 나도 모르게 내 몸속에 아버지의 유전자가 상속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학교에서도 특이하게 남들은 사회탐구를 주로 선택할 때 나는 과학탐구의 화학과 생명과학을 선택했다. 그외에는 한국사나 영어,수학은 2등급안에서 노는 등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였다. 모두 다 많은 돈을 쏟아 부으며 개인과외를 한 덕택이였다.
그 날 시험감독을 들어온 체육 선생은 학생들에게 자기가 무작위로 지정한대로 서로 자리를 바꾸라고 지시했다.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까탈스런 시험 감독이였다. 아이들은 서로 자리를 바꾸느라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정신없이 자리를 바꾸고 나니 내 바로 뒤에는 민변구가 앉아 있었다.
‘이런 젠장’
재수 없음에 나도 모르게 욕이 새어 나왔다. 나는 뒤에서 씩씩거리는 민변구의 숨소리마저 거슬렸다. 하지만 무슨 별 탈이야 있으랴. 시험만 끝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 갈 것을.
1,2,3교시는 별 일 없이 지나갔다. 3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 뒤에서 누군가 등을 쿡쿡 찔렀다. 민변구 였다.
“어이 심장! 너 잠깐 보자”
나는 코너에 몰린 토끼처럼 민변구를 따라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그는 나를 화장실로 맨 안쪽 칸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벽 쪽으로 나를 몰아 붙였다.
“너 내가 누군지 알지?”
왜 모르겠냐? 소문난 깡패세키의 아들. 몸에 야쿠자 문신을 새기고 다니는 장차 대한민국의 조폭이 될 타고 난 쓰레기중에 쓰레기. 민변구를 모르는 사람이 학교에 어디 있겠나.
“너 공부 좀 한다며?”
“응? 아니…그냥 그게…”
말도 끝나기 전에 민변구의 주먹이 내 멱살을 잡았다. 난 숨이 막혀 켁켁 거렸다.
“내가 요번에 갑자기 한국사를 잘 보고 싶어 졌거든. 답안지 내가 보이게 잘 해라”
“알…알았어…”
민변구는 내 멱살을 풀어주고는 그대로 담배 하나를 꼬나 물고 화장실 창문을 뛰어 넘어 밖으로 나갔다.
난데없는 봉변을 당하고는 교실로 돌아와 앉았다. 심장이 두근거려 책에 집중할 수 없었다. 차라리 아프다고 하고 조퇴를 할까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민변구를 피할 수 있을 거 같지는 않았다.
마침내 4교시 한국사와 선택과목시험 시간이 시작되었다. 뒤에서 누군가 자꾸 등을 쿡쿡 찔렀다. 민변구 였다.
“잘해라…”
나직이 목소리를 깔고 협박조로 나에게 말했다.
‘도대체 니가 나한테 뭘 해줬는데 내가 왜 너에게 내가 노력한 대가를 갖다 바쳐야 한단 말이냐.’
난 속으로 저항하였지만 겉으로는 아무 행동을 하지 못하였다. 시험이 진행되는 동안 신경이 쓰여서 문제가 눈에 잘 안 들어 왔다. 어차피 1학년 때 수능모의평가 한번 망쳐도 별 거 아니였다. 문제는 뒤에 앉은 민변구를 어떻게 만족시켜 주느냐 였다. 이 미친놈은 갑자기 왜 한국사를 잘 보고 싶다고 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것도 하필 내가 앞에 앉아 있는 순간부터.
나는 약속한 대로 겨드랑이 사이로 답안지를 삐쭉 내밀어 그에게 보여줬다. 더 이상 뒤에서 쿡쿡 찌르지 않는 걸로 보아서 적당히 만족한 듯 보였다. 그리고 민변구와 나의 인연은 여기서 영원히 끝나길 바랬다.
민변구와 그 패거리도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