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아래 회색빛 셔츠를 입고 서 있는 에릭은 비록 나에게는 천하의 몹쓸 악당이였으나 그의 탁월한 유전자 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은 얼굴과 길쭉한 팔다리,그리고 푸른 눈동자와 금발머리는 여름밤의 달빛과 절묘하게 조합을 이루어 나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 안현...지금 니 눈앞에 있는 사람은 브래드 피트도 로버트 패틴슨도 아니야...그저 한 학기동안 너를 그토록 괴롭히던 네명의 악당 중 한명일 뿐이라구...’
나는 정신을 차리고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최대한 정신을 집중했다.
에릭이 어떻게 우리집을 찾았는가는 차후의 문제였다. 우선 제일 먼저 알아채야 할 것은 에릭이 왜 이 시간에 우리집을 찾아 왔느냐는 것이었다.
에릭은 내 옆으로 다가와 천천히 주위를 맴돌았다. 그 모습이 마치 만찬을 즐기기 직전의 육식동물이 공포에 질린 초식동물을 조롱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설마 날 잡아 먹진 않겠지. 살인과 식인은 대한민국에서 중죄라구. 더구나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서울 시내 주택가 아닌가.’
그가 내 귓가에 다가와 킁킁하고 냄새를 맡았을 때는 정말이지 온몸에 소름이 확 돋았다.
‘이 미친 놈이 정말 뭐하자는거야...’
하지만 똥개도 자기집에서 50프로 먹고 들어간다는 말이 있듯이 여기는 나의 동네, 나의 집 바로 앞이다 난 여기서 무려 열일곱살이 될때까지 살았다. 도망을 치든 숨든지 간에 에릭보다 내가 빠를 것이다.
“나라면 도망치거나 숨을 생각은 하지 않겠어. 특히나 어머니 혼자 집에 계시다면.”
에릭의 말이 나의 순진한 생각을 곧바로 깨우쳐 줬다.
“너무 겁먹지 마라. 난 민변구처럼 폭력우선주의자가 아니니까.”
애써서 일부러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이르 듯이 말하고 있지만 난 저 놈의 본색을 잘 안다. 한학기 동안 그를 관찰해 온 나의 판단은 정확하다.
“폭력우선주의자는 아니라고? 한 학기동안 날 그렇게 괴롭혀 놓고 이제와서 아니라구?”
“이봐. 그렇게 흥분하지마. 잘 생각해봐.
널 그렇게 괴롭힌 건 민변구랑 신영귀, 차동팔 이야. 내가 아니라구.
내가 직접 니 몸에 손을 대거나 괴롭힌 적이 있었는지 잘 생각해봐”
난 말문이 막혔다. 에릭이 한 말이 사실이기는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난 그동안 그토록 에릭한테 화가 나 있었을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민변구 등은 에릭이 속한 패거리 V4의 멤버들이었고 그 멤버들의 우두머리는 자타가 공인하듯 바로 에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에릭, 너의 동의도 없이 나를 괴롭혀 왔다구?
“다 니가 시킨 거 잖아. 나를 심장이라고 놀리면서 말이야! ”
“응? 내가 시켰다구? 증거 있나?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난 그저 남들이 부르는 별명을 같이 따라 불렀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잘못인가?”
증거는 없어도 그보다 더 확실한 게 있었다. 바로 논리와 추론이다.
민변구와 신영귀, 차동팔이 에릭을 떠받들고 그의 말이라면 거스르는 법이 없다는 것을 한 학기 동안의 관찰을 통해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단지 내가 밝혀 내지 못한 것은 왜 그토록 그들이 에릭의 말이라면 꼼짝 못했냐는 것이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나? 그러다 날밤 새겠군.
너는 내가 이 한밤중에 너를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지 않나?”
“그래. 어서 말해봐. 대체 무슨 일인지. 혹시 너 나를 스토킹 하냐?”
나의 질문에 에릭은 제대로 답변하지 않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부터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 해봤으면 좋겠다.
내 눈을 속일 생각이란 집어쳐. 난 이 방면에 전문가니까.”
“난 정말이지 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대체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어. 난 오늘 상담실 들렸다가 그냥 집으로 바로…”
미처 말을 끝지도 못한 채 나는 에릭의 손에 의해서 멱살이 붙잡혀 졌다. 마른 몸에서 어떻게 그런 완력이 나오는지 난 꼼짝도 못하고 그의 한 손에 붙잡혀 대롱대롱 공중에 떠버렸다.
“자. 이제 말장난은 그만 하자.
난 여기 너를 구하러 온거야. 내가 바로 너의 구원자라고.
민변구로부터 달아나고 싶나?
남들처럼 온전한 심장을 갖고 싶나?
아니면 다른 거?
혹시 그 계집얘?”
난 폐부를 찔린 듯 움찔했다. 설마 이 놈이 선영이에 대한 내 감정조차 알고 있었던 것인가?
“후훗. 역시 그랬군.
전임자들의 말은 틀림이 없어.
세상 남자들은 딱 세가지 때문에 투쟁한다고 했거든.
돈과 권력 그리고 여자.”
“뭐…뭔 헛소리야…켁켁…제발 그만 내려 놓아줘”
에릭은 나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도리어 나를 움켜준 주먹에 힘을 주고 나의 목을 졸랐다.
“이봐…한심하고 가련한 친구…장선영이를 좋아 했나?
흐흐흐. 내 말만 잘 들으면 그따위 사팔뜨기에다 가난한 시골 촌뜨기년은 트럭으로 갖다 줄 수도 있어.
자. 이제 말해봐. 아까 빈교실에서 어디로 숨었는지. 어떻게 사라진거야? 어서…나한테만 말해봐…”
그는 마치 악마처럼 속삭였다. 처음 본 내 눈이 정확했다. 그는 악마중의 악마, 벨제붑이고 루시퍼가 맞았다.
“이런 미친…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나는 목이 졸려 거의 졸도 직전에 켁켁 거리며 말했다. 그 순간 골목을 지나가던 옆집 아주머니께서 이 광경을 목격하셨다.
“어머나. 너 옆집 현이 아니니? 아니 왜 한밤중에 누구한테 멱살을 잡히고 그래?
누구세요. 왜 남의 동네 와서 행패 부리고 그러세요?”
옆집 아주머니는 내 멱살을 움켜쥐고 있는 에릭을 보고 따져 물었다. 수다쟁이 옆집 아주머니의 참견이 그토록 고마웠던 적은 십칠년만에 처음이었다.
에릭이 나를 내려 놓더니 이번에 그 아주머니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갔다. 그러더니 아주머니의 머리채를 움켜 쥐고는 그대로 끌고가 전봇대에 박아 버렸다. 아주머니의 머리에서는 순식간에 쌔발간 피가 뿜여져 나왔다.
“에릭…이 미친…너 대체 무슨 짓을…”
에릭은 나를 돌아보며 표정없이 말했다.
“다 너 때문이야. 묻는 말에 째깍째깍 대답했으면 이런 일이 없잖아.”
난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내 불길한 예상대로 저 놈은 진짜 악마 놈이 맞았던 것이다. 난 다리가 후들거려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이. 데려가!”
에릭이 어둠 속으로 한마디 던지자 골목 모퉁이에서 검은 잠바를 입은 건장한 남자 셋이 뛰쳐 나와 나를 붙잡았다.
“뭐야! 당신들! 나를 내려놔!”
“여기서 더 시끄럽게 굴면 확 집에다 불 질러 버린다. 그럼 어떻게 되겠어?
너의 어머니께서 가뜩이나 무더운 여름날에 더 뜨거워 하시겠지?”
그 한마디에 나는 순순해질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무슨 일이 있어도 어머니만큼은 해를 입어서는 안됐다.
그들은 나의 양 팔에 팔짱을 끼고 골목 귀퉁이로 끌고 갔다.
“야. 여기도 좀 치워라. 동네 사람들 보기 전에”
에릭은 피범벅이 되서 쓰러진 아줌마를 가리키며 셋중 한 명한테 치우라고 명령했다.
나는 골목 모퉁이에 세워진 검은색 밴을 탔고 뒤 짐칸에는 동네 아주머니가 정신을 잃고 실려졌다.
“에릭….제발 저 아주머니는 살려줘. 우리 어머니도 잘 아는 아줌마야. 제발 부탁이야. 내가 시킨대로 할 테니 아줌마를 병원에다 데려다 줘”
나는 울면서 에릭한테 사정했다.
에릭은 앞자리에서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냉정히 답했다.
“늦었어.”
“응? 뭐라구?”
“쉬즈 곤.
너도 영어과니까 이 정도는 알아듣겠지?”
나는 영화를 찍고 있는 게 아니였다. 이것은 리얼이었다.
뒤에서 풍겨 오는 비릿한 피냄새…피로 범벅이 된 채 숨소리조차 없는 아주머니…만일 이 모든 것이 몰카라면 이 연출가는 에미상 리얼티티 프로그램 부분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받아야 마땅했다.
하지만 이것은 쇼가 아니었다. 이것들은 모두 다 오늘밤 내 눈 앞에서 진짜로 벌어진 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