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주소(chief complaint)
예정대로 1주일 뒤에 나는 다시 심리상담사를 만났다. 지난주와 똑같이 오후 6시 학생회관에서였다. 나는 6시 5분 전에 도착하였다. 2층으로 가니 심리상담사는 이미 원형 테이블에 착석한 상태였다.
“지현 씨, 안녕하세요.” 눈웃음을 지으며 심리상담사가 말했다. 5월의 햇살처럼 싱그러운 목소리였다.
반대편 자리에 앉으며 나도 인사를 했다. 심리상담사는 핸드백 지퍼를 열었다. 심리상담사가 꺼낸 건 저번 시간에 작성했던 설문지와 그림이었다.
“공부한다고 많이 힘드시겠어요. 시험이 다다음 주라고 했죠?” 나에게로 살짝 몸을 기울이며 심리상담사가 말했다.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주변은 어두웠다. 테이블을 밝히는 백열등은 촛불처럼 위태로웠고, 어둠만큼 많은 양의 침묵이 테이블을 휘감고 있었다.
“네, 2주 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시험이에요.”
“얼마 안 남았네요. 그러면 오늘은 최대한 빨리 끝내도록 할게요.” 그림을 내 앞으로 돌리며 심리상담사가 말했다.
“우선 지난주에 지현 씨가 그렸던 그림부터 같이 볼게요.”
지난주에 내가 그렸던 집과 나무, 그리고 산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테이블 중앙에 그림을 놓으며 심리상담사는 설명을 시작했다.
“그림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일부분을 드러나게 해요. 집을 먼저 살펴볼게요. 우리는 집에서 먹고, 자고, 지내잖아요. 따라서 집은 무의식적으로 지현 씨 자신을 드러내요. 그런데 지현 씨가 그린 집에는 문은 있지만 문고리가 없네요. 문은 집과 외부세계와의 통로에요. 따라서 문은 있지만 문고리가 없다는 것은 타인이 자신의 삶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해요.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지현 씨는 그 사람을 거부하는 거예요. 이것은 지현 씨의 마음이 닫혀 있다는 것을 말해요. 어떠한 원인에서든지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두려워 한다는 것을 의미해요. 창문은 외부세계를 내다보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집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쌍방향의 통로 역할을 해요. 창문은 있는데 그것이 커튼에 가려져 있네요.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현 씨의 생각이에요. 타인이 지현 씨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차단하고 싶은 거예요.
다음은 나무를 살펴볼게요. 줄기에서 뻗어나온 가지를 한번 보실래요? 나뭇가지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뜻해요. 지현 씨의 나무에는 듬직한 가지가 하나 있지만 그게 다군요.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믿음직한 사람이 있는데, 가지가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은 그 사람 말고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걸 뜻해요. 가지는 방향도 중요해요. 지현 씨가 그린 가지는 위쪽이 아니라 아래쪽을 향하고 있어요. 지금 지현 씨는 어떤 상황에 대해서 두려움이나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번엔 산을 볼게요. 산은 지금 지현 씨가 극복해야 할 문제를 암시해요. 지현 씨가 그린 그림에는 아주 큰 산이 하나 있고, 몇 개의 작은 산들이 흩뜨려진 상태로 주위에 놓여 있네요. 지현 씨는 상당히 난해한 문제를 맞닥뜨리고 있지 않나 싶어요.”
나도 모르게 뺨이 붉게 물들었다. 현미경용 표본처럼 온 몸 구석구석이 적나라하게 해부된 기분이었다. 그림 설명을 마친 심리상담사는 별다른 말없이 곧바로 설문지로 넘어갔다.
“설문지를 한번 살펴봤는데요. 어떤 이유로 지현 씨는 다소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생각이 많은 타입인 것 같아요. 생각이 많다는 건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단점이 될 수 있어요. 그리고 지현 씨에게는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다소 부정적인 사고를 하고 있으니까요. 설문지 항목 중에서 미래에 대한 답변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아니다’와 ‘매우 아니다’로 나오거든요. 아직 들이닥치지 않은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는 것은 신중하다는 측면에서 장점이 되기도 해요. 하지만 그게 부정적인 생각이라면 쓸데없는 지나친 걱정일 수도 있어요. 제가 볼 때는 좀 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셔야 할 것 같아요.”
막 떨어지려는 나뭇잎처럼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번에도 심리상담사의 분석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지현 씨가 기입한 인적사항을 봤는데요. 고민에 대해서 딱히 없다고 기입하셨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은 이걸 한번 해 볼게요.”
지난주의 그 설문지가 떠올랐다. 전신 탈모증을 털어놓을 수 없었던 나는 고민이 딱히 없다고 기입했었다. 유순한 인상과 달리 심리상담사는 무엇하나 적당히 넘어가지 않았다. 심리상담사는 종이 한 장을 내밀며 설명해 주었다.
“과거와 현재랑 미래의 고민에 대해서 알아보는 방법이에요. 우선 지현 씨는 과거에 어떤 고민들을 하셨나요? 자잘한 고민들 말고 큼지막한 것 몇 개만 적어주시면 돼요. 다른 분들의 경우, 보통 성적과 이성문제, 성격, 가정문제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시더라고요.”
심리상담사와 나 사이의 거리는 불과 50센티미터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질문을 받자, 뭔가 가상의 울타리가 세워진 기분이 들었다. 모종의 단절된 느낌이었다. 현재의 고민이 뭔지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1마이크로초도 안 되는 찰나의 시간 만에 나는 곧바로 미래와 과거의 고민으로 넘어갔다. 마찬가지였다. 과거와 미래의 고민 역시 1마이크로초도 소비할 필요가 없었다. 세 가지 고민은 하나의 교집합을 이루었다. 교집합이자 합집합이었다.
잠시 동안, 내 머릿속은 영혼이 이탈한 텅 빈 탁구공에 지나지 않았다. 심장이 뛰고 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시체와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지현 씨.”
나를 현실로 복귀시킨 것은 심리상담사였다. 현실로 귀환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난 시간처럼 ‘딱히 고민이 없다’라고 기입할 뿐이었다. 그걸 본 심리상담사는 뭔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무거운 침묵의 흐름 속에서 심리상담사는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시험기간이고 하니까 그냥 지금 끝낼게요. 지현 씨가 많이 피곤해 보이네요. 2주 뒤 마지막 상담시간에는 조금 다른 걸 해 볼게요. 아마 지현 씨에 대해서 많은 걸 깨닫게 해줄 거예요.”
16. 심리적 고통(psychological distress)
방학을 맞이한 오후 6시의 캠퍼스는 인적이 드문드문했다. 나는 학생회관에 들어갔다. 1층은 물론 2층에도 아무도 없었다. 여유 있게 도착한 나는 같은 자리에서 심리상담사를 기다렸다.
“지현 씨, 지현 씨.”
심리상담사였다. 나도 모르게 꾸벅 졸고 있었다.
“많이 피곤한가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시험은 잘 치셨어요?”
“그냥 뭐, 그럭저럭이요.” 심리상담사의 말에 나는 형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방학해서 좋으시겠어요. 크리스마스 다음 날에 출발하신다고 하셨죠? 제일 먼저 들르실 도시는 어디에요?”
“부산부터 갈 예정이에요. 해산에서 가깝기도 하고, 또 해운대 바다를 보고 싶어서요.”
“우와, 부산이요? 정말 부럽네요. 재밌게 잘 갔다 오세요. 그럼 이제 시작할까요?”
심리상담사는 가방에서 A4용지 한 장과 볼펜 하나를 꺼내었다. 그러고 나서 오늘 진행할 상담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저번과는 달리 상담은 여유로운 분위기하에서 시작되었다.
“이번 시간에는 지현 씨의 삶에서 일어난 큼지막한 일들에 대해서 알아볼게요. 지금까지의 삶에서 있었던 일들을 1년 단위로 살펴볼 거예요. 가로축은 한 살 단위로 23살까지 적고, 세로축은 0을 기준으로 해서 위쪽은 플러스, 아래쪽은 마이너스라고 생각해 주세요. 그 나이 때 행복했다고 생각되면 플러스, 그다지 안 좋았다고 생각되면 마이너스로 나타내주세요. 많이 행복했거나 많이 불행했다면 절댓값이 클 것이고, 행복과 불행의 정도가 적었다면 절댓값이 작겠죠. 23개의 점이 찍힌 뒤에 그것을 쭉 이으면 그래프가 될 거예요. 그렇게 하면 지현 씨가 23년 동안 겪었던 일들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살펴볼 수 있어요. 그걸 마친 뒤에는 앞으로의 인생에서 일어날 일들도 상상해서 한번 해 볼게요.”
A4용지를 가로로 길게 놓으며 나는 가로축과 세로축을 그렸다. 가로축과 세로축은 A4용지의 짧은 변의 중앙 부근에서 하나의 점으로 만났다. 접하는 부분에다가 나는 0이라고 적었다. 가로축에는 1년 단위로 숫자를 적어 23까지 적었다.
“너무 세세한 기억까지 떠올릴 필요는 없어요. 과거를 떠올렸을 때 전반적으로 좋았다고 생각되면 플러스, 안 좋았다고 생각되면 마이너스라고 생각하면 돼요. 1, 2살 때는 기억이 안 날 수도 있으니까 기억나는 나이부터 시작하면 돼요.”
심리상담사가 말을 맺음과 동시에 나는 과거를 반추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4살부터였다.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았다. 딱 한 가지 정경만이 떠올랐다.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는 밝은 거실에서 인형을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었다. 황금빛 머리카락이 보슬보슬한 여자 인형이었다. 플러스에서 첫 번째 점을 찍으며 나는 5살로 넘어갔다. 5살부터 7살까지니, 유치원 때였다. 마찬가지로 많은 기억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그림을 그렸던 몇 장면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혼나서 울음을 터뜨렸던 적도 있었다. 그때는 슬펐겠지만 지금은 엷은 웃음이 나왔다. 지금 돌이켜 볼 때 딱히 나쁜 기억은 없었다. 3개의 점 모두 플러스 구역에 찍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8살이 되자 좀 더 생생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안락한 정경들로 구성된 다채로운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맥도날드에서 했던 생일잔치, 컴퓨터 게임, 해리포터, 경찰과 도둑, 아바타 스티커. 모처럼 그 시기를 떠올리니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때라고 해서 힘든 순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행복한 기억들이 모든 것을 미화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플러스 행진과 함께 나는 중학교로 넘어갔다. 중학교 1학년을 떠올리자 교실의 안락한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중학교 2학년 때는 해산바닷가에서의 물놀이가 떠올랐다. 겨울철 난로처럼 포근하고 따뜻한 기억들이었다. 오랜만에 떠올린 과거에 가슴속이 훈훈해지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16살이니 중학교 3학년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펜이 파르르 떨렸다. 그 이전과는 다른 부류에 속하는 기억이었다. 이미 여러 번, 아니 무수히 떠올렸던 과거였다. 떠올리기 싫어도 제멋대로 나타나 머릿속을 헤집어놓은 악몽이었다. 가슴속에 묻혀 있던 16살의 악몽은 다시 한 번 좀비처럼 되살아났다. 원형 탈모증의 공포는 또다시 머릿속을 난도질했다. 붉은 선혈을 내뿜으며 뇌세포들은 카스테라처럼 뭉개졌다. 신경계의 사고회로는 이물질이 끼여 작동이 멈췄고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가슴 한구석이... 누군가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아리었다. 그때처럼 날카롭지는 않지만 아직도 먹먹하게 아려왔다. 가슴속에 박힌 칼날은 분명 무디어졌지만 여전히 꿈틀거리며 통증을 유발했다.
흉통을 느끼며 나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의식적으로 펜을 쥔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15살의 끝으로부터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커브를 그려 16살의 미트에 꽂았다. 17살, 고등학교 때부터는 도대체 어떻게 나타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나의 고등학교 3년은 전신 탈모증 그 자체였다. 그 외의 모든 기억들은 바다 속에 가라앉은 하찮은 부스러기처럼 여겨졌다. 전신 탈모증의 악몽은 어떠한 점과 부호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잠시 동안, 나는 우물쭈물했다. 그러다 16살의 지점과 비슷한 높이에 3개의 점을 찍었다. 대학교에 진학한 20살부터는 추세가 달라졌다. 매 순간을 청명과 함께였다. 머리 상태는 그대로였지만 뭔가 많이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교 시절, 밑바닥을 찍었던 그래프는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구렁텅이는, 그러나 빠져나오기엔 너무나도 깊었다. 20살부터 계속 상승세를 나타냈지만 결국 마이너스를 벗어나지 못한 채로 나는 23살에 이르렀다. 7년 전, 급작스레 폭락한 주식 그래프는 아직도 마이너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힘겹게 과거와 현재를 회상한 나는 이제 미래를 떠올려 보았다. 생각하기 싫어도 이따금씩 생각했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뒤와... 결혼 적령기인 서른 살이 됐을 때를 나는 상상해 보곤 했다. 그리 머지않은 미래였다. 그 순간이 들이닥친다면 어떻게 될지, 나는 다시 한 번 상상해 보았다. 철벽, 굳건히 자리 잡은 철벽. 미래를 떠올릴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 멀지 않은, 결코 피할 수 없는 미래가 거대한 해일처럼 막막하게 느껴졌다. 뛰어넘을 수 없는 커다란 벽이 나는 두려웠다. 결국 나는 23살의 지점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었다. 머리를 짓누르는 고립감을 느끼며 나는 꼼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16살 때 갑자기 그래프가 엄청나게 떨어지네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며 한참을 현재에서 얼쩡거리자, 보다 못한 심리상담사가 개입했다. 심리상담사의 쌍꺼풀진 눈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믿음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말해도 될 것 같았다. 청명 이외에 그 누구에게도 말 못한 비밀을 털어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전신 탈모증이라는 다섯 글자를 말하려고 했지만 끝내 말할 수 없었다. 말을 하려고는 했는데 울려 퍼지지가 않았다. 전신 탈모증 한 단어는 마치 나비가 되지 못한 번데기처럼 결정체로 태어나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지현 씨, 그때 무슨 일이 있었나요?”
머리 위의 희미한 백열등만이 칙칙한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나는 살금살금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그때 난치병에 걸렸어요. 그래서...”
전신 탈모증을 난치병이라고 표현하며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지금은 괜찮아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인가요?”
눈빛의 강도를 한층 높이며 심리상담사가 말했다.
“난치병인데, 치료를 받지 않아도 죽지는 않아요. 육체적으로 엄청난 통증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요. 치료는 받아 봤지만 실패했어요. 지금은...” 말꼬리를 흐리며 나는 말을 마쳤다.
“무슨 병인가요?”
심리상담사의 새까만 머리카락과 숯덩이처럼 짙은 눈썹이 시야를 사로잡았다. 말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블랙아웃과 화이트아웃이 스펙트럼처럼 찰나의 간격으로 번갈아 나타났다. 머릿속이 번잡해졌다. 그래도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생각이 아른거렸다. 그러기엔 전신 탈모증은 너무나도 무거웠다. 결연한 의지가 아니고선, 목구멍으로 끌어올릴 수 없었다. 번민에 휩싸인 머릿속은, 사고회로를 전환하기에 이르렀다. 말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는 생각이 다시 한 번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새로운 구조의 회로는 순식간에 조립되어 제 기능을 수행했다.
“죄송해요. 말 못할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는 괜찮은 것 같아요.”
이제 겨우 세 번째 만남이었다. 하지만 분명 믿을 수 있는 분이었다. 그렇기에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논리적 사고는 가동되지 않았다. 그저 말하기 싫었고, 말하는 게 두려웠다. 두렵다기보다는 말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전신 탈모증이라는 말을 꺼내려는 순간 무언가 보이지 않는 기운이 나의 성대를 움켜쥐는 것 같았다. 치고 박던 머릿속을 진정시킨 것은 심리상담사였다.
“지현 씨. 그러면 다른 사람한테는, 가족 이외의 다른 사람한테는 털어 놓은 적이 있나요? 누군가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나요?”
정면 돌파에 실패한 심리상담사는 질문의 방향을 살짝 틀었다. 머릿속에선 청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청명의 얼굴은 정밀화처럼 세밀하게 그려졌다.
“네, 친구 한 명한테는 털어놓았어요.”
말을 하면서 뭔가 해방감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그 친구는 어떤 사람인가요?”
심리상담사의 말에 머릿속의 정밀화가 동영상으로 꿈틀거렸다.
“저랑 같은 병을 앓고 있어요. 나이는 저랑 동갑인데 저보다 훨씬 일찍 병이 발병했어요. 그 때문에 저는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처음 만난 건 중학교 때 병원에서였어요. 고등학교 때도 틈틈이 연락을 주고받았고, 시간이 날 때면 함께 해산공원을 산책했어요. 지금은 같은 원룸 같은 층에서 살고 있어요.”
항상 그랬지만 내가 말을 할 때마다 심리상담사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푹신한 양털처럼 더없이 보드라운 움직임이었다.
“정말 다행이네요. 지현 씨에게도 그리고 그 친구에게도 말이에요. 두 사람은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을 거예요. 그런데 지현 씨. 지현 씨는 왜 저한테 난치병에 걸렸다고 말했을까요? 구체적인 병명은 알려주기 싫은데 왜 그런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심리상담사의 입에서 튀어나온 화살은 또다시 급소로 날아와 그대로 명중하였다. 가슴이 뜨끔하면서 뭔가 들켰다는 기분이 들었다.
“...잘 모르겠어요.”
머릿속의 이성은 이미 마비된 상태였고, 나는 또다시 뭔가 거리감을 느꼈다. 심리상담사와 나 사이엔 팔을 뻗으면 닿을 만큼의 물리적 거리가 존재했지만, 그 순간엔 마치 초자연적인 압력이 가해져 그 거리가 무한히 팽창한 것 같았다. 테이블에는 거리만큼 무거운 침묵이 놓였다. 골똘한 표정을 지으며 심리상담사는 뭔가를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저 심리상담사의 다음 행동을 기다릴 뿐이었다. 심리상담사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불과 30초도 지나지 않았지만, 그것의 몇 십 배는 되는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제 생각을 말씀드릴게요.”
뭔가 굳은 결심을 내린 것 같은 표정으로 심리상담사가 말했다. 눈빛이 워낙 강한 바람에 나는 시선을 내리깔고 말았다.
“지금 지현 씨의 마음속에선 두 가지 생각이 대립 중인 것 같아요. 비록 지현 씨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겠지만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은 심정을 가지고 있어요. 그건 어떻게 할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에요. 지현 씨처럼 말 못할 비밀을 가지고 있다면 더욱더 그러고 싶을 거예요. 하지만 말 못할 비밀이기에 실토하고 싶어도 실토할 수가 없겠죠. 지현 씨 뿐만이 아니에요. 그렇게 많이는 아니지만 난치병 환자들을 상담해 본 적이 있어요. 대부분 비슷했어요.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난치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들킨다면 사회에서 배제될 수도 있겠죠. 어쩌면 공장에서 잘못 찍어낸 불량품 취급을 받을 수도 있겠죠. 다들 그것을 두려워했어요. 지현 씨도, 그들처럼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그 난치병을 꽁꽁 숨기고 있는 것 같아요. 마치 새끼를 보호하는 캥거루처럼 말이에요. 자신도 모르게 형성된 일종의 방어기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방어기제가 문제가 되고 있어요. 털어놓고 싶다는 본능과 숨겨야 한다는 방어기제가 서로 마찰하고 있거든요. 마치 격렬하게 몸통을 맞부딪치는 풋볼 선수들처럼 말이에요.”
나는 눈을 살짝 내리깔아 심리상담사의 시선을 회피하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심리상담사는 내가 그린 그래프를 들어올렸다. 눈빛을 번쩍이면서 다시 분석에 들어간 것 같았다. 즉석에서 답안지를 채점 당하는 기분이었다.
“열여섯 살 때부터였으니 벌써 7년이나 되었네요. 시간이 약이라는 말대로 지현 씨가 느꼈던 예리한 아픔은 바다처럼 넓고 깊은 시간 속에서 많이 희석되지 않았나 싶어요. 난치병이다 보니 치료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난치병과 공존하는 삶에 적응하지 않았나 생각돼요. 하지만, 많이 힘들었겠죠. 오랫동안 쌓아올린 삶이 급작스레 고꾸라질 만큼 크게 좌절했겠죠. 육체적인 고통을 가하지 않는다 해도 정신적 차원에서는 재난처럼 느껴졌을 거예요. 그래프가 그리 말해 주고 있거든요.”
얼굴은 계속해서 화끈거렸다. 그 때문에 두피에는 습한 땀이 맺혔고, 이 와중에도 가발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의식되었다. 그래프를 내려놓고 손을 포개며 심리상담사는 말했다. 살짝 굳은 표정이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지현 씨는 현재를 꾸역꾸역 버텨내고 있어요. 쓰라린 과거와 갑갑한 미래에 끼인 채로 현재라는 짐을 질질 끌고 다니고 있어요. 마치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운동선수가 악을 쓰며 경기를 치르는 것처럼 말이에요. 지금 지현 씨에게는 휴식이 필요해 보여요. 심리적인 지지와 도움이 필요할 거예요. 지현 씨는 아직 정신적으로 치유되지 못했으니까요.”
이전까지만 해도 나는 심리상담사의 분석에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난치병이 치유되지 못한다면 당연한 것 아닌가요? 근본적인 병이 낫지 못하는데 어떻게 정신적으로 치유된다는 건가요?”
울컥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약간 삐딱하게 말했다. 얼마간 쏘아붙인다는 느낌이 드는 어조였다. 그럼에도 심리상담사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마치 어리석은 승려를 내려다보는 돌부처 같은 모습이었다.
“맞아요. 난치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길은 분명히 그 병의 완치겠죠. 하지만 난치병이 치유되지 못하더라도 그게 다는 아니에요. 설령 육체는 난치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라도 정신적으로는 많은 부분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평생토록 그 병과 함께 살아갈지라도, 어떤 환경에서 어떤 생각을 갖고 지내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삶은 확연히 달라지거든요. 어쩌면 그 차이가 모든 것을 뒤바꿀지도 몰라요. 결국... 그 난치병이 모든 문제점들의 뿌리였네요. 제가 지현 씨에게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왼손을 인중에 대면서 심리상담사는 말의 끝머리를 흐렸다. 깊은 고심에 빠진 철학자 같은 표정이었다.
“삶이란 기나긴 터널을 걷는 것과 비슷해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평생토록 걸어가야 할, 끝을 모를 터널이죠. 워낙 긴 터널이다 보니 그 안에서는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게 되죠. 기쁨과 행복을 느낄 때도 있지만, 무수히 많은 일들 중에는 좌절과 질곡도 있을 거예요. 이따금씩은, 아주 드물게는, 깊은 나락으로 추락할 수도 있겠죠. 그렇기 때문에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되고 막막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지현 씨처럼, 난치병이라는 무거운 짐을 가슴에 얹고 살아야 한다면 더더욱 그렇겠죠.
하지만 지현 씨, 한 가지 명백한 건, 지현 씨가 반드시 기억해두어야 하는 건... 그 터널도 언젠가는 끝날 거라는 사실이에요. 인간의 삶은, 유한하니까요. 인간은 살아감과 동시에 죽음에 근접해가는 역설적인 존재니까요. 그게 모든 인간의 숙명이거든요. 그러니까 지현 씨... 어차피 나아가야 한다면 밝은 쪽을 보고 걸어가세요. 어두운 시간 속에서도 따스한 햇볕 한 줌쯤은 들기 마련이니까요. 어둡고 칙칙한 순간들을 물리칠 수 있는 건, 결국 한 줄기의 성스러운 햇빛뿐이니까요.
그리고 누군가 자신과 비슷한 질곡을 겪은 사람이 있다면, 그 분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또한 자신의 어려움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털어놓길 바라요. 혼자서 들기엔 너무나도 벅찬 짐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여기까지네요. 상담은... 이쯤에서 마치도록 할게요. 언젠가 지현 씨가, 세상에서 가장 긴 터널의 출구에 도달했을 때, 후회 없는 시간들을 보냈길 진심으로 바랄게요.”
17. 원형 탈모증 지지 모임(alopecia areata support group)
“지현아. 창밖을 봐. 눈이야 눈.”
창밖을 바라보니 눈의 향연이었다. 6년 만이었다. 청명을 만난 그해 겨울 이후 내린 첫 눈이었다. 청명과 나는 하늘을 수놓는 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구슬처럼 고이 내리던 눈은 점점 거세졌다. 서울 행 열차가 해산역을 떠날 무렵엔 폭포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역동적으로 쏟아졌다.
참고 문헌
1. C. 홀든, [주석], A 벨, [모발], (뉴어크: 러트거스 대학교, 2013), 78쪽
2. Orphanet-prevalence of alopecia universalis, alopecia totalis
3. [용감한 대머리 언니]
4. [헤어]
5. Rose Weitz(인터뷰의 구술을 정리한 후 해석한 것입니다.)
6. Randomized trial of aromatherapy: successful treatment for alopecia areata
IC Hay, M Jamieson, AD Ormerod - Archives of dermatology, 1998 - jamanetwork.com
7. Onion juice (Allium cepa L.), a new topical treatment for alopecia areata
KE Sharquie, HK Al‐Obaidi - The Journal of dermatology, 2002 - Wiley Online Library
8. The psychological impact of alopecia
Nigel Hunt, Sue McHa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