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식이 요법(diet therapy)
수요일 하굣길, 8차선 신호등 앞에서 나는 불이 바뀌길 기다린다. 엷은 바람이 머릿결을 스쳐가고, 나는 왼손으로 앞머리를 어루만진다. 원룸촌 위에는 노을빛으로 염색된 붉은 하늘이 컴퓨터의 바탕화면처럼 놓여 있었다.
여느 때와 달리 나는 대학로의 L분식집에 들르기로 했다. 점심시간이면 항상 대학생들로 북적이는 곳이었다. 가격도 저렴하고 배달도 가능해서 나도 자주 시켜 먹곤 했다.
예전에 다닌 R한의원의 한의사는 기름진 음식 대신 무나물을 즐겨 먹으라고 했다. 때문에 나는 비빔밥을 자주 먹었다. 하지만 매일 그럴 순 없었다. 인간의 의지로는 결코 쉽지 않았다. 하물며 나는 어떠한 보장도 받지 못했다. 100일 동안 쑥과 마늘을 먹으면 인간이 되리라는 확언을 들은 웅녀와 달리 말이다. 만약 머리카락이 난다는 확약을 받는다면, 나는 100일이 아닌 1000일이라도 비빔밥만 먹을 자신이 있었다. 당연히 그런 기적적인 약속을 해주는 절대자는 실존치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일주일에 이삼일은 먹고 싶은 음심을 먹었다.
나는 오징어덮밥을 주문했다. 점심시간에 밥 먹을 때면 나는 맵거나 뜨거운 음식은 절대로 선택하지 않았다. 설렁탕, 떡볶이, 제육덮밥 따위의 음식을 먹으면 두피에 땀이 맺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몇 번 그랬던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고약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식사를 멈추고 가발을 벗어던진 뒤에 티슈로 닦아내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땀이 증발해도 그 꿉꿉한 끈적거림은 연속되기에 나에게 있어 매운 음식은 절대 금지였다.
오징어덮밥을 먹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캡사이신에 자극 받은 두피의 땀샘들이 땀방울을 흠뻑 쏟아 냈고 무더운 습기가 온 두피로 차오르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할 무렵, 두피와 가발 사이의 절묘한 틈은 완전히 땀으로 뒤덮였다.
지금은 상관없었다. 오늘은 가발을 씻는 수요일이기 때문이다. 밖에 나가기만 해도 땀으로 흥건해지는 여름철이면 매일매일 가발을 씻어야 했다. 하지만 그 외의 계절에는 굳이 매일 씻지 않아도 무방했다. 청명의 조언이었다. 내가 처음 가발을 샀을 때부터 청명은 일주일에 2번 정도 세척하라고 추천해 주었다. 나는 청명처럼 수요일과 일요일에 가발을 씻었다.
나는 피지 분비가 많이 되는 타입이다. 피지, 속된 말로 개기름은 손바닥과 발바닥을 제외한 온 몸에서 분비되는데 특히 얼굴에서 많이 분비된다. 또 다른 한 군데, 분비가 많이 되는 곳이 있는데 바로 두피다. 지금 내 머리가 딱 그랬다. 비탈모인이라면 두피가 머리카락으로 덮여 있어 그냥 머리에 떡이 질 뿐이겠지만 내 경우는 아니었다.
다닥다닥 반창고가 붙어 있는 가발을 조심스레 벗으니 지용성 액체의 막으로 머리가 뒤덮여 있었다. 땀과 피지가 혼합된, 점성이 아주 높은 기름막이었다. 가발을 씻기 전에 나는 얼굴과 두피에 형성된 그 투명한 막부터 씻어 내기로 했다. 물과 비누를 동원하여 그 끈적끈적한 막을 말끔하게 씻어낸 나는 가발을 집어 올렸다. 목적은 머리 감기와 동일했다. 과정도 얼추 비슷했다. 다만 좀 더 각성할 필요가 있었다. 가발과 함께 화장실에 들어서자, 뇌는 평소보다 집중력을 20퍼센트 향상시켰다. 하루 이틀 쓰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한번 손상되면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기에, 가발을 씻을 때는 평소보다 좀 더 예민해질 필요가 있었다.
왼손은 가발, 오른손은 샤워기를 들었다. 오른손 손가락을 갖다 대어 나는 물줄기의 속성을 확인해 보았다. 합격이었다. 물살의 세기도, 온도도 적당했다. 중간 강도로 흘러나온 미지근한 물살로 나는 가발 겉 부분을 흠뻑 적셨다. 샤워기를 옮겨서 가발 안쪽에 베인 땀도 말끔하게 씻어냈다. 그런 다음 나는 샤워기를 내려놓고 트리트먼트를 짜내어 가발에 묻혔다. 나는 다시 샤워기를 들어올려 미지근한 물로 가발을 충분히 헹구었다. 그런 뒤에 나는 오른손에 빗을 들어 머릿결대로 가발을 빗기 시작했다. 머릿결대로 빗지 않으면 나중에 물기가 마른 후 헤어스타일이 이상하게 변질된다. 때문에 가장 중요한 과정이었다. 미술시간에 소묘하듯이 나는 손길 하나하나에 정성을 담아 부드럽게 빗었다. 그다음은 닦기였다. 본래 머리처럼 수건으로 빡빡 문지르면 마찰력 때문에 훼손될 우려가 있었다. 반창고가 10개나 붙어 있는 새 가발을 그렇게 닦았다간 소보로빵처럼 으스러질 것 같았다. 때문에 나는 보드라운 수건을 꺼내어 보물을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물기를 닦았다. 얼마간 물기를 닦은 가발에다가 나는 가발 전용 단백질 스프레이를 두 번 뿌렸다. 다음으로, 헤어드라이기의 미지근한 중간 바람으로 물기를 말렸다. 물기가 마른 가발을 빗으로 가지런히 고름으로써 나는 가발 정돈을 완료했다.
청명의 조언이었다. 샴푸 대신에 트리트먼트를 추천했고, 단백질 스프레이는 적당량 사용할 것을 권유했다. 트리트먼트의 경우, 샴푸의 기능도 갖춘 데다 조금이나마 영양을 공급해 주고, 단백질 스프레이는 너무 많이 뿌리면 가발에 떡이 지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게 청명이 몸소 겪은 시행착오였고 나에게는 한마디 한마디가 주옥과 같았다.
“Ya te encontre varios rasgunos Que te hicieron por ahi
(나는 이미 너의 다양한 상처들을 봤어, 너를 지금 여기에 있게 한.)
Pero mi loco amor Es tu mejor doctor
(그렇지만 나의 엄청난 사랑은 너의 가장 좋은 의사일 거야.)
Voy a curarte el alma en duelo
(나는 고통 받는 너의 영혼을 치료해 줄 거야.)”